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의 속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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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삶의 속삭임”
  • 한인경
  • 승인 2018.06.20 0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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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다시 주목하는 영화 『청원』


<한인경의 시네공간>은 2016년에는 그해 상영된 독립영화들을, 2017년부터는 ‘다시 주목하는 영화’라는 테마로 평론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 너머로 발견하는 한 권의 철학서와 같다. 우리는 그 속에서 힐링하고 비상하며 철학적 사유로 삶의 의미를 읽는다.

 

『청원』

개  봉 : 2011. 11.개봉, 2017.03, 2017.11 재개봉(126분/인도)
감  독 : 산제이 릴라반살리
출  연 : 리틱 로샨, 아이쉬와라 라이
장  르 : 드라마                                                 
등  급 : 12세 관람가




출처:영화『청원』

 

간략한 줄거리부터

세계적인 천재 마술사 이튼은 마술쇼 중 동료 마술사의 배신으로 머리 아래가 모두 마비되는 중상을 입게 된다. 그런 그를 12년간 헌신적 간호를 하는 소피아, 이튼이 선택한 행복한 마무리를 위한 안락사 청원, 애틋한 사랑, 용서를 둘러싼 이야기다.

이 영화는 영상미 그리고 사지 마비 환자의 안락사 청원이라는 감상 포인트를 가진 영화다. 나아가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까지 확장해 본다.



1. 영상미, 인도와 유럽의 공간적 공유


안락사 청원을 다룬 영화이지만 의학적, 법률적 드라마로 기울지 않았다.
배경이 되는 인도 남서부 고아Goa지역은 포르투갈 지배를 받던 곳이어서 그 영향이 남아있다. 당사자 이튼의 종교가 가톨릭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도는 대다수가 힌두교를 종교로 가진 다신교의 나라다. 업과 윤회를 믿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가를 상대로 한 안락사 청원은 전 국민의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첫 장면부터 환자를 돌보는 장면이 보인다. 창백한 환자의 모습이 예상되었으나 의외로 무척 정돈되고 일사분란하게 돌아간다. 대사 없이 'Smile'이라는 곡이 흐르면서 정갈하면서도 눈부신 자태를 갖춘 소피아의 능숙하면서도 차분한 동작들, 그리고 공간이 풍기는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색감, 소피아의 화려한 의상, 장신구까지 관객들은 환자를 보기도 전에 이미 감독이 연출한 미장센에 압도된다. 소피아와 고아Goa 지역의 문화, 그리고 공간을 장식한 소품, 가구 등은 한 공간에서 인도와 유럽 문화가 조화롭게 섞인 모습이었다.


안락사 즉, 죽음을 말하는 주제였다. 안락사라는 의미가 갖는 무게감, 상실감을 사랑과 용서의 드라마로 풀어간다. 감독은 플래쉬 백으로 이튼 마술의 하이라이트를 몽환적인 연출로 보여주며, 귀에 익은 팝송들, 인도 고아Goa 지역의 순수함, 인도라기보다는 유럽 어느 영주의 성을 연상시키는 이튼의 저택 등 할리우드 영화를 연상시키는 볼거리와 영화적 장치를 통해 중압감이 느껴지는 주제를 상쇄시켜 나간다.
두 주인공의 외모가 뛰어난 점도 빼놓을 수 없지만, 특히 미스 월드 출신 소피아의 미모는 이 영화를 말할 때 빠질 수 없을 것 같다. 영화 전반에 걸쳐 감독은 마치 정지된 운동, 죽음과 대비시키듯 간호하는 소피아의 모습에서 생명의 에너지가 느껴지도록 연출하였다.



출처:영화『청원』

 

2. 사지 마비 환자의 안락사 청원


머리 아래로는 모두 마비가 된 몸이다.
새벽, 폭풍우로 지붕에서 물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그런데 그 방울이 이튼의 이마에  마치 정조준한 것처럼 똑똑 떨어지는 것이다. 커다란 스크린에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무게는 이튼의 이마에 구멍이라도 낼 듯한 기세다. 이튼은 소리 질러 도움을 구하지만 잠에 떨어진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오전에 출근한 소피아는 물에 펑 젖은 침대 시트와 이튼, 파리하게 지쳐있는 이튼을 발견한다. 이마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을 피할 수 없어 밤새 속수무책으로 그 위치에서, 그 자세로 맞았던 것이다.


안락사 청원에 대한 소송. 첫 재판에서 헌법 21조를 위배하는 것이라는 판사, 기본적 생존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생명을 포기할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변호사, 자살 조장 외에는 이점이 없다는 검사, 그리곤 기각.

이튼은 라디오 유명 DJ, 저술 활동 등 세상이 다 아는 성공한 인물로, 어려움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왔다. 그런 그가 정작 자기는 죽겠다고 하니 시민들에겐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변호사는 항소를 위해 여론을 움직이고자 ‘안락사 프로젝트’라는 방송을 하며 청취자들에게 찬반 투표를 하게 한다. 이튼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알며 서로 사랑을 확인한 여인 소피아도 있다. 이튼은 사랑하는 여인까지 얻은 지금 이 행복을 더더욱 간직하고 싶다. 그가 원하는 삶의 마무리를 하고 싶은 것.




출처:영화『청원』



항소심. 또 기각.
원고의 고통과 청원의 타당성은 인정하나 누군가의 목숨을 끊는 일에 법정이 관여할 수 없다는 판결문. 그는 원치 않는 삶을 이어가야 하며 끝이 보이질 않는다는 아나운서, 이튼이 고개를 떨군 채 기계에 칭칭 묶여 직립으로 있는 장면이 이어진다.
곧 어느 심해로 가라앉을 것만 같은 이튼의 절망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세계적인 호스피스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그의 저서 ‘인생 수업’에서 받아들임과 포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철학적 경계를 세웠다.


“받아들임은 선택이며, 결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포기란 우리가 가진 생명력을 부인하는 것이고, 받아들임은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다. 질병에 희생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상황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은 포기이며, 그쪽으로 몸을 돌리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룻밤 이튼은 소피아에게 청혼을 했고 소피아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소피아는 이튼의 안락사를 자신이 돕겠다고 말한다. 이튼은 사지 마비 환자로서 무기력한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그 삶을 포기하려는 것이 아니며 현재의 모습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 것이다. 소피아는 자신의 행복은 그가 행복한 것이라며 이튼의 선택에 전폭 지지를 보낸다.


 


출처:영화『청원』



3. 삶의 이해


"안락사(조력자살)를 결심하고 스위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호주 최고령 과학자 데이비드 구달(104세) 박사가 10일(현지 시각) 오후 평화롭게 생을 마쳤다. 저명한 생태학자인 구달 박사는 안락사를 금지하는 호주의 법을 피해 이달 2일 스위스로 출발했다. 스위스는 조력자살을 허용하는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다. 그는 9일 스위스에 도착하기 전 프랑스에 들러 가족을 만나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서울신문, 2018.5.11)

구달 박사의 경우는 더 이상의 회생이 어려운 불치병 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령으로 인한 무의미한 삶을 스스로 마감하는 길을 택한 사례가 된다.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
 

이튼이 간절히 안락사를 원했지만, 국가는 허락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랜 기간 국회 진통을 거친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하 연명의료결정법)』이 통과돼서 시행에 들어갔다.
 

물론 구달 박사가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삶을 마감한 최초의 외국인은 아니었지만, 『연명의료결정법』이 금년 2월 4일부터 법 시행에 들어갔다는 시점과 맞물려 잔잔한 파문을 일게 한다. ‘안락사’는 고령에 따른 사회 문화의 변화와 함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이튼과 구달박사가 선택한 ‘안락사’, 상세한 설명은 논외로 하고 ‘존엄사’와 구분 지어본다. ‘안락사’는 환자의 회생 여부와 상관없이 환자의 요청으로 약물 주입이 이루어지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경우이며, ‘존엄사’는 회생할 수 없고 사망이 임박한 상태에 있다고 의학적 판단이 내려진 환자를 대상으로 인간으로서 가능한 존엄과 품위를 유지하면서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장례문화가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고 있듯이 이 법은 임종 문화 전반에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는 초석이 될 것으로 믿는다. 현재 시행과정에서 마찰과 혼선, 부작용이 빚어지고는 있지만, 지속적인 법의 보완, 발전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짧게 덧붙인다. 19세 이상 성인이라면 전문가 상담을 통해 작성할 수 있으며,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항암제 투여, 혈액 투석을 하지 않겠다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여 등록한 사람이 2018년 4월 현재 12,000명이 훌쩍 넘었다.


 


출처:영화『청원』



이튼처럼 적극적인 안락사로 삶의 마무리를 짓고자 하는 경우와는 반대로 뜻밖의 상황 전개로 충격적인 죽음을 말하는 영화 두 편을 소개한다. 두 영화 모두 노노개호老老介護 즉 노인이 노인을 돌보게 되는, 고령사회로 들어서면서 그리 낯설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 영화다.


『아무르Amour』(2012), 프랑스
한국에서도 꽤 알려진 영화다.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는 80대 부부. 부인에게 닥친 반신 마비, 깊어가는 증상. 스크린은 남편 조르쥬의 복잡한 얼굴을 계속 보여주며 관객에게 비극을 예상시킨다. 베개로 부인을 질식사시킨다.
 
『볼케이노』(2012), 아이슬란드
퉁명스럽고 예민한 성격의 67세 남편 하네스, 순종적이던 부인은 뇌졸중으로 혼미한 상태에 빠진다. 그는 간호를 해보려 했지만 결국은 베개로 얼굴을 누른다. 공감이 어려운 부분도 있는 영화다.


『청원』은 악화하는 자신의 몸 상태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마감하고자 하는 한 청년의 불꽃 같은 삶을 그렸다면, 다른 두 영화는 보편화한 핵가족화, 저출산, 고령사회에서 노노개호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 주는 영화다. 이튼의 결정과 조르쥬와 하네스의 결정, 그리고 각각의 부인들이 맞게 된 죽음에 대해서도 관객의 생각이 나뉠 것이지만 생각거리를 분명히 제시한다.


정리하면

젊은 사람들에겐 늙어 가며 겪게 될 일들이 그리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보통 각자의 생업에 쫓기며 살다 보면 불치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늘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언제 적부터인지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에서는 ‘죽음’을 공부하고 말하고……하는, ‘죽음’은 공개석상에서 불편해하는 주제였다. 그러나 최근 국내외 고령사회의 안타까운 현상들을 접하면서 ‘죽음’을 제대로 알고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죽음만큼 확실한 것은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라는 일침을 남겼다. 세 영화가 반드시 맞게 되는 노년, 고령에 따른 질병을 대비해 젊은 시절부터 무엇을 하라는 교훈을 주고자 만들어진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화들을 접하면서 다가오는 메시지들을, 나에게로 확장시켜 생각해 볼 수 있는 동기부여로 충분히 의미가 있다.




출처:영화『청원』
 


이튼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메시지:


“제가 행복한 건 고통이 어제로 모두 끝났기 때문이죠.
이제 행복하게 떠나렵니다.
인생은 무척 짧지만, 열심히 살면 길어져요.
그러니까 틀을 깨세요.
빨리 용서하고 진실로 사랑하고 즐거웠다면 후회하지 마세요.”


이튼의 어머니는 이튼의 인생은 오로지 이튼 만의 것이기에 이튼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고 아들의 안락사를 돕겠다고 말한다. 이튼의 선택을 존중한다. 종교적인 이해를 떠나서 생각해본다.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삶과 죽음. 눈물, 상실, 고통스럽고 슬픈 그런 죽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다른 한쪽인 삶을 말하는 것으로 바꾸어 생각해본다. 중환자실에서 줄줄이 타고 내려오는 관들에 연결된 채 마무리를 짓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생명의 과정에는 벅찬 순간들이 존재한다. 병아리도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새벽을 알리는 힘찬 울음소리를 내는 닭이 될 수 있다. 한 마리 나비도 고치를 스스로 벗어야 훨훨 날아 꽃향기를 맡는다. 인간은 탯줄을 끊고 나와야 비로소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죽음은 삶이라는 인생 여정에서 겪어야만 하는 어쩌면 가장 엄숙한 통과 절차며 장례는 인생의 마지막 의례이다. 죽음, 피하고 싶기도 하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란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 은지의 생각처럼 신비롭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 그 잠재성, 사멸성(死滅性)과 필연성까지 보태져서 유한한 삶이 더 소중하게 생각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2017.10.23. <한인경의 시네공간> 에서)
http://www.incheonin.com/2014/news/news_view.php?sq=40389&m_no=2&sec=3


누가 자기 죽음에 대해 확신하겠냐마는 행복한 삶은 행복한 마무리 즉 행복한 죽음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적 그림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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