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영초교 앞에는 '영문구' 하나만 남았다
상태바
창영초교 앞에는 '영문구' 하나만 남았다
  • 강영희
  • 승인 2017.08.24 0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다리 통신 7] 오래된 마을에 풍경 1


@2016년 3월 전도관마을 풍경


도원역3번출구 앞 도원역 3번 출구로 나오면 눈앞에는 옹벽 위에 작고 낡은 집 몇 채가 하늘을 지붕 삼아 한가롭게 앉아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언덕 위 마을은 그렇게 시골집 같이 평화롭고 눈부셨는데 최근에 현수막이 하나 붙었다. 전도관 구역 시공자 선정 투표가 있었고, ‘이e편한세상(삼호건설)’이 결정, 이에 감사하며 성의껏 짓겠다는 말이었다.

알렌별장이 있었고, 그 자리에 거대한 전도관이 오랫동안 있었던, 그 건물에 고스란히 예수중심교회라는 이름이 한동안 붙어 있다가 사라졌다. 2012년 즈음엔 그 건물 입구에 배다리 개코막걸리 아저씨의 젊은 시절 모습이 그려지고, ‘우각로 문화마을’이라는 프로젝트로 예술인들과 전도관 주변 주민들이 어울려 잠시나마 어떤 꿈을 꾸어봤던 곳이다.


하지만 이미 십 수 년 전 재개발 예정으로 많은 주민들이 떠나고 투기꾼들이나 집 한 채 마련해보려고 하는 외지인들에게 대부분 집이 넘어가 빈 집이 많았던 그곳. 동구 창영동과 남구 숭의동이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있던 그곳, 전도관마을에 이제 곧 아파트로 쌓아 올려져 전국 어디나 있는 ‘이e편한세상’이라는 아파트단지가 된다.
 

‘아, 오래된 한 마을이 또 사라지는구나!’ 마음이 스산했다.



@인하자원. 2009년 8월.


도원역을 나와 동인천 방향의 철로변길로 들어서며 그곳의 달라진 풍경을 하나씩 곱씹었다. 주민의 안전을 위해 힘겹게 철판교체 작업을 하고 색을 칠했던 ‘인하자원’은 얼마후 팔아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빌라와 주상복합 건물이 들어섰다.


작은 골목 옛날식 구멍가게 터가 있던 곳에는 어린이집이 생겼고, 많이 애정했던 한평공원 하루터에는 그 빌라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로 몸살을 앓더니 갈아엎어지고, 멋지게 자랐던 벚나무는 옮겨 심어지더니 고스란히 말라죽었다.







@아래사진(2009년 8월)사람들 뒤 작은 벚나무가 위사진(2015년 5월)속 나무처럼 자랐다. 그리고 공원을 조성한답시고 옮겨심고는 그대로 말라죽었다.

                                                                     


황토로 마감을 하고, 넝쿨을 그려올린 오래된 작은 집을 우리는 ‘황토벽집’이라 불렀는데 그 집 어머니는 이제껏 도로와 집 사이 좁은 공간에 갓이며 호박, 들깨, 고추 같은 텃밭농사를 부지런히 짓고 계셔서 이것저것 10여년 전 만들어 놓고, 그려놓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가운데 위로가 되어 주신다.
 

태극기집이라 불렸던 새마을부녀회 회장님 댁에는 솟대를 세워드렸는데 지난 봄 떨어져 없어졌다. 공동텃밭이라 불렸던 곳 주변에 작고 아름다운 이웃집들은 다 헐리고 하나는 작은 2층 빌라로, 하나는 우각로쪽까지 이어지는 고시텔인지 원룸텔인지가 커다랗게 지어져 벌써 몇 해가 지났고, 마지막 한 집이 얼마전 대대적인 수리를 시작했다.

 

그 텃밭 바로 옆에 ‘등교하는 여학생과 고양이’가 그려진 금창석유 벽화가 남아있는데 금창석유는 금창에너지로 이름을 바꿔 붙이셨다. 노랑집 파랑집 앞에 흐드러지던 보라, 하양 라일락이며 앵두나무, 매화나무는 한동안 시련을 격었고, 주변 어르신들이 고추를 말리고, 텃밭을 가꾸던 곳에는 조경사업이 진행되며 꽃나무들이 심어졌다. 꽤 오래 멋지게 자랐던 복숭아나무와 넝쿨장미는 얼마 전 삭뚝 잘려져 버려졌고, ‘기타 치는 이장희’가 그려있던 청암사 할머니댁 벽은 얼마 전 파란색으로 칠해졌다.
 











@공동텃밭_2009년 11월.




우리에게 농사을 알려주셔서 농사샘이라 불리웠던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작은 텃밭을 쉼 없이 작물을 가꾸어 키우시고, 마늘을 까서 팔아 마늘할머니라 불리웠던 어르신은 몇 해 전 딸인지 아들인지가 있는 만수동으로 이사가셨다.
 

반바지 할머니는 돌아가신 지가 이미 오래됐고, 창영어린이공원 옆 간판도 없는 작은 슈퍼(구멍가게)의 바깥 어르신은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시고, 할머님도 따님의 성화에 가게를 접고 집을 고치고 쉬시는데 오늘은 이웃 어르신들과 그네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계셨다.

 

 

@공원슈퍼 _2014년 8월/ 슈퍼앞 2007년 9월




 

공원 옆 휴지도매점 창고가 있던 공간은 목공방으로 쓰이다가 지난해 금속공방을 하는 친구가 인수해 긴 공사를 거쳐 작업공간을 만들었다. 화랑공예사는 여전히 상패를 만들고 있고, 공영주차장 황토부조는 자꾸 부숴지는 통해 싹 치워지고 황토색 페인트가 발라졌지만 창문소년, 바람을 맞는 나무 같은 벽화는 잘 남아있다. 그린기획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번성중이고, 작은 쉼터로 만들었던 공간은 차들 덕에 그 가치를 잃어버렸지만 작게 심은 두 그루 나무는 2층 집을 훨씬 뛰어넘어 자랐다.


9명의 주인이 있던 주차장 앞 가건물에는 문화공방이었고, 작은도서관이었으며, 마을카페 풍경과 악세사리 도매점이 있었는데 그들이 떠나고 세제도매점 창고와 도자기공방, 갤러리가 생겼다. 갤러리도 3년 전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사무실이 들어섰다. 작고 멋진 텃밭이자 정원은 사라졌지만 이사온 분들의 배려로 산머루 나무는 무성히 잘 자라고 있다.
 


 











@문화공방, 퍼포먼스 반지하, 마을카페 풍경이 있던 풍경 _2009년 8월   


@공영주차장 앞 창영초 입구에 문화공방은 떠나고 좌측부터 마을사진관 다행, 세제도매점, 도자기 작업실, 띠갤러리가 있었다. @2014년 3월


창영상사 였다가 문화공방 창고로 쓰였던 자리는 지역공동체창작공방으로 여럿이 사진, 뜨개, 금속, 목공, 개인작업실 등으로 쓰이다가 사진관과 골목 입구 갤러리로 쓰였고, 갤러리가 신포동으로 자리를 옮긴 후 카페겸 갤러리가 들어서서 차 소리 외엔 이렇다할 소리가 없던 길가에 여느 시내의 카페처럼 이런저런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
 

이모네주먹밥은 주인이 세 번 바뀐 후 건물이 팔리면서 떡볶기집이 있었고, 선물가게가 있었고, 사각공간이라는 책방이 있었으며, 재활용아트를 하는 이와 사진을 하던 이의 공동작업실이였던 자리에 정화조 공사를 하고 다시 가게를 열어 성업중이다.


이모네 주먹밥이 있던 그 건물은 용현동에서 도자기공방을 하던 친구가 열심히 다듬어고쳐서 흙길이라는 공방을 열고 희귀한 다육이와 선인장을 함께 팔며 지내고 있다. 그 옆 남양유업 건물은 창고로 쓰이다가 도깨비완구점 주인이 얼마 전 구입을 했는데 무허가에 오래된 건물의 붕괴 위험으로 골치를 썩고 있다.
 

 



@공영주차장은 종종 주민들을 위한 공방이 되기도 하고 (2008년 9월), 영화관이 되기도 했다.(2009년 8월)



강화쌀집은 담배와 쌀을 팔았는데 청소년들이 하도 많이 사가는 통에 결국 담배를 팔지 않게 됐고, 지병을 앓으시던 할아버지가 넘어지셔서 운신을 못하다가 늦은 봄 돌아가셨다. 복술가집이 있는 골목안 터프할머니라 불렸던 할머님이 지난 겨울 갑작스런 뇌출혈로 따님 댁으로 가셨고, 그 집엔 멋쟁이 할머니가 이사를 오셨는데 어울리기가 좀 어렵다.


노인정이자 무더위쉼터는 탐이라는 디지털 체험관이 되었고, 창영초교 앞 오래된 집과 이명자어머니 떡볶기 가게가 있던 자리, 큰문구가 있던 집을 인근 부동산들이 몽땅 사들여 다 부쉈고, 그 자리에 빌라를 짓는다고 한다. 빌라가 들어서면 한 동네가 모두 빌라촌이되는 걸 경험한 적이 있는 나는 지레 좀 짜증이 났다. 빌라촌이 된 배다리는 어떤 의미로 남게 될까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창영초교 앞에는 이제 '영문구' 하나만 남았다.



창영초교 앞 영문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