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몸의 경계를 허무는 타자
상태바
여성, 몸의 경계를 허무는 타자
  • 정민나
  • 승인 2018.07.06 0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금요시단] 정민나 / 시인

최근 한국 사회에서 젠더 문제와 페미니즘 담론이 터져 나온 것은 강남역 9번 출구 사건을 계기로 한다. 페미니즘 테마는 그동안 가시화 되지 않았던 성추문이 공론화 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남성적인 문맥에서는 미처 포착하지 못했던, ‘타자성’, ‘억압’, ‘욕망’, ‘주변성’ 등 여성적인 것의 의의와 갖가지 성모순과 이것을 매개로 한 우리 시대 전체적인 모순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지배적 무의식을 대표하는” 남성 중심 체계로부터 배제되었던 여성들이 이러한 체제의 허위성을 폭로하고 고정된 통념에 저항하며 남성적인 서사 구조에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는 시도라 할 만하다.
 
김혜순은 80년대 후반부터 이미 이러한 남성 중심의 관점으로부터 누락되었던 ‘타자’들을 복원하기 위해 “보이는 것 뒤에 작동하는” 힘을 다양한 시적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의 시각은 당대의 시들과 뚜렷한 구별을 이룬다.
시인은 문학상 소감의 말에서 “나는 여성이며 한국 사람이다. 나의 시에도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타자성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나는 그 타자성으로 시 안에서 울고 웃는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그녀의 시 쓰기가 남성적 담론 질서와 관습적 장르의 억압으로부터 어떻게 자신의 언술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발언이다.
 

내 몸의 구멍 참 많다 / 망양정 정자 위에 높다랗게 올라서면 / 동해 바다가 / 내 구멍을 채우러 / 들어온다 / 내 온몸엔 마구 흘러다녀도 될 / 구멍 참 많다 / 바다는 빈 구멍마다 / 들어와 샌다 / 흐른다
(… 중략…) 죽음도 나왔다가 들어가는 구멍 / 그 구멍 속에다 / 저마다 죽음을 기르는 사람들 / 그 구멍 속에서 / 죽음을 꺼내놓기 안타까워 / 저렇게 발 구르며 / 표효하는 저 남자 / 죽음을 안고 / 웅크린 나를 향해 / 내놓아라 / 내놓아라 / 그래야 사는 법 / 설교하는 저 성자 할아버지


 
김혜순은 논리적이고 지성적인 남성에 비해 물리적인 여성이라는 열등한 위치를 “정신이 물질을 억압하” 듯 결핍으로 구멍이 숭숭 뚫린 고통스러운 여성의 몸을 통해 형상화 한다. 하지만 또 그런 몸을 독려하며 거기 함몰하지 않고 끔찍한 세계의 배면에 있는 경쾌함의 세계를 생기의 언어로 획득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시적 화자가 곤경에 처해 있을 때마다 그 비극적 양상을 분노로 폭발시키는 대신 시적 연상의 자유로움으로 변형 시킨다. 그렇게 해서 세계와 접촉하는 그의 몸은 외압의 무게를 줄이고 탄력성을 회복한다.
‘객관’과 ‘권위’, ‘무게’, ‘합리성’, ‘통제’ 등의 남성적 언어 구사에 비해 ‘직관’, ‘민감’, ‘무형태’, ‘열정’, ‘아이러니’ 언어를 구사하는 김혜순의 시는 ‘즉시성, ’순간성, ‘유동성’ 등의 요소가 어우러져 세상의 파편화와 부조화에 맞서 그에 알맞은 폭과 넓이를 확보한다. 이러한 방법적 성찰은 그의 여성적 무의식 안에서 길어 올려진 심리적 현실과 맞닿아 존재의 상승과 하강의 심화로 이어진다. 이것은 그의 무의식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실려 있는 주술적 어법과 만나는 지점이 된다.



한젬마가 쓴 <그림 읽어주는 여자> 중에서 

 
나는 이번 생에 복숭아 하나 얻으러 왔어 / 당신이 떠나가며 한 모금 울컥 뱉어놓은 / 그 붉은 얼룩 / 그것을 구하러 왔어 / 당신은 저 유령들의 세상에서 병들어 있다는데 / 나는 눈 내리는 이 겨울밤 이 얼어붙은 골짜기 / 그만 눈밭에 홀려버렸나봐 / 어디에 있는 거야? / 이 눈발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붉은 아기는 / 하얀 할머니 되고 하얀 할머닌 붉은 아기 된다는데 / 복사꽃 난분분 난분분 흰 눈은 / 밀려오고 다시 또 오는데 / 가도 가도 희디흰 백지 / 발자국 남기자마자 지워지는 내 평생의 족적 / 저 땅속 깊은 곳 어디선가 눈뜨는 핏발 선 눈동자 하나 / 벌어진 내 자궁 속에서 튀어나온 그 뜨거운 것 / 연필은 똑 부러지고, 숙제는 많은데 / 그런데 정말 어디에 있는 거야? / 어디선가 복숭아 향기 그윽이 오는 것만 같은데 - 김혜순, 「백년 묵은 여우」 전문

 
「백년 묵은 여우」 속의 복숭아는 우리의 상상력 속에서 재생의 의미를 가진다. 시인은 감각과 이미지로 몸의 언어를 새롭게 쓴다. 당신이 저 세상으로 갈 때 울컥 뱉어놓은 그것(복숭아)을 찾기 위해 하얀 눈밭 위에서 붉은 아기인 내가 하얀 할머니가 되고 다시 붉은 아기가 되면서 나는 늘 순환하는 실체가 된다.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욕망을 비추는 이 거울은 복숭아 하나만 비추는 평면거울이 아니다. 수많은 프리즘으로 만들어진 거울 속에 몸의 여러 이미지가 비친다.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의 절망의 풍경을 실연하는 극적인 상황도 시간 여행자의 역동적 이미지로 죽음을 극복하고 세계의 새로운 생성에 다가선다.
타자성이 몸에 새겨져 그 수난사가 기록된 것이 여성의 몸이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물리적 영역인 자연과 동일시되어 세상의 몸과 연속성을 지닌다. 그 둘은 함께 호흡하고 함께 움직인다. 김혜순의 부정의 언어는 몸이라는 주제를 중심축으로 펼쳐지는데 세계의 부정성이 내면화 되어 시인의 몸과 중첩을 이룬다.


무덤은 여기 /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 / 이 아래 몇 세기 전의 사람들이 아직 묻혀 / 숨 들이켜고 있는 곳 무덤은 여기 / 바다에 달 뜨고 달 지듯 / 두 개의 무덤 아래 / 죽은 자들이 모여 살면서 / 망망대해를 펼치고 오므리는 / 달을 건져 올리고 끌어당기는 / 여자의 깊은 몸 구중궁궐 / 또 한 세상, 무덤은 여기 /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 피 흘리며 갇혀 있다가 / 초승달 떠오를 때 / 기지개 켜는 곳 / 여우와 뱀이 입 맞추고 /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 천 번/ 되살아나고 되지는 곳 / 어느 별의 지옥은 여기
 김혜순, 「어느 별의 지옥」 전문


 
위 시에서 시인은 여성의 몸을 이면적이고 가치 없는 ‘무덤’으로 그리고 있다. 이 무덤은 “몇 세기 전의 어둠이 아직도 피 흘리며 갇혀 있”는 여성의 역사적 공간이지만 시인은 그 역사를 부정하지 않는다. 내적 해방을 향한 투쟁의 몸짓도 없고 다른 세계를 펼치는 반역의 기운도 없다. 다만 자신 안에 존재하는 현실적 질서의 공간 ? “초승달 떠오를 때 / 기지개 켜는 곳, 초록 풀 나무 덩굴이 수천 번 / 되살아나고 되지는 곳/ 어느 별의 지옥”을 펼쳐 보이며 시적 이미지로 ‘여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하여 “가슴에 매달린 두 개의 봉분”이 가리키는 몸은 무한한 자기 허여를 풀고 있는 듯한 여성의 모습 그대로를 반영한다. 그것은 시인의 시적자아이며 죽음으로 현전하는 이미지이다.

 
욕조에 담긴 미지근한 물이 말한다 / 내 전신에 가득 스민 당신 / 당신 귀로 돌아갔던 음악처럼 / 나는 당신 몸을 속속들이 / 다 더듬었는데 / 당신은 어딨니? // 욕조에 담긴 식은 물이 말한다 / 나는 대머리지 / 머리털이 없지 그래서 / 냄새도 없지 / 그러나 / 이제 당신 냄새로 / 이렇게 썩어가지 // 음악이 말한다 / 나는 손이 없지 팔도 없지 / 당신 땀구멍까지 다 껴안아줄 수는 있어도 / 당신을 잡을 수는 없지
 김혜순, 「 미쳐서 썩지 않아」 전문


 
“욕조에 담긴 미지근한 물”과 “식은 물”은 주체가 사라진 텅 빈 무, 혹은 욕망이 사라져 소멸되는 존재이며 “당신 냄새로 썩어가는” 육체가 되는 것이다. 나는 늘 당신을 꿈꾸지만 당신의 몸으로 내 몸을 가득 채울 수 없다. 내 몸의 창들이 당신의 부재 때문에 썩어간다.
관습적인 것이 아무런 비판도 없이 향수된다면 새로운 것은 혐오감을 가지고 비판되어 진다. 당신을 더듬고 껴안을수록 계속해서 결핍감만 더해지는 나의 형상은 뭉개지고 변형되고 일그러진다. “머리털이 없다 그래서 냄새도 없다… 당신 냄새로 이렇게 썩어가”는 나에게 내 속의 괴물에게 침을 뱉는다. 그리하여 내 몸은 아프고 내 몸 안에 어둠이 머문다. “은총의 상태를 포기한” 시적 화자의 멜랑꼬리는 죽음의 불가피성과 영생의 불가능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또한  “이렇게 썩어가지”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는 자기 반영으로 폐허 속에 흩어지는 파편들이다.
“역사의 세속적인 전개는 세계의 고통의 역사다” 이것이 바로크 비극에서 벤야민이 읽어내는 ‘이념’일 때 재현 기계의 산물 중에서 가장 구토를 일으키는 존재는 바로 아폴론에 순종하지 않아 벌을 받는 카산드라나 율리시스를 기다리는 페넬로페와 같은 좌절과 절망을 대변하는 여성들이다.


그녀가 온다. 태풍의 눈을 둥둥 두드리며 온다. 나는 그녀가 잘 지나가라고 내 몸을 판판하게 펴준다. 내 몸 위로 말발굽이 지나간다. 그녀의 날 선 칼이 내 눈속에서 번쩍한다. 어디선가 전투기들이 출정한다. 멀리서 온 태평양 함대가 전멸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이 폭발한다. 궁성의 우물들이 넘쳐흐른다. 그녀의 눈 속에서 샘물이 철철 솟아 흐른다. 검은 별들이 비 오듯 쏟아진다 물쥐들이 머릿속을 갉아 먹는다. 그녀가 온다
김혜순, 「낙랑공주」 부분

 

사회의 어떤 징후를 공적 무대의 허구들과 외침들에 대조시키는 것은 바로 문학 자체이다. 재현적 전통의 등급을 폐지하고 다른 한편으로 사물들, 사람들 몸 위의 기호를 읽기 위해 시대와 사회의 부정적 징후들을 발견하는 것, 그 자취들로부터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김혜순 시의 특징이 된다. 생명의 열이 가득 찬 이 시인의 시적 형식과 상상력의 가장 초보적인 행위는 해체이다. 그리하여 육체의 확장과 탈 제도화 “두꺼운 아버지의 고막을 찢고 그에게 가리”와 같이 낡은 주체의 무덤에서 이제 새로운 주체가 걸어 나와야 한다. 이것은 사회의 비합리성을 비판하는 탈근대적 주체, 역사에 최종 목적은 설정하지 않으나 저항을 포기하지 않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포착하는 현대적 의미의 여성적 주체를 말함이다. 이것이 또한 이성의 폭력성을 철외하고 개별자들의 존재를 존중하고 동일화의 강박을 벗게 한다.
김혜순 시 속에서 시인의 몸은 욕망과 억압이 소용돌이치는 여성의 몸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여성의 수난사가 기록된 몸이다. 결핍을 보상할 길 없는 열등한 몸이자 고통으로 채워진 아픈 자의 몸이다. 몸과 고통 사이에 언어를 장악한 아버지를 세워두고 억압하는 말들에 매 맞아 일그러진 여성의 모습이 괴물처럼 그려진다.
한국 현대 문학사를 통해 바라본 여성 문학은 억압과 소외의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1980년대 이후에야 여성 시인들은 남성적 질서와 맞설 수 있는 미학적 가능성을 전면적으로 타진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이후 급부상한 여성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한 김혜순은 탈 중심성의 시를 통해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탈출하려 하지만 너무 전투적이어서 남성을 끝까지 적으로 만들거나 여성만이 아프다고 말하는 상투성으로부터 벗어나 개별성과 보편성을 획득한다. 사랑과 모성 등 여성적 가치를 중심으로 여성의 힘과 다름을 강조하며 그는 지금까지의 여성문학이 이룬 성과들의 한계를 보완하고 주변부에 존재했던 여성 문학의 무한한 가능성에 참여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