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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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 안정환
  • 승인 2018.07.30 0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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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안정환 / 연세대 의공학부 복학생




6년 전, 아직 고등학생일 때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문과는 돈을 포기하고, 이과는 돈과 친해진다.’ 친구들과 문과, 이과에 대해 말을 나눌 때면 늘 나오던 주제였다. 이과를 대표할 공대생들이 다루는 고급 수학의 기하학적인 공식들의 향연은 세상을 이롭고 풍요롭게 만들며 이들이 곧 발전의 중심이 될 거라는 내용들이었다. 반대로, 문과가 다루는 경제, 철학, 법, 사회와 같은 큰 개념은 미리 갖춰진 몇몇 뛰어난 소수만이 빛을 본다고 정리되곤 했다.
 
돌이켜보면 상당한 모순이 숨어있는 이야기지만 당시의 나는 성공과 부라는 물질적인 가치에 매몰돼 달리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학교 분위기, 선생님들의 이과 중심 서열매기기도, 당시 우리들에게 ‘문과는 굶어죽는 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꿈꾸는 미래의 나의 모습에 단연 철학이나 동양고전은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었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입대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 책을 많이 읽었다. 실무에 배치 받고 나서 한창 힘들 시기에 읽었던 책이 이승민의 <상처 받을 용기>였다. 등받이 없는 딱딱한 싸구려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1시간을 내리 집중하며 읽었었다. 그럴 즈음 나는 TV에 나오는 예쁜 아이돌의 모습보다, PX에서 선임이 사주는 치킨이나 피자 한 조각보다 책을 읽는 시간이 작은 위로가 되었다.
 
어쩌면 사람보다 책과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선임한테 혼이 난 후에 가볍게 <논어>나 <대학, 중용>을 집어 들고 내용을 무작위로 펼치면 적잖은 위로를 주는 글귀들은 많았다. 나는 그것들이 품고 있던 철학이 좋았다. 군대에서 잠시 접한 중용의 성실함과 불교의 무일물 같은 동양철학은 나를 쓰다듬고 더욱 강하게 단련시켰다.
 
전역을 하고 잠시 외국에 몇 달 체류도 해보고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면서 느꼈다. 필리핀에서 잠시 아르바이트를 할 즈음, 상사의 꾸지람과 동료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도 과거보다는 인내가 늘었으며, 사정이 여의치 않아 배를 굶더라도 쉽게 절망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지 않았다. 위인들의 글귀 몇 줄을 곱씹으면 이해되지 않고 이해하기 싫은 문제도 자연히 풀어지고 침착함을 되찾게 해주었다. 그들이 던진 화두들은 언제나 나를 깨어있게 했고, 타인을 대할 때도 좀 더 넉넉한 품을 내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철학을 온전히 현실에 대입시키기에는 일정 부분 필터링이 필요한 개념도 많았다.
 
복학생이 되면서 성공과 부에 대한 갈증은 현실로 환기되어 불안감을 가져왔다. 하지만 대학에서 들은 ‘동양철학사’는 잊고 있었던 군대에서의 나의 다짐과 위로를 복기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나의 마음먹기에 따라 대상이 달라진다는 불교의 일체유심조의 가르침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과거 외국에서 겪었던 일들에 대해 동료들보다 비교적 덤덤하게 받아들였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찾은 것 같다. 한국으로 돌아와 막막한 미래와 따라가기 힘든 공부에 지쳐갈 때 쯤 불교의 지혜를 되짚어 보았다.

장자는 성심을 해결할 자세가 ‘화이부동’이라고 말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조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조언이 아닐까 싶다. 서기(A.D) 전부터 현대까지도 우리는 서로의 이익이 달라서, 신념이 맞지 않아서 갈등하며 반목해 왔다.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것’이라는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이 새삼 가슴에 무겁게 와 닿는다. 우리들은 정녕 화이부동의 자세로 타인을 배려하고 조화로운 하나로 나아갈 수 있을까?
 
순자는 인간의 오감(천관)과 마음(천군)에도 폐단이 존재하며 이를 막기 위해 ‘허일정’과 ‘대청명’의 방법을 말했다. 오히려 이 부분에서 인간의 판단에 영원한 옳고 그름은 없다고 나는 보았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나오는 ‘정의’의 기준을 둘러싼 딜레마를 보았듯이, 지금 세상에도 떠도는 공정해보이되 한편으로 치우친 사상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일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단지 이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 아닐까 싶다.
 
고등학생이었던 6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10~20대 사이에서는 사람의 적성을 문과와 이과로 나누어 앞날을 점쳐보려는 문화는 남아있다. 물질적인 것이 성공의 지표가 되는 사회에서 뜬구름 잡는 소리로 가득한 철학이 ‘굶어 죽는’ 학문으로 비추어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우리는 이성과 감성이 존재하는 생물이며 자본주의의 자원으로는 결코 어느 한 쪽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정 부분, 철학은 우리들의 천군을 단단하게 해줄 것이며 안목의 유연함을 키워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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