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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현정
  • 승인 2017.09.1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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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장현정 / 공감미술치료센터 상담팀장
 
 
 지난 1년 동안 매진했던 박사학위 논문을 마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집 정리였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때마침 요즘 한창 ‘미니멀리즘’이 널리 알려지고 있었고 관련 가구나 제품들도 유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 또한 미니멀한 집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취미생활이 아주 다양한 편이었다. 때문에 각 취미에 필요한 물건을 꽤 많이 보유하고 있는 유명한 수집광이었다. 전 세트를 사는 것을 즐겼고 같은 물건도 마음에 들면 여러 개를 샀다. ‘소유하다’라는 것이 나에게는 무척이나 중요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더라도 소유하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느꼈다. 언젠가 쓸 수도 있는 물건들을 갖고 있다가 몇 년 동안 묵혀 두는 경우도 많았다.
 
미니멀라이프에 대한 책 두 권을 읽고 물건 정리를 시작했다. 가장 먼저 정리를 시작한 곳은 빠르게 마무리 할 수 있는 화장대였다. 화장품을 적게 사용하려고 애쓰는 편이었고 자주 사용하는 화장품이 스킨, 로션, BB크림, 파우더 딱 네 가지였기 때문에 정리가 가장 빨랐다. 모든 물건들이 수납장으로 들어가고 아무것도 올라와 있지 않은 말끔한 화장대를 보았을 때 느껴지는 짜릿한 희열을 통해 이후 다른 곳도 정리할 힘을 얻게 되었다.
 
그다음 옷 정리를 시작했다. 옷은 매 철마다 정리를 하는데도 늘 많았다. 저렴하고 싸서 사 모으던 옷들, 예쁘게 입던 옷이라 차마 정리하지 못했던 옷들이 가득했다. 정리를 하다 보니 대학시절 입던 옷들까지도 발견되었는데 그 옷을 보며 나의 소유가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옷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 기쁨과 만족을 준다면 적어도 소유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물건이 남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입지 못하는 옷들이 커다란 세 개의 가방을 꽉 채우고 나서 잠시 옷정리를 중단했다. 여름을 보내고 다시 한 번 정리를 하리라 마음먹었다.
 
옷장 옆에는 이불장이 있다. 이불장에는 평소 쓰지 않는 손님용 이불이 절반이 넘는다. 남편이 총각시절 쓰던 구멍 난 이불도 아직 보관되어 있었다. 이불장의 절반을 걷어내자 커다란 수납공간이 생겨났다. 그 수납공간에는 혹시 둘째 아이가 생기면 쓸지도 모르는 아이 옷들과 장난감들을 박스에 담아 넣었다. 만일 쓰지 않게 되더라도 통째로 누군가에게 줄 수 있도록 소중히 잘 담아두었다.
 
주방에 가자 또 수많은 물건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살이 되어 더 이상 이유식 물품이 필요 없음에도 주방 수납장에 아직 가득한 이유식 용기들이 눈에 띄어 모두 정리해 주변에 아이를 낳은 엄마에게 선물했다. 조리도구들과 냄비들, 그릇들을 절반만 남기고 모두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안 쓰는 식품건조기와 침구청소기를 벼룩시장에 내다 팔았다. 하지만 냉장고는 아직 손을 대지 못했다. 냉장고에 켜켜이 쌓아둔 음식들을 비워야 정리를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냉장고 파먹기’를 계속할 예정이다.
 
남은 곳은 두 곳, 아들의 장난감으로 가득한 아기방과 논문을 쓰는 동안 자료가 널부러져 있었던 책방이었다. 많은 물건이 좁은 공간에 빼곡하게 쌓여있었기 때문에 창고가 되어버린 두 곳이었다. 일단 거실에서 모든 생활을 하고 있는 아들에게 자기만의 방을 만들어 주고 싶었으므로 아들방 정리를 시작했다. 큰 장난감 몇 개를 비우자 아들에게 방이 생겼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멀끔한 방이 생겼다. 아들은 신이 나서 방을 들락날락 거리며 새로운 탐험을 시작했다.
 
책방은 책을 비워야 자리가 나는 곳이었다. 대학 때 읽던 전공서적들을 먼저 비워내고 책을 몇권 추려내었지만 아직도 갈길이 멀었다. 나는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매일 조금씩 조금씩 비워내며 좀 더 나에게 맞는 편안하고 정돈된 공간으로 만들어내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물건을 비워내자 물건이 보였다. 아끼던 물건이었지만 다른 많은 물건들 속에 있어 눈에 띄지 않던 보물들을 다시 찾아 가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손수 골라와 기분 좋게 입다가 한철 입고 다음해 잊어버렸던 옷을 찾았다. ‘이 옷이 여기 있었구나!’ 반가워서 다시 입었더니 여전히 나에게 잘 어울렸다.
 
일을 할 때도 그러했다. 프리랜서라는 직업의 특징상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을 하며 아들도 돌봐야 하니 더욱 정신이 없었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일에 파묻혀 지냈다. 집도 생활도 일도 모두 종종 정리하며 비우며 가볍게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 삶의 가치와 나 자신의 가치, 내가 하는 일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물건을 비우고 나니 비로소 물건들의 가치가 다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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