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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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 장현정
  • 승인 2018.06.08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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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포기와 이해 사이 - 장현정 / 공감미술치료센터 상담팀장
 
  
일을 마무리 하고 퇴근하지 못했던 날 저녁, 나는 일을 하기 위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궜다. 거실에서 아빠에게 “엄마 어딨어?”라고 묻는 아들이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엄마를 찾으며 문을 두드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작업을 계속 하고 있는데, 잠을 자기 위해 아이가 방에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참으로 묘한 기분이었다. 물론, 아이가 나를 찾지 않아서 편안히 작업을 마무리 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이 상황을 이해했기 때문에 저렇게 조용히 방에 들어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태어난 지 4년이 조금 넘은 나의 아이는,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포기한 것일까?
 
어렸을 때 엄마를 생각하면 엄마는 늘 바빴다. 갑자기 비가 올 때면 많은 부모님들이 우산을 들고 교문 앞에 서 있었는데 엄마는 그랬던 적이 없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엄마의 교육 철학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내심 엄마와 함께 우산을 쓰고 집에 가는 친구들이 부러웠지만, 엄마에게 우산을 가져다 달라고 전화를 하거나 가져와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포기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민감하고 좌절을 잘 견디지 못한다. 특히 미취학 아이들은 더더욱 그렇다.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가 부모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어떤 욕구는 지지받지 못하고 좌절되는지를 경험하며 사회화 된다. 그런데 아이들의 욕구 중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욕구들은 제한되어야 마땅하지만, 대부분의 욕구는 존중 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가 사람으로서 당연한 것, 표현하고 요청해도 되는 것인지를 깨닫고, 자신의 욕구를 이해하며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아이들의 자존감이란 이러한 욕구의 충족을 바탕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한, 욕구가 충족될 때 우리는 만족감이나 기쁨, 즐거움, 성취감, 행복 등의 감정을 느끼며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게 된다.
 
욕구는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want'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좋아하는 물건을 소유하고 싶고 원하는 것을 먹고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랑받고 관계 맺고 싶다가도 자유롭고 싶고 혼자 있고 싶다. 이 모든 것은 욕구다. 안전하고 싶고 존경 받고 싶고 성장하고 발전하며 자기를 실현하고 싶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이러한 기본 욕구를 갖고 살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아직 이 세상을 경험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욕구를 세련되게 포장하거나 상황에 맞게 지연시키거나 보류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떼를 쓰고 억지를 부리고 짜증을 내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이 부모의 반응이다. 표현 자체를 막거나 그 욕구가 없는 것처럼 반응하도록 하는 것은 아이가 자신의 욕구에 둔감하도록 만든다. 아이들은 표현해도 수용되지 않고 반응이 오지 않는 일에 대해 포기하고 표현하지 않게 된다. 마치 그런 욕구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어린 시절의 나는, 누구보다 엄마의 손길과 사랑이 필요했다. 나는 속으론 주목받고 싶었지만 겉으론 조용하고 주눅 들어 있던 작은 아이였다. 당시 잘 사는 동네로 으름난 아파트에 살았던 이유로 내세울 것 없는 내 자신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반면에 청년기의 나는 내 마음대로 인생을 살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자유를 갈망할 때 엄마는 오히려 너는 세상을 모르고 이치를 모른다며 대신 선택하고 결정하고 마음대로 방향을 결정했다. 많은 부모자녀 관계가 나의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정작 사랑과 관심을 원할 때는 이를 주지 않다가 자유를 원할 때는 이 또한 수용 받을 수 없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
 
내 어린 아들은 돌 무렵, 한 달을 울며 적응을 하고 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기관 생활을 아주 잘 해내고 있다. 안가면 안되는지 묻거나 안가겠다고 떼를 쓰고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종종 “엄마가 오늘은 일찍 왔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한 적은 있다. 아이는 알았던 것 같다. 자신이 안가겠다고 해도 엄마는 기관에 보낼 것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자신이 이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이는 이해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했을 것이다.
 
다만, 내 마음이 저릿한 것은 아이가 기관이든 어디에서든 부당한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야기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엄마가 자신을 지켜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되면 아이는 입을 닫아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대구에서 학교폭력을 당하던 한 중학생이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 사건, 아이 엄마의 인터뷰를 보면서 하염없이 울었던 적이 있다. 아이가 그런 일을 겪었는지 몰랐다는 엄마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사무치게 기억에 남았다. 나는 아이를 따라다니며 계속 내 품에서 보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벌써 하루 8시간의 기관생활을 감당할 수 있는 유치원생으로 훌쩍 자랐다. 내가 바라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고 표현하고 요청했을 때 그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 엄마로서 아이 옆에 있어 주는 것이다. 아이의 도움 요청을 간과하지 않는, 아이의 욕구를 수용할 줄 아는 엄마로서 있어 주는 것이다.
 
아이가 나에게도 자신에게도 솔직한 사람으로 크기를 바란다. 아이가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림출처 : https://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13620263&memberNo=7102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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