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인민군과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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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여름, 인민군과 청년들
  • 윤희자
  • 승인 2018.06.18 0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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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윤희자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글쓰기' 회원



2018년 4월 27일, 남한의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 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렸다. 검은 국민복을 입은 김정은이 마침내 판문점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뉴스 시간에 자주 본 그 모습과 다르지 않다. 꼼짝 않고 그 회담을 지켜보노라니 먼 기억이 자꾸 떠오른다. 마치 스냅사진처럼 떠오르는 일곱 살, 내 유년의 기억들은 단편적이다.

첫 번째 기억,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 집 마당에서 아저씨들이 모여 상여 틀을 꾸미고 아주머니들은 부엌과 안 뜰에서 음식 준비로 부산했다. 그때 저만치 보이는 오두돈대 쪽 성 뚝 길로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봇물 터진 듯 내려왔다. 평소 새우그물을 보러 방성여 쪽으로 나가는 고씨 아저씨 말고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던 좁은 길이 마치 하얀 띠를 펼친 듯 했다. 일곱 살 인생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보따리를 이고 진 사람들은 하루 종일 우리 마을을 지나 인천으로 가는 초지 쪽으로 내려가고 또 내려갔다. 동네 애, 어른이 모두 길로 나가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입을 꾹 다물고 묵묵히 걸었다. 어른들 하시는 말씀은 그들이 황해도 사람들로 난리가 나서 피난을 간다는 것이었다. ‘난리’, ‘피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말들이었다. 우리 또래들은 그 말이 신기해서 “난리가 났다, 난리가 났다” 노래를 부르듯 소리치며 동네 공터에서 이리저리 강아지처럼 뛰어다녔다. 할머니 장례는 어떻게 치렀는지 그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두 번 째 기억엔 마당에 낯선 달구지 두 대가 서 있다. 베잠방이를 걸친 낯선 아저씨들이 엄지발가락만 뭉툭 나온 일본식 버선 ‘지까다비’를 신은 채 우리 집 안방과 건넌방에서 장롱 문을 열고 옷이란 옷을 모두 꺼내 달구지에 실었다. 마당 끝 답싸리 옆에 꼼짝 않고 서계신 어머니 곁에 셋째 오빠와 넷째 오빠 그리고 나와 막내 옥이가 어머니 치마폭을 잡고 서있었다. 어머니가 조용히 나에게 일렀다. “옥이랑 집에 들어가 아저씨들에게 옷 한 벌씩만 달라고 하여라.” 그들 앞에 서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는 죄인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 채 간신히 모기 소리보다 적게 “옷 한 벌씩만 주시교….” 웅얼거리듯 말했다. 그러자 그들은 휙휙 옷 한 벌씩을 던져 주었다.

일곱 가구가 친척처럼 사는 터진개 마을에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아이들 몇 명이 기웃거릴 뿐 어른들 모습은 한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불과 가재도구까지 모두 싣고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든 그들은 면사무소가 있는 안골 언덕을 넘어갔다. 나는 ‘아버지와 큰 오빠가 계시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텐데 왜 안 계실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나이 차가 스무 살이 넘는 큰오빠, 둘째오빠, 언니와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보이지 않았다. 어린 우리들 모르게 피난을 가셨던 것이다. 국민학교 다니는 작은 오빠들과 아직 입학 전인 나, 그리고 세 살 아래 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집에 남아 있었다.

세 번째 기억은 “탕탕탕” 대문 두드리는 소리이다. 인민군은 한밤중이면 우리 집 대문을 두드렸다. 어머니와 오빠들과 동생 나 이렇게 다섯 식구는 안방 건넌방 사랑방을 다 비워두고 뒤뜰 방공호에 가마니를 깔고 잠을 잤다.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방공호를 나오면 절대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고 대문을 열어주러 나가셨다. 한참 후 어머니는 조용히 방공호로 돌아오셨다.

그들은 아버지와 오빠들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 자백하라고 매일 밤 어머니를 권총으로 위협하였다. 어머니는 차가운 총구가 목에 닿으면 ‘오늘은 죽는구나, 오늘은 정말 죽는구나’ 매일 죽음의 문턱에서 떨었다. 어머니는 자신의 무참한 그 모습이 어린 자식들 눈에 띄면 철없는 어린것들이 그들에게 살려달라고 달려들까 봐 방공호를 절대 나오지 말라고 이르신 것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지키려 작은 체구로 두려움 없이 죽음과 맞섰던 어머니가 옆집 정옥 아줌마와 때때로 육이오 이야기를 나누실 때 그 끔찍한 일을 나는 상세히 알게 되었다. 그러면 단편적으로 떠오르던 기억이 퍼즐처럼 맞춰졌다. 키 150cm, 평생 몸무게 50kg에도 못 미치는 풀잎 같은 여인, 어머니가 차돌처럼 당차고 지혜롭지 못했다면 우리 집은 바람에 날리는 보리 겨와 다르지 않았으리라.

인민군이 떠난 후인 네 번째 기억엔 마을 창고 앞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 있다. 창고 안엔 낯선 청년들이 솜틀집 아주머니를 빨갱이 앞잡이라며 몽둥이로 마구 때렸다. 아주머니는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청년들은 때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을에서 착하기로 소문난 그 여자는 너무 착해 조금은 모자란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었다. 인민군들이 여성연맹 위원을 뽑을 때 똑똑한 여자들이 이 핑계 저 핑계로 손은 저으며 어리숙한 솜틀집 아주머니를 그 자리에 앉힌 것이다. 마을 어른들이 일제히 이런 말을 하자 청년들은 곧 아주머니를 풀어주었다. 그분은 “안 한다고 했잖아요, 괜찮다고 등 떠밀었잖아요” 하며 큰 소리로 울었다. 낯선 청년들은 한동안 삼삼오오 떼를 지어 몽둥이를 들고 동네를 휘젓고 다녔다. 인민군은 물러갔지만 어수선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광성 쪽 성 뚝 길에 피난 갔던 사람들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한 마지막 기억엔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 길인지 발을 절룩거리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은 걷는 모습이며 행색이 거지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머니는 아카시아 나무 사이로 피난민이 보이면 나와 동생을 성 뚝 어귀로 보내어 피난에서 돌아오는 사람들을 모시고 오라 이르셨다. 그녀는 서둘러 보리밥을 지어 고봉으로 담고 김치와 고추장뿐인 밥상을 대접했다. 배고픈 그들이 허겁지겁 밥술을 뜨면 따뜻한 숭늉을 먼저 마시게 한 후 천천히 드시라고 자분자분 이르셨다.
보리쌀이 부족하여 우리도 배를 곯는 시절이었다. 왜 사람들에게 날마다 밥을 주는지 우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야 피난 간 아버지와 언니 오빠가 살아서 돌아온단다” 그땐 어머니의 말씀을 못 알아들었다. 단지 내 배고픈 것만 불만이었다.

어머니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음인지 어머니께서 애 닳아 기다리던 오빠들과 언니는 머리카락 한 올 다치지 않고 아랫녁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마봉재 기슭 공동묘지에 모신 할머니 묘지 근처에 구덩이를 파고 숨어계시던 아버지도 진즉 돌아오셨고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우리 집은 경찰 가족도 아니고 공무원 가족도 지주도 아닌데 반동분자의 명단에 올랐다고 한다. 오빠 두 분과 언니가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는 것이 이유였다.
보잘 것 없는 살림살이마저 좇겨가는 인민군들에게 모두 빼앗겨 집안은 텅 비었다. 가을이 가까워지자 밤이면 이불이 없어 춥다춥다 하며 새우잠을 잤다. 하지만 식구들이 무사하니 성주님께 고사라도 지내자며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은 날마다 밝으셨다.

언니 오빠들 학비와 하숙비 때문에 아버지는 짐배에 새우젓을 싣고 마포로 해주, 연백으로 장사를 다니셨고, 읍내 기생들 한복을 만드셨던 어머니는 늘 밤늦도록 재봉틀을 돌리셔야 했다. 깨어있는 부모님은 머리 좋은 자식들을 어려운 형편에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셨다. 때문에 논 한 평도 없는 우리 집은 가을이면 빈 마당이었다. 이웃집들은 숫자가 많건 적건 벼 낟가리가 쌓였다. 마당에 들어찬 낟가리가 지붕에 닿을 듯 높은 함석집이 부러웠다.

그러해도 우리 조무래기들은 바다를 지키는 인민군 보초들 때문에 여름내 수영 한번 못했던 염하로 새우잡이 들망을 들고 뛰어들었다. 방게와 농바리를 잡는다고 갯망둥어를 잡아보겠다고 갯가를 뛰는 아이들 소리로 터진개 마을이 다시 시끄럽기 시작했다.

 
* 주시교 - 주세요의 강화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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