마음의 고향 같은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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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 같은 친구
  • 은옥주
  • 승인 2017.07.18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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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짝꿍이 된 여중생

보통 열차가 덜커덕 거리며 조그만 시골 역사에 들어섰다.
꽃밭에는 봉숭아, 맨드라미, 백일홍, 붓꽃 등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꽃들이 가득하다.
약간 어둡고 아담한 역사 안으로 들어서니 은빛머리에 빨간 립스틱의 할머니 한사람이 활짝 웃으며 나를 반긴다. “주야 왔나? 오느라고 고생했재?”
여전히 담백하고 느릿느릿한 낯익은 목소리. 언젠가부터 친구는 머리 염색하는 것을 그만두고 검은머리 한 개도 없는 하얀 백발에 화장기 없는 맨얼굴로 자연스러운 삶을 살기 시작했다.
주변의 늙어 보인다, 보기 싫다, 기운 없어 보인다, 초라하다 등등의 여러 의견을 일축하고 소신대로 백발을 훈장으로 선택했다.
나는 그 하얀 머리빛이 편안한 얼굴과 잘 어울려 참 아름답고 신비롭다는 생각이 들어서 맘껏 칭찬해주며 빨간 립스틱을 선물했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여자 중학교를 입학한 날, 키 순서대로 서서 짝을 맞춘 뒤 뒤에서 둘째자리에 우리는 운명처럼 짝꿍으로 만났다.
친구는 얼굴이 좀 둥글납작하고 말소리도 행동거지도 좀 느릿느릿한 맘 좋아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다. 참 여러 가지로 서로 닮은 구석이 많아 금새 친해진 우리는 늘 손을 꼭 잡고 돌아다녀서 선생님과 친구들에게서 쌍둥이 같다고 놀림을 받기도 했었다.
학교 오갈 때도 집이 같은 방향이라 추운 겨울에도 벙어리 장갑을 한짝씩 끼고 무거운 가방을 들고 꽤 먼거리를 같이 걸어다녔다.
가끔 의견이 다를 때 좀 팔팔한 내가 싸움을 걸면 친구는 “그래 미안하데이. 내가 잘못했데이.” 한마디로 받아주어 싸움이 안 되었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50여년간을 나는 그 친구와 말다툼을 하거나 큰 언쟁을 한 기억이 없다.

중, 고교시절 앨범 속에는 검은색 교복에 허리를 조이고 발목은 묶고 새하얀 칼라를 단 차림으로 같이 찍은 사진들이 가득하고 그 시절 모든 사진 속에는 항상 그 친구의 얼굴이 있다.
대학문제로 나는 서울로 왔지만 방학이 되면 보따리를 싸서 대구로 내려가 같이 다니던 친구들과 여행도가고, 즐겁게 지냈던 추억들이 참 많다. 친구는 대학 졸업 후 영어 선생님이 되어 첩첩산골의 시골중학교나 고등학교에 근무했었고 나는 덕분에 경상도에 전기도 없는 깡 시골에서 시냇물에 발 담그고 시원한 수박, 참외 등을 물에 동동 띄워놓고 먹던 추억과 더불어 반딧불이를 쫒아다니고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고 가을이면 밤 따러 다니던 갖가지 추억들이 풍요롭다.

내가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또 IMF로 흙탕길을 헤메는 동안 그 친구도 두 번의 결혼 실패로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며 우리는 그래도 꿋꿋하게 그걸 다 이겨냈었던 것 같다.
친구는 시골 중학교에 근무하던 때 교사 사택에 살았는데 어느 주말 캄캄한 밤에 문밖으로 나오니 다른 선생님들이 다 집으로 가버리고 사택이 텅비어 너무 캄캄하고 절절이 외로움이 밀려들어서 서 있을 수도 앉을 수도 없을만큼 힘들었다고 한다.
친구는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며 “진짜로 힘들더라. 불켜진 건 내 방뿐인기라.” 라고 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금요일 날 미리 시장보고 일도 다 해놓고 주말에는 절대로 방 밖에는 한 발자국도 안 나가고 방에만 있었다고 했다.





친구는 어느날 조기은퇴를 하고 시골에 들어가 조그만 집 하나를 사서 오랫동안 그 곳에 살고 있다. 집이 작으니 물건도 아주 조금만 필요한 것만 갖고 연금이 넉넉하니 좀 더 큰 집으로 이사하면 어떠냐는 주위의 권유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 집을 알뜰살뜰히 쓸고 닦고 가꾸며 산다. 집 가까이에 있는 강변을 아침저녁으로 산책하며 자연을 누리는 것이 참 기쁘고 봄이면 쑥 뜯고 냉이 캐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다고 한다.
한참을 편하게 쉬던 그녀는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자기 집에서 영어공부를 시켜서 큰 상을 받게 하기도하고 여러 모임에서 조용히 봉사하는 참 유익한 사람이 되어있다.

나는 가끔 내 마음의 창에 먼지가 잔뜩 낀 듯 갑갑하고 숨이 막히면 그 친구 집에 갈 보따리를 싼다. 크게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마음을 서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참 편안하다.
느릿느릿한 말투와 편한 표정으로 그녀는 내 가방에 봄 내내 캔 약초와 시골 농산물을 가득 채워주며 “이거 짜장면 값이데야.” 하고 씩 웃는다.

뭐든 느린 친구 덕에 학교 앞 식당에서 50원쯤 하던 불어터진 짜장면 값을 성질 급한 내가 꽤 많이 계산했다고 언젠가 다그쳤더니 뭐든 주면서 짜장면 값이라고 “인자 다 갚았제. 인자 빚 없데이.” 하면서 실어준다.
친구와 청소년기를 같이 지내고 청년기와 중년기를 지나 노년기를 같이하고있는 우리 둘은 지금에야 비로소 ‘우정’ 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다. 그냥 친구의 존재를 가만히 바라봐주고 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어려움이 있을 때 마음을 같이 해주는 것, 그리고 그 삶과 인생을 귀하게 여기고 존경해주는 것 그런게 사랑이고 우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은빛머리를 가진 멋지게 살아가는 친구가 있다는 건 나에게 큰 자랑이기도 하고 든든한 마음의 지원군이기도 하여 그 친구는 나에게 ‘마음의 고향’ 이라고 감히 부르고 싶다.
생에 있어서 ‘마음의 고향’ 이 될 사람 3명만 있으면 인생이 결코 외롭지 않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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