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괭이부리마을', 삶의 고단함은 쌓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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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괭이부리마을', 삶의 고단함은 쌓이고…
  • 김주희
  • 승인 2010.10.1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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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인천新택리지] ⑭ 동구 만석동



취재: 김주희 기자

시간이 멈춘 듯했다.

바깥세상은 매일 모습을 바꾸고 있는데,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골목은 먼지 낀 고장 난 시계처럼 움직임이 없었다

인천시 동구 만석동(萬石洞). 마을 이름으로만 따지면 쌀을 만석이나 내는 부자동네로 여길 수 있겠다. 하지만 만석동은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의 고단한 삶이 켜켜이 쌓인, 인천에 몇 남지 않은 '달동네'다.


만석동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한 때는 1903년이다. 인천부에 부내면이 신설되면서 고잔리를 만석동으로, 화촌동을 평리로 구분했다는 기록이다.

삼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쌓아둔 곳이었다는 데서 만석동이란 지명이 왔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세곡선은 강화수로를 거쳐야 한양으로 갈 수 있었는데, 강화수로의 손돌목이 물살이 거세 지날 수 없어 인천에서 육로로 세곡을 운반해야만 했다.

현재 서구 원창동 인근에 큰 창고가 있어 세곡을 쌓아두었다는 기록이 각종 옛 문헌에 남아 있어 이를 증명한다.  만석동 역시 세곡을 쌓아두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만석동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괭이부리'(墓島)와 다소면의 '수유리' 일부를 합쳐서 왜식으로 만석정(萬石町)이라 했다. 해방 후 1946년 동명 개정에 따라 다시 만석동이 됐다.

괭이부리는 마을 서쪽에 있는 섬의 산부리가 고양이(괭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돌무더기의 작은 섬 괭이부리는 물이 빠지면 육지와 연결됐다고 한다. 그리고 이 괭이부리에서 현 화수동의 수문통을 거쳐 송림초등학교 앞까지 큰 갯골이 나 있었고, 그 갯골을 따라 밀물 때면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어찌됐든 조선인 20~30명이 살던 척박한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 괭이부리가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된 것은 개항의 여파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제물포항이 개항하고, 현 자유공원 일대에 각국 조계지가 설치됐다. 러일전쟁 이후 급격히 늘어난 일본인들은 조계지에 가까운, 조선인 거주 지역이었던 만석동의 땅을 많이 갖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거류지역을 넓히기 위해서 바다를 메웠다.

1096년 현 북성포구와 만석동 사이의 바다가 없어졌고, 괭이부리도 육지로 됐고 조선인 마을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일본인 소유의 정미소와 간장공장 등이 들어섰다.


동일방직

이후 1931년부터 1945년 사이 만석동과 화수동, 송림동 지역에서 대단위 간척사업이 벌어졌다.

1982년2월25일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인천을 연고로 한, 우리나라 첫 홈런왕 박현식이 감독을 맡고 인천고와 동산고 출신선수들로 구성된 프로야구팀이 출범했다.

한국프로야구팀 중 5번째인 이 야구단은 '삼미 슈퍼스타즈'다. 프로야구 원년 15승(85패, 승률 0.188)의 초라한 성적을 거둔 '역전패의 명수'로 기억되는 인천 프로야구의 출발점이다.
 
1985년 6월21일 롯데전을 마지막으로, 그해 7월1일 청보 핀토스로 이름을 바꾸기까지 3년5개월간 120승 211패를 기록한 삼미 슈퍼스타즈의 모기업인 삼미그룹이 만석동에서 사업을 일구었다.

삼미 슈퍼스타즈는 청보 핀토스로 다시 태평양 돌핀스로 이어졌다. 바통을 이은 현대 유니콘스가 연고지를 서울로 바뀐 뒤 2000년 창단한 SK 와이번스가 인천 연고팀이 됐다.

소설 속 대동방적으로 묘사된 동양방적은 실제로 일제 하 노동운동, 특히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던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이 활발했던 곳이었다.

해방 후 동양방적은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선구자 고 서정익씨가 인수해 동일방직으로 재탄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 선비가 공장밖 조직원들과 밀서는 주고받았던 높고 긴 붉은색 담벼락도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하다.

1970년대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여서, '알몸시위'와 '똥물사건'으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동양방적은 군수공장이었다.

이 공장에 이어 들어선 조선목재(대성목재의 전신)나 조선기계제작소(대우중공업의 전신으로 현 두산인프라코어), 조선이연금속(인천제철의 전신으로 현 현대제철) 등 대규모 공장 역시 전쟁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곳이었다. 이들 회사는 해방 이후 민간인들이 인수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만석부두에서 영흥도 인근에서 캐온 굴을 어민들이 차량으로 옮기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공업지대에 지금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전쟁을 피해온 사람들이 공장 담벼락을 벽 삼아 얼기설기 판자를 엮고 기름종이를 입힌 루핑으로 지붕을 올려 손바닥만한 집을 지어 살았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나 돈을 벌기 위해서 도시로 온, 농사밖에 모르던 이들이 이웃으로 됐다. 만석동 사람들은 만석부두에서 '구루마꾼'으로, 공장 노동자로 고단한 삶을 시작했다.

공중화장실 앞에서 길게 늘어서 차례를 기다리며 인내심을 키워야 했고, 땔감이 없어 대성목재에서 주어온 나무껍질을 말려 쓰거나 내다 팔았다. 북성포구나 만석부두에서 가져온 굴을 까거나 생선을 말려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똥마당'이라 부른 만석동 앞 바다에서 망둥이를 잡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바다위에 띄운 아름드리 원목위에서 놀거나 작업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는 사고로 가족을 잃는 일도 빈번했다. 1977년 5월에는 마을에 큰 불이나 쪽방에 살던 23가구, 79명이 집을 잃기도 했다.

이런 그들의 삶은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작가 김중미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기차길옆 작은학교'. 1987년 8평 남짓한 공간에 연 기차길옆 아가방이 공부방으로, 다시 작은학교가 됐다.

이모와 삼촌이 아이들과 함께 유랑 인형극단 '칙칙폭폭'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공연도 한다.

동화 속 주인공 아이들도 어느덧 컸고,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 마을도 일부 변했다.

하지만 만석부두 앞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는 골목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여전하다.

수십  년을 굴을 까서 생계를 유지하는 80대 노인이 여전히 살고 있고, 한 달 10만 원 벌이 쇼핑백 만드는 일도 언제 끊어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이웃이 여전하다.

이런 그들에게 주거환경개선사업이다, 해양파크 조성이다 하는 말은 연탄 한 장만도 못할 듯싶다.

대낮임에도 컴컴한 좁다란,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골목길 안은 고단한 삶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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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지킴이 2010-10-08 08:31:23
사람냄새 나는 동네에 웬지 사람이 없어 휑한 것 같아 쓸쓸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기사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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