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편 양화(陽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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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편 양화(陽貨)
  • 이우재
  • 승인 2010.10.28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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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7편 양화(陽貨)

1,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孔子時其亡也 而往拜之. 遇諸塗.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曰 不可.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曰 不可. 日月逝矣 歲不我與. 孔子曰 諾 吾將仕矣.
  양화가 공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공자께서 만나주지 않으셨다. 양화가 공자께 돼지를 보냈다. 공자께서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찾아가 사례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공교롭게도 그를 만났다.
  양화가 공자께 말하길 “이리 오시오. 내가 당신과 이야기 좀 하리다.”
  말하길 “보물을 품속에 지니고 있으면서도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그냥 두고 있다면, 그것을 인(仁)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렇다고 할 수 없겠지요.”
  “일에 종사하기를 좋아하면서도 자주 기회를 놓친다면, 지혜롭다고 할 수 있겠소?”
  “그렇다고 할 수 없소이다.”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있습니다.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소.”
  “알았소이다. 나도 장차 벼슬길에 나아가리다.”

  <해설> 양화(陽貨)는 계씨의 가신으로 이름은 호(虎)다. 『춘추좌씨전』에 의하면 노나라 정공(定公) 5년에 자신의 주군인 계환자(季桓子)를 구금하고 정권을 잡았으며, 정공 8년에 삼환(三桓)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여 국외로 망명하였다. 여기의 문답은 정공 8년 이전의 일로 추정된다. 양화가 앞으로의 일을 위하여 명망이 높은 공자를 포섭하여 자기의 세력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양화와 공자의 만남에 대해서는 『맹자』 「등문공(滕文公)하」편 7에 그 자세한 전말이 나타나 있다. 대부(大夫)가 선비(士)에게 선물을 보낼 경우, 선비가 자기 집에서 직접 그것을 받지 못하면, 몸소 대부의 집으로 찾아가 사례를 하는 것이 당시의 예법이었다. 공자가 자기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챈 양화는 공자를 자신의 집으로 오게 하기 위하여 일부러 공자가 집에 없는 틈을 타 돼지를 보냈다. 공자는 보내 준 선물에 대한 답례로서 양화에게 사례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양화를 만나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공자도 또한 양화가 집에 없는 기회를 엿본 것이다. 시(時)는 때를 엿본다는 뜻이다.
  遇諸塗의 우(遇)는 우연히 만나는 것이고, 제(諸)는 지어(之於), 도(塗)는 도(途)이다. 공자가 그렇게도 양화를 만나는 것을 피해 왔으나 공교롭게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를 만난 것이다.
  懷其寶而迷其邦의 보(寶)는 공자의 훌륭한 재능이다. 迷其邦은 나라를 어지럽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공자가 품속에 있는 그 훌륭한 재능을 발휘하지 않고, 나라가 어지러운 것을 방치하고 있다는 말이다.
  기(亟)는 자주 하는 것(數)이다. 공자가 정치에 종사하기를 바라면서도 자기와 같이할 기회를 자주 놓치고 있다는 말이다.
  양화는 공자가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자기와 함께 일을 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에 대해 공자는 모두 불가(不可), 즉 양화의 말이 옳다고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가 자기가 잘못했다고 시인한 것은 아니다. 공자는 양화의 말이 말 그 자체의 이치가 옳다고 긍정한 것뿐이지, 양화와 더불어 함께 일을 하겠다고 한 것은 아니다. 핵심은 슬쩍 비켜 간 것이다.
  양화가 마지막으로 재촉한다. 시간이 없다고. 그 말에 대해서도 역시 공자는 인정한다. 그렇다고. 자기도 장차 벼슬을 할 것이라고. 그러나 장(將)이라고 한 것은 장차 언젠가는 할 것이라는 뜻이지, 지금 당신과 함께 한다는 것은 아니다. 공자는 양화의 말을 다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양화의 제의에 대해서는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싫고 좋음을 떠나 예에는 예로서 대하고, 말이 맞을 때는 맞다라고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제의를 돌려 회피하는 공자의 진면목이 여실하다. 공자가 벼슬하기를 싫어한 것은 아니다. 다만 무도한 양화의 도움을 얻어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이 싫었던 것뿐이다. 양화를 노하게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구구한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으면서 공자는 자기의 입장을 관철하고 있다. 만일 정면에서 양화의 말을 거슬렸다면 공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녕 군자의 지혜라 아니할 수 없다. 간략하지만 읽을수록 행간의 의미가 되씹혀지는 장이다.
  한편 청의 모기령(毛奇齡)은 『논어계구편(論語稽求篇)』에서 두 번의 불가(不可)라는 말이 공자의 말이 아니라, 양화가 자기가 묻고 자기가 대답한 것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다산도 같은 입장이다.

2,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사람의 천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의해 멀어진다.”

  <해설> 성(性)은 인간이 타고난 성품이다. 습(習)은 습관, 즉 후천적으로 익히는 것이다.
  인간이 처음 태어날 때는 착하고 악한 것이 없다. 다만 커가면서 무엇을 배우고 노력하느냐에 의해 착하게도 악하게도 되는 것이다.
  공자는 원래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 선(善)하다, 악(惡)하다는 등의 말을 한 바가 없다(夫子之言性與天道 不可得而聞也―공야장 12). 그러나 공자는 인간의 가능성(可能性)을 믿고 있었다. 그가 최고의 도덕적 덕목으로 삼았던 인(仁)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까운 것에서부터 터득하여  먼 데까지 미루어 갈 수 있으면 인(仁)을 행할 수 있는 것이다(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옹야 28). 그러기에 공자는 누구라도 하루동안은 인(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하였으며(有能一日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이인 6), 내가 인(仁)을 원하면 인(仁)이 내게 이른다고 하였다(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술이 29). 공자가 보기에 인(仁)은 비록 어려운 것이기는 하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먹기에 따라 능히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보충> 공자 사후 맹자(孟子)는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순자(荀子)는 악하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맹자는 성선설에 근거하여 개개인의 덕의 수행을 통해 도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개한다. 따라서 맹자는 군주의 덕(德)에 의한 정치가 가장 훌륭한 정치라는 왕도(王道) 정치를 주장한다. 그러나 순자는 성악설에 입각하여 예(禮)의 교육을 통해 인간의 타고난 악(惡)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방지하자고 주장한다. 순자의 이러한 주장은 마침내 그의 제자라고 일컬어지는 이사(李斯), 한비자(韓非子)에 이르러 국가의 물리적 강제력(法)에 의한 인간의 통제를 주장하는 법가(法家)의 정치 이론으로까지 발전한다. 인간 성품의 선악에 대한 논쟁이, 같은 공문(孔門)의 제자 사이에서, 서로 정반대의 정치, 사회, 윤리적 주장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공자는 비록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인간의 가능성을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 볼 때 아마 맹자의 성선의 편에 보다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된다.
 
3, 子曰 唯上知與下愚不移.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오직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만이 변하게 할 수 없다.”

  <해설> 상지(上知)는 태어나면서부터 지혜가 출중한 자로, 계씨 9에 보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生而知之者)이다. 하우(下愚)는 가장 어리석은 자로, 계씨 9에서 말하는 벽에 부딪쳐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는 자(困而不學)다. 이(移)는 바꾸는 것이다.
  바로 앞 장에서도 말했듯이 인간은 누구나 가능성을 갖고 태어나며, 본인의 노력에 의해 얼마든지 훌륭해질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예외는 있다. 상지(上知)는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도(道)를 깨닫고, 그에 따라 살아가므로 더 이상 변화시킬 필요가 없다. 반대로 하우(下愚)는 본인 스스로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을 아무리 성인(聖人)이라 한들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으랴. 
  고주는 이 장(章)을 위의 장과 합하여 하나의 장으로 편집하고 있다.

4, 子之武城 聞弦歌之聲. 夫子莞爾而笑曰 割鷄焉用牛刀. 子游對曰 昔者偃也聞諸夫子曰 君子學道則愛人 小人學道則易使也. 子曰 二三子 偃之言是也. 前言戱之耳.
  공자께서 무성에 가셨을 때, 거문고 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으셨다. 공자께서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시길 “닭을 잡는 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느냐?”
  자유가 대답하여 말하길 “전에 저는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군자가 도를 배우면 백성을 사랑하고,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가 쉽다.’고.”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얘들아, 언(偃)의 말이 옳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니라.”
 
  <해설> 무성(武城)은 지금의 산동성 비(費)현 가까이에 있는 노나라의 읍(邑)이다. 당시 자유가 읍재(邑宰)로 있었다. 현(弦)은 거문고와 같은 현악기다. 莞爾笑는 빙그레 웃는 것이다. 언(偃)은 자유의 이름이다. 이삼자(二三子)는 제자들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다.
  거문고 소리에 맞춰 부르는 노랫소리가 들렸다는 것은 자유가 무성을 다스리기를 예악(禮樂)으로써 했다는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공자는 자기의 가르침대로 실행하는 자유가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그 곧이곧대로 하는 고지식함에 웃음도 나왔으리라. 그래서 빙긋이 웃으며 이 작은 마을 하나 다스리는 데 어찌 예악까지 필요하겠느냐고 말을 건넨다. 고지식한 자유는 정색을 하고 답변한다. 전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시지 않았느냐고. 공자는 고지식한 자유에게 더 이상 농(弄)을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말이 농담이었음을 인정한다.
  농담으로 제자에 대한 대견함을 표시하는 공자, 그에 정색으로 맞서는 자유의 고지식함, 자유의 지적을 인정하고 자신의 말을 취소하는 공자의 모습이 짧은 글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논어를 읽는 즐거움이다.  

5, 公山弗擾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說曰 末之也 已. 何必公山氏之之也.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공산불요가 비읍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하였다. 공자께서 가시려고 하자, 자로가 납득이 가지 않아 말하길 “가실 곳이 없으시면 그만두실 것이지, 하필이면 공산씨에게로 가시려 하십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생각 없이 그냥 불렀겠느냐? 만일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곳을 동방의 주(周)나라로 만들겠노라.”

  <해설> 공산불요(公山弗擾)는 성이 공산(公山), 이름은 불요(弗擾)이다. 반(畔)은 반란을 일으키는 것(叛)이다. 고주(古注)에 의하면, 계씨(季氏)의 가신으로 양호(陽虎)와 함께 계환자(季桓子)를 구금하고 비(費)읍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주자의 설명도 같다. 그러나 『사기』나 『춘추좌씨전』에는 공산불요라는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공산불뉴(公山不狃)라는 인물이 노나라 정공(定公) 8년에 양호와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며, 정공 12년에는 비(費)의 사람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습격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주나 신주 모두 비록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공산불요와 공산불뉴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元)의 진천상(陳天祥) 같은 사람은 두 사람이 별개의 인물이라고 주장한다. 
  공산불요가 반란을 일으키고 난 후, 공자를 초빙하였다. 아마 공자의 도움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리라. 그런데 예상 밖으로 공자는 불요의 초청에 응하려고 하였다. 자로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설(說)은 보통 기쁘다는 뜻의 열(悅)로 읽으나, 여기서는 조기빈(趙紀彬)의 『논어신탐(論語新探)』의 주장을 따라 이해한다(解)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末之也 已의 말(末)은 없다(無), 지(之)는 가다(適), 이(已)는 그만둔다(止)는 뜻이다. 즉 갈 곳이 없으면 그만둔다는 의미다. 자로의 말은 갈 곳이 없으면 그만두고 가만히 있을 일이지, 하필이면 반란자인 공산불요에게 가려고 하느냐는 질책의 말이다. 
  豈徒哉의 도(徒)는 헛되이(空)라는 뜻으로, 공산불요가 나를 불렀을 때는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랬겠지, 어찌 헛되이 그냥 부르려고 했겠느냐는 의미다. 동주(東周)는 동녘 땅의 주나라이다. 즉 비(費)읍이 중국의 동쪽에 있으므로 그 곳에 주나라의 도(道)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이다.
  옛부터 해석이 분분한 장(章)이다. 예를 참람하는 행위를 그렇게도 비판한 공자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반란자인 공손불요의 초청에 응하려고 했는가가 문제이다. 이에 대하여 청의 유보남은 『논어정의』에서 계씨가 노나라 공실(公室)을 참람하고 있었으므로, 공자가 공산불요의 도움을 얻어 계씨를 제거하고 노나라 공실의 위엄을 회복하려 했던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는 하나, 논리적으로는 큰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작은 반란을 허용한 것이 된다. 즉 결과적으로는 반란을 인정한 것이며, 죄악으로써 죄악을 갚는 격이다. 사회적 혼란을 인간 본연의 인(仁)에 의하여 극복하려고 한 공자의 평소 입장과는 상반된다.
  정자(程子) 같은 사람은 성인(聖人)인 공자가 이 세상에서 어쩌지 못할 사람은 없다. 공자는 공산불요의 허물을 고치지 못할 게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내 공산불요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람임을 깨닫고 가는 것을 포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자에 대한 숭배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이 일을 노나라 정공(定公) 9년, 공자 나이 50세 때의 일로 보고 있다. 사마천에 의하면 공자가 도를 추구한 지 오래되었으나, 아무도 공자를 등용하려 하지 않았다. 그 때 마침 공산불요가 공자를 초빙하였다. 공자는 “주나라 문왕과 무왕은 풍(豊)과 호(鎬) 지방에서 왕업을 일으켰다. 지금 비록 비(費) 땅이 작기는 하나, 대체로 풍이나 호와 다를 바도 없지 않겠느냐”라고 말하며 가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마천의 눈에 비친 공자는 자신의 도를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기 위해 반란자와도 손을 잡을 정도로 기회를 목말라 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13년이나 천하를 주유한 것을 감안할 때,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주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본의 역사학자 오쿠라요시히꼬(小倉芳彦)는 춘추시대 반(畔)이라는 글자가 사용된 용례(用例)를 분석하여 이 문제 해결의 단초를 찾고 있다. 즉 춘추시대 반(畔)이라는 글자는 전국시대의 군신(君臣)관계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비난받아 마땅한 반역(叛)의 의미로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춘추시대의 반(畔)은 서로 독립적인 도시국가 간, 혹은 독립성이 강한 가신과 주군을 연결하는, 서로 다른 씨족간의 맹약(盟約) 관계를 파기하고 제각기 분리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공자도 아무런 도덕적 부담을 느끼지 않고 공산불요에게 가려고 했다는 것이다. 더 깊은 연구를 기다려야 하겠으나,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한 해석을 진일보시킨 것임에는 틀림없다.    
 
6, 子張問仁於孔子. 孔子曰 能行五者於天下 爲仁矣. 請問之. 曰 恭寬信敏惠. 恭則不侮 寬則得衆 信則人任焉 敏則有功 惠則足以使人.
  자장이 인(仁)에 대해 공자께 물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능히 다섯 가지를 천하에 실천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인이니라.”
  “청컨대 묻사옵니다.”
  “공손함, 관대함, 신의, 민첩함, 은혜이니라.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많은 사람들을 얻으며, 신의가 있으면 사람들이 신임하고, 민첩하면 공을 이룰 수 있으며, 은혜를 베풀면 족히 사람을 부릴 수 있느니라.”

  <해설> 논어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묻고 있는 대목은 모두 일곱 번 나온다. 그 중 번지(樊遲)가 옹야 20, 안연 22, 자로 19에서 도합 세 번 묻고 있고, 나머지는 안연 1에서 안연(顔淵)이, 안연 2에서 중궁(仲弓)이, 안연 3에서 사마우(司馬牛)가, 그리고 여기서 자장이 묻고 있다. 공자의 대답은 사람에 따라,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르다. 공자에게 인(仁)이란 추상적인 개념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공자는 자장에게 공손함, 관대함, 신의, 민첩함, 은혜(恭寬信敏惠)를 갖춰 행할 수 있다면 인(仁)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만 이 장(章)이 다른 곳과 다른 것은 공자가 공관신민혜(恭寬信敏惠) 다섯 가지로 말을 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는 말을 아끼는 사람으로 항상 말을 한정하기보다는 말에 여유를 두기를 좋아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다섯 가지로 말을 한정하고 있다. 평소와는 다른 어투이다. 계씨 편에서도 언급했지만 다섯이라는 숫자에 말을 맞춘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자는 이씨(李氏)를 인용하여 이 장과 본 편 8장의 육언육폐(六言六蔽), 그리고 요왈 2의 오미사악(五美四惡)의 문체가 논어의 다른 문장들과 크게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진짜 공자의 말일까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7, 佛힐(肹)召. 子欲往.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子曰 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힐(肹)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필힐이 초빙하자, 공자께서 가시려고 했다. 자로가 말하길 “전에 저는 선생님께서 ‘군자는 자신이 몸소 좋지 못한 일을 하는 자에게 가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필힐이 중모 땅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선생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것은 어찌된 영문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그렇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갈아도 엷어지지 않는다면 단단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검은 물감을 들여도 검어지지 않는다면 희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가 어찌 쓰디쓴 박이란 말이냐? 매달려만 있고 사람들이 따먹지도 않는.”

  <해설> 필힐(佛肹)은 진(晋)나라의 대부로, 진나라의 실력자 조씨(趙氏)의 가신이다. 중모(中牟)의 읍재(邑宰)로 있었다. 이 필힐이 중모에서 조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노나라 애공(哀公) 5년, 공자 나이 62세 때의 일이다.
  필힐도 공산불요와 마찬가지로 공자를 초빙하였고, 공자 또한 그 초청에 응하려고 하였다. 예의 자로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당연히 제지하고 나섰다.
  견(堅)은 단단한 것이고, 마(磨)는 돌을 가는 것, 린(磷)은 엷은 것(薄)이다. 열(涅)은 옷감을 검게 물들이는 염료이다. 치(緇)는 검은 색(黑)이다. 不曰堅乎 磨而不磷 不曰白乎 涅而不緇는 누구도 자신을 어쩔 수 없다는 공자의 자신감의 표현이다. 즉 반란자인 필힐과 어울리더라도 자신의 도를 지킬 수 있다는 뜻이다.
  포과(匏瓜)는 박의 일종으로 그 맛이 써서 먹지는 못한다. 계(繫)는 매달려 있는 것이고, 식(食)은 사람들에게 따먹히는 것이다. 공자는 자신이 매달려만 있을 뿐, 맛이 써서 아무도 따먹으려고 하지 않는 박과 같은 존재는 아니라고 하고 있다. 즉 누군가 자신을 등용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다. 식(食)을 수동(受動)형으로 해석한 것은 일본 도꾸가와 시대의 유학자 이또진사이(伊藤仁齋)의 『논어고의(論語古義)』에 의거했다. 청의 모기령(毛奇齡)의 『논어계구편(論語稽求篇)』도 같이 식(食)을 수동형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설명은 다르다. 모기령에 의하면 포과는 먹는 것이 아니라, 다만 허리에 매달고 물을 건너는 데 쓰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계(繫)는 한 곳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허리에 매단다는 뜻이다.
  그러나 황간(皇侃), 형병(邢昺), 주자(朱子)는 식(食)을 능동(能動)형으로 해석한다. 즉 나는 한 곳에만 매달려 있는 박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며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또 황간의 『논어의소』에는 포과(匏瓜)가 박이 아니라 별자리의 이름이라는 일설(一說)이 소개되어 있다.
  5장의 공산불요(公山弗擾)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해석이 분분하나,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므로 생략한다. 공산불요의 경우에도 그랬지만 공자는 필힐의 부름에 응하려고 하였으나, 결국 가지 못하고 말았다.

8,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對曰 未也. 居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유야, 너는 육언육폐(六言六蔽)란 말을 들어 보았느냐?”
  자로가 대답해 말하길 “아직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리 앉아라. 내가 말해 주겠다. 인(仁)을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으로 나타난다. 지혜를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방탕함이다. 신의를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치는 것이다. 정직함을 좋아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가혹함이다. 용기를 좋아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폭함이다. 굳센 것을 좋아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무모함이다.”

  <해설> 육언(六言)은 여섯 가지 말로, 인(仁), 지(知), 신(信), 직(直), 용(勇), 강(剛)을 가리킨다. 육폐(六蔽)는 여섯 가지 폐단으로, 우(愚), 탕(蕩), 적(賊), 교(絞), 난(亂), 광(狂)이다.
  인(仁)을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사람만 좋을 뿐 어리석어지는 폐해가 있다. 지혜를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분수를 모르고 방탕해지는 폐단이 있다. 신의를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도적의 신의가 되어, 사람을 해치는 폐단이 나타난다. 정직함을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가혹함이 폐단이 된다. 용기를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난폭해지는 폐단이 있다. 굳센 것을 좋아하더라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무모해지는 폐단이 나타난다. 배움의 중요함을 나타낸 말이다.
  본 편 6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육언(六言), 육폐(六蔽)는 육(六)이라는 숫자에 얽매인, 지나치게 단정적인 느낌이 드는 표현이다. 고래로 많은 학자들이 과연 공자의 말일까 의심하고 있다.

9, 子曰 小子何莫學夫詩. 詩 可以興 可以觀 可以羣 可以怨. 邇之事父 遠之事君. 多識於鳥獸草木之名.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들은 어찌하여 시를 공부하지 않느냐? 시를 공부하면 감흥을 나타낼 수 있으며, 사물을 살펴볼 수 있고, 무리와 어울릴 수 있으며, 원망할 수 있고, 가까이는 아비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으며, 새와 짐승, 풀과 나무의 이름도 많이 알 수 있느니라.”

  <해설> 공자가 시(詩)의 효용을 강조한 말이다.
  흥(興)을 주자는 感發志意라고 하고 있다. 즉 인간의 정신을 감흥 시키고, 나타내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고주의 공안국은 引譬連類, 즉 시에서 자주 사용되는 수사학(修辭學)적 기교인 비유(譬喩)를 사용하여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관(觀)을 주자는 考見得失, 즉 세상의 득실을 미루어 살펴보는 것이라고 하고, 고주의 정현은 세상 풍속의 성쇠를 살펴보는 것이라고 한다. 모두 같은 뜻이다. 즉 시를 통하여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도 느끼고 미루어 살펴볼 수 있다는 뜻이다. 문학의 간접 경험 기능을 말하고 있다.
  군(羣)은 군(群)으로 무리와 어울리는 것이다. 공안국은 함께 모여 갈고 닦는 것, 즉 공동으로 학문을 연마하는 것이라고 하고, 주자는 서로 같이 어울리되 시류(時流)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시가 남과 어울리는 데 효용이 있음을 나타낸 말이다.
  원(怨)은 원망하는 것이다. 주자는 원망하되 노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고, 공안국은 윗사람의 정치를 풍자하는 것이라고 한다.
  흥(興), 관(觀), 군(羣), 원(怨), 이 넷이 시의 가장 중요한 효용이다. 그것을 배움으로써 가까이는 부모를 섬길 수 있고, 멀리는 임금을 섬길 수 있다. 즉 인륜(人倫)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그밖에 시의 부수적인 효용으로는 사물에 박식해진다는 것이다.
 
10, 子謂伯魚曰 女爲周南召南矣乎. 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牆面而立也與.
  공자께서 백어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였느냐? 사람으로서 주남과 소남을 공부하지 않으면, 마치 담장을 마주하고 서 있는 것과 같으니라.”

  <해설> 백어(伯魚)는 공자의 아들 이(鯉)다. 위(爲)는 학(學)이다. 주남(周南), 소남(召南)은 『시경』 국풍(國風)의 처음 두 편의 이름이다. 주로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담장을 마주하고 서 있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것을 말한다.
  시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되나, 청의 유보남(劉宝楠)은 『논어정의』에서 주남, 소남이 주로 부부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혹시 백어가 결혼할 때 공자가 교훈으로 한 말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11, 子曰 禮云禮云 玉帛云乎哉. 樂云樂云 鐘鼓云乎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예라 예라 일컫지만 어찌 옥이나 비단을 말하는 것이리오. 악이라 악이라 하지만 어찌 종이나 북을 말하는 것이리오.”
 
  <해설> 예(禮)는 공경심을 절제 있게 나타내는 것이고, 악(樂)은 소리를 조화롭게 나타내는 것이다. 흔히 예를 나타낼 때 의복의 격식을 차리느라고 옥을 차고 비단옷을 걸치지만, 공경심이 없다면 그것은 이미 예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음악(音樂)을 나타낼 때 종이나 북으로 소리를 내지만, 조화가 없다면 음악이 아니다.
 
12, 子曰 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얼굴빛은 위엄이 가득하면서도 속은 유약한 사람은, 소인에게 비유한다면 마치 벽을 뚫고 담을 넘어가는 좀도둑과 같으니라.”

  <해설> 색(色)은 얼굴빛이요, 여(厲)는 위엄이 있는 것이다. 임(荏)은 유약하고, 줏대가 없는 것이다. 천(穿)은 벽을 뚫는 것이고, 유(窬)는 담을 타고 넘는 것이다.
  겉으로는 위엄이 있는 척하면서 속은 유약한 사람과 벽을 뚫고 담을 넘는 좀도둑은 둘 다 남이 알아차릴까 봐 항상 마음을 졸이고 있다는 점에서 서로 같다.  

13, 子曰 鄕原德之賊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마을 사람에게 아부하여 덕이 있다고 칭송 받는 자는 덕을 해치는 자이다.”

  <해설> 향원(鄕原)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삼가는 척하면서 더러운 세속에 영합하여, 세속인들로부터 마치 덕이 있는 사람으로 칭송 받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즉 주변 사람들의 잘못을 보면서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눈감아 주어, 마치 겉으로는 너그럽고 후덕한 사람처럼 행세하는 자 따위를 가리킨다. 안연 20에서 말하는 헛된 명성만 있을 뿐으로, 겉으로는 어진 사람인 척하나 그 행실은 어긋나고, 평소 자신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 사람(夫聞也者 色取仁而行違 居之不疑 在邦必聞 在家必聞)과 같은 부류이다. 『맹자』 「진심(盡心)하」편 37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명백한 악(惡)에는 현혹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는 악(惡)이면서도 겉으로는 덕(德)처럼 보이는 이러한 사이비(似而非) 덕(德)은 사람을 미혹에 빠뜨린다. 그러기에 공자가 덕(德)의 적(賊)이라고까지 말한 것이다.
  
14, 子曰 道聽而塗說 德之棄也.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길가에서 주워 들은 말을 길가에서 하는 것은 덕을 버리는 짓이다.”

  <해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남의 말을 들었으면 그것을 곰곰이 음미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 연후에 남에게 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남에게서 주워 들은 풍월을 그대로 생각 없이 남에게 전하는 것은 말을 버리는 짓이요, 덕을 버리는 짓이다.

15, 子曰 鄙夫可與事君也與哉. 其未得之也 患得之. 旣得之 患失之. 苟患失之 無所不至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비속한 사람과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을까? 벼슬을 얻기 전에는 얻지 못할까 근심하고, 얻으면 잃을까 근심한다. 진실로 잃을까 근심하게 되면 못하는 짓이 없다.”

  <해설> 비부(鄙夫)는 비속한 사람이다. 患得之는 患不得之, 즉 벼슬을 얻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는 것이다. 송(宋)의 소동파(蘇東坡)는 마땅히 患不得之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군자는 벼슬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다만 그 자리에 서 있을 능력이 있는가를 걱정한다(不患無位 患所以立―이인 14). 그러나 소인은 벼슬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벼슬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기에 함께 임금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16, 子曰 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古之狂也肆 今之狂也蕩. 古之矜也廉 今之矜也忿戾. 古之愚也直 今之愚也詐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옛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병폐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것마저 없어진 것 같다. 옛날의 뜻이 높은 자는 자기 생각대로 말에 거리낌이 없었으나, 지금의 뜻이 높은 자는 방탕할 뿐이다. 옛날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모나게 행동했으나, 지금의 자부심이 강한 자는 분을 터뜨리며 남과 다투기만 할 뿐이다. 옛날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우직했으나, 지금의 어리석은 자들은 남을 속이기나 할 뿐이다.”

  <해설> 질(疾)은 흠, 병폐다. 광(狂)은 뜻은 높으나 행동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 긍(矜)은 자부심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 우(愚)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肆)는 고주(古注)의 포함(包咸)에 의하면 자기 생각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자는 작은 절개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탕(蕩)는 지키는 바가 없어 방탕한 것, 염(廉)은 행동이 모가 난 것, 분려(忿戾)는 분을 터뜨리며 남과 다투는 것, 직(直)은 우직한 것, 사(詐)는 남을 속이는 것이다.
  옛사람들에게는 광(狂), 긍(矜), 우(愚)라는 세 종류의 결함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나름의 좋은 점도 갖고 있었다. 즉 뜻이 높은 자(狂)는 말과 행동에 남을 의식하지 않았고, 자부심이 센 자(矜)는 나름대로 행동에 줏대가 있었으며, 어리석은 자(愚)는 남을 속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세태가 각박해져 광자(狂者)는 오직 방탕할 뿐이고, 긍자(矜者)는 남과 다투기나 하고, 우자(愚者)는 남을 속이려고만 할 뿐이다. 옛사람들의 순박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17, 子曰 巧言令色 鮮矣仁.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교묘히 입에 발린 소리만 내세우고, 얼굴에 아첨만 가득 찬 사람치고 어진 자는 드물다”

  <참고> 학이 3에 같은 말이 있다.

18, 子曰 惡紫之奪朱也. 惡鄭聲之亂雅樂也. 惡利口之覆邦家者.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자주색이 붉은 색을 빼앗는 것을 미워하며, 정나라 음악이 아악을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고, 말재주로 나라와 집안을 뒤엎는 것을 미워한다.”

  <해설> 자(紫)는 자주색이고, 주(朱)는 붉은 색이다. 주(朱)는 정색(正色)이고, 자(紫)는 간색(間色)이다. 정성(鄭聲)은 정나라의 음악으로 『시경』의 노래 중 가장 호색적이라고 한다. 아악(雅樂)은 정통의 바른 음악이다. 이구(利口)는 말재주이고, 복(覆)은 뒤엎는 것이다. 방(邦)은 제후의 나라요, 가(家)는 대부의 집안이다.
  겉으로는 그럴 듯해 보이나 사실은 그렇지 않은 위선(僞善)이 본래의 것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미혹시키는 것을 경계한 말이다.
 
19, 子曰 予欲無言. 子貢曰 子如不言 則小子何述焉. 子曰 天何言哉. 四時行焉 百物生焉 天何言哉.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는 이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련다.”
  자공이 말하길 “선생님께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어떻게 도를 이어받아 전하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사시(四時)가 운행되고 만물이 생장하지만 하늘이 무슨 말을 하더냐?”

  <해설> 술(述)은 조술(祖述)로 도를 이어받아 전하는 것이다.
  인간은 말로 의사를 소통한다. 또 그 말을 글로 남겨 시간과 공간을 멀리하고서도 서로의 생각을 전하고 받을 수 있다. 학문을 가르치고, 배우는 데 만일 언어가 없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그런데 공자가 이제부터 자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고 갑자기 선언한 것이다. 자공의 놀람은 당연하다. 그런 자공에게 공자는 하늘의 운행을 예로 들어 말하고 있다. 하늘이 언제 말을 하더냐? 아무 말도 안 하지만 사시가 운행되고 천하 만물이 다 생장하지 않느냐고.
  견월망지(見月望指)란 말이 있다. 달을 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켰더니,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바라본다는 말이다. 언어와 진리와의 관계가 그것은 아닐런지. 언어는 진리를 나타내는 수단일 뿐이지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 공자가 말에 뛰어난 자공에게 말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사물의 근본을 꿰뚫어 직시하라고 가르친 말이 아닐까 생각된다.

20, 孺悲欲見孔子. 孔子辭以疾. 將命者出戶. 取瑟而歌 使之聞之.
  유비가 공자를 뵙고자 하였다. 공자께서 병을 이유로 거절하셨다. 말을 전하는 자가 문을 나가자, 공자께서 거문고를 들어 노래하시어 그로 하여금 듣게 했다.

  <해설> 유비(孺悲)는 노나라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예기(禮記)』 「잡기(雜記)하」편에 노나라 애공이 그를 공자에게 보내 선비의 상례(喪禮)를 배우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명자(將命者)는 말을 전하는 심부름꾼이다.
  자세한 전말(顚末)을 알 수는 없지만 공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유비를 만나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러기에 유비의 뜻을 전달하러 온 심부름꾼에게 병을 이유로 만나는 것을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가 문을 나서자 거문고를 타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이 실은 아프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21, 宰我問 三年之喪 期已久矣. 君子三年不爲禮 禮必壞. 三年不爲樂 樂必崩. 舊穀旣沒 新穀旣升. 鑽燧改火. 期可已矣. 子曰 食夫稻 衣夫錦 於女安乎. 曰 安. 女安則爲之. 夫君子之居喪 食旨不甘 聞樂不樂 居處不安 故不爲也. 今女安則爲之. 宰我出. 子曰 予之不仁也. 子生三年然後 免於父母之懷. 夫三年之喪 天下之通喪也. 予也有三年之愛於其父母乎.
  재아가 묻기를 “삼년상은 일년이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군자가 삼 년 동안 예(禮)를 행하지 않으면 예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삼 년 동안 악(樂)을 행하지 않으면 악 또한 반드시 무너집니다. 묵은 곡식이 다 떨어지고 햇곡식이 나옵니다. 불씨도 새 것으로 바꿉니다. 일년이면 족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쌀밥을 먹고 비단옷을 입는 것이 네게는 편안하느냐?”
  말하길 “그렇습니다.”
  “편안하거든 그렇게 하거라. 무릇 군자는 상중에는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달지 않으며, 음악을 들어도 즐겁지 않고, 집에 머물러도 편안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네가 편안하다면 그렇게 하거라.”
  재아가 물러갔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재아는 어질지 못하구나. 자식이 태어난 지 삼 년이 지난 후에야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무릇 삼년상은 천하에 공통된 상례이다. 재여도 부모로부터 삼 년의 사랑을 받았을 터인데.”

  <해설> 期已久矣, 期可已矣의 기(期)는 일년이다.
  舊穀旣沒 新穀旣升의 몰(沒)은 다하는 것(盡)이고, 승(升)은 새 곡식이 올라오는 것(登)이다.  곡식의 순환, 즉 자연 현상이 일년을 주기로 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鑽燧改火의 찬(鑽)은 부싯돌이고, 수(燧)는 부싯돌로 불을 피울 때 쓰는 나무이다. 일년마다 새 불씨로 바꾼다는 뜻으로, 인간 생활도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로 일년을 주기로 순환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도(稻)는 쌀밥, 금(錦)은 비단옷이다. 의식(衣食) 중에서 제일 좋은 것이다.
  자공과 더불어 말을 잘하기로 소문난 재아가 나름대로의 근거를 내세우며 삼년상이 너무 기니까 일년상으로 단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재아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군자는 삼년상 기간 동안 부모의 무덤 앞에 초막을 짓고 오직 부모를 기리는 것 이외에 일체의 일을 삼간다. 그렇게 하여 삼 년 동안 예악(禮樂)을 방치한다면 마침내 예악은 붕괴하고 만다. 그것을 누가 책임진다는 말인가? 그리고 자연 현상도, 인간 생활도 일년을 주기로 순환하고 있다. 그러니 일년이면 족한 것이 아니냐고.
  공자는 재아의 말의 핵심을 찌른다. 거창한 논리로 변명하지 마라. 너는 삼년상 기간 동안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이 싫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군자가 삼년상 기간 동안 거친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초막에서 불편하게 지내는 것은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할 때 좋은 옷, 좋은 음식, 편안한 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네가 좋은 옷, 좋은 음식, 편안한 집이 그립거든 네 마음대로 그렇게 하라고. 말을 아끼는 공자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질책이다.
  재아가 문을 나서자 공자가 그에 대해 평하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 부모의 품속에서 자라다가 그 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삼 년이 지나서이다. 삼년상도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에 이르기까지 천하 만민에게 공통된 것이다. 재아도 부모의 품에서 삼 년 동안 사랑을 받았을 터인데, 그 부모의 은덕을 모르는 자라고.
  팔일 21, 옹야 24에서 보이는 것처럼 예의 재아의 말솜씨에 대해 공자가 꾸짖은 대목이다. 공야장 9에서 재아는 낮잠을 자다가 공자에게 썩은 나무로는 조각을 할 수 없고, 썩은 흙담에는 흙손질을 할 수 없으니, 너를 꾸짖어 봐야 무엇하겠느냐고 꾸중을 듣고 있다. 논어에 보이는 여러 제자들과의 문답 중에서 유독 재아에 대한 것만은 부정적인 것으로 일관되고 있다. 논어의 편찬자 중에 재아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진정 재아의 사람됨이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의 재아의 논리는 비록 공자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고 있지만 나름대로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삼 년 동안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부모를 기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자연 현상과 인간 세상의 순환 주기에 따라 일년으로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재아의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재아의 상례(喪禮)에 대한 입장은 현실적, 실리적이다. 이는 당시 시대 상황과도 일정하게 연관지을 수 있다. 공자의 시대는 전통의 혈연공동체가 붕괴되면서 사회적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 질서가 형성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이들 새로운 사회적 승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구래의 형식적인 의례는 오히려 자기들의 성장에 장애가 되는 질곡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이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느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입장이 현실적, 실리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아의 말이 혹시 그러한 사회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런지.  
  그러나 그러한 재아의 주장도 거친 옷, 거친 음식이 싫어 삼년상을 일년상으로 바꾸자고 한 것 아니냐는 공자의 날카로운 질문 앞에 결국 무너지고 만다. 오늘날의 입장에서 볼 때 삼년상이다, 일년상이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나를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를 얼마만큼 진정으로 기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삼 년이다, 일 년이다 하는 것은 그러한 애절한 마음을 담는 형식으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재아가 거친 음식, 거친 옷이 싫어 일년상을 주장하였다면 모처럼의 논리도 근본에서부터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 거기에 재아의 약점이 있다.
  청(淸)의 왕조진(王肇晉)은 『논어경정록(論語經正錄)』에서 공자가 재아가 물러난 이후에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에 대해 말한 것은, 그로 하여금 다시 한 번 더 전해 듣고 자기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공자가 사람을 대할 때 그 성실하고 두터운 정이 이와 같았다는 것이다. 꽤나 섬세한 분석이다.

22, 子曰 飽食終日 無所用心難矣哉. 不有博弈者乎. 爲之猶賢乎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하루종일 배불리 먹으면서 마음을 쓰는 데가 없다면 어려운 노릇이다. 장기나 바둑도 있지 않느냐? 그런 것이라도 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해설> 박혁(博弈)은 장기와 바둑이다.
  하루종일 아무 하는 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것보다는 장기나 바둑을 두면서 벗과 한가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다. 무위도식(無爲徒食)을 경계한 말이다.

23, 子路曰 君子尙勇乎. 子曰 君子義以爲上. 君子有勇而無義爲亂 小人有勇而無義爲盜.
  자로가 말하길 “군자도 용기를 숭상합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는 의(義)를 으뜸으로 여긴다. 군자가 용기만 있고 의가 없으면 난을 일으킨다. 소인이 용기만 있고 의가 없다면 도적이 되고 만다.”

  <해설> 용기는 항상 의(義)와 함께 한다. 신분이 높은 자가 용기는 있으면서도 의를 모른다면 나라에 난(亂)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신분이 낮은 자라면 도둑놈이나 깡패가 되기 쉽다.
 
  <참고> 위정 24에서는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없는 것이라 하였고, 태백 2에서는 용기가 예가 없으면 난폭해진다고 하였다. 또한 태백 10에서는 용기를 좋아하면서 가난을 싫어하면 난을 일으키며, 양화 8에서는 용기를 좋아하면서도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난폭함으로 나타난다고 하고 있다. 

24, 子貢曰 君子亦有惡乎. 子曰 有惡. 惡稱人之惡者. 惡居下流而訕上者. 惡勇而無禮者. 惡果敢而窒者. 曰 賜也 亦有惡乎. 惡徼以爲知者. 惡不孫以爲勇者. 惡訐以爲直者.
  자공이 말하길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미워하는 것이 있느니라. 남의 잘못을 떠들어대는 자를 미워하며,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을 비방하는 자를 미워하고, 용기만 있을 뿐 예의가 없는 자를 미워하며, 과감하면서도 앞뒤가 막힌 자를 미워한다.”
  말씀하시길 “사야,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느냐?”
  “남의 말을 가로채 아는 척하는 자를 미워하고, 불손한 것을 용기라고 하는 자를 미워하며, 남의 비밀을 폭로하는 것을 정직하다고 하는 자를 미워합니다.”
   
  <해설> 자공이 말하는 군자는 공자를 가리킨다. 오(惡)는 미워하는 것이다. 칭(稱)은 들어내 떠드는 것이다. 하류(下流)는 남의 아랫자리를 말한다. 청(淸)의 혜동(惠棟)은 『구경고의(九經古義)』에서 유(流)를 빼고 단순히 하(下)로만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장 20에 君子惡居下流라는 표현이 있어 전해지는 과정에서 착각한 것이라고 한다. 유보남(劉宝楠)을 비롯한 많은 청유(淸儒)들이 혜동의 견해에 찬성하고 있다. 산(訕)은 헐뜯는 것이다. 상(上)은 윗사람이다. 질(窒)은 앞뒤가 막힌 것이다. 요(徼)는 남의 말을 가로채는 것이고, 알(訐)은 남의 사사로운 비밀을 들추어내는 것이다.
  공자는 인간의 성품에 대해 선하다(性善), 악하다(性惡)고 선험적으로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논어에 나타난 공자의 언행으로 비추어 볼 때 공자는 인간의 가능성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는 항상 긍정적인 것에 대해 언급하였지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여기서는 미워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논어에서 드물게 보이는 대목이다.

25, 子曰 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近之則不孫 遠之則怨.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여자와 소인은 기르기 어렵다. 가까이하면 불손하게 굴고, 멀리하면 원망한다.”

  <해설> 생각하는 것이 비천한 사람은, 가까이 대해주면 할아버지 수염까지 뽑으려 들고, 조금만 멀리하면 토라져서 우는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야 커가면서 제대로 가르치면 차차 나아지지만, 생각이 비천한 사람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래서 다루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여자를 그 범주에 포함시킨 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어렵다. 공자 당시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을 확연히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26, 子曰 年四十而見惡焉 其終也已.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나이가 사십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해설> 나이 사십이면 불혹(不惑)의 나이다. 인생의 절정기이면서 또한 쇠퇴기에 접어드는 시점이다. 그 이후 더 이상의 발전은 기대하기 쉽지 않다. 따라서 나이가 사십이 되어서도 남에게 미움을 받는 인간이라면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인간이다. 원문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러한 뜻이나, 느닷없이 돌출된 말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주자는 소씨(蘇氏)를 인용하여 무슨 사연이 있어 나온 말이나,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하고 있다.
  청의 유월(兪樾)은 『군경평의(羣經平議)』에서 이 말을 공자가 자기 자신에 대해 한 말로 본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하면 공자가 제나라에 간 것은 나이 35세 때였다. 당시 제나라 임금이었던 경공(景公)이 공자를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재상인 안영(晏嬰)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그때의 공자 나이가 40 전후이었기 때문에, 공자가 이렇게 말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고증(考證)의 문제가 숙제가 될 것이다.   

  <참고> 자한 22에 나이가 사십, 오십이 되도록 세상에 이름이 없는 인간은 두려워 할 만한 대상이 못된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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