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기억, 하얀 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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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기억, 하얀 샌들
  • 은옥주
  • 승인 2018.08.14 0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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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선택에 대한 존중 - 은옥주 / 공감미술치료센터 소장



딸네 가족과 같이 밥을 먹은 뒤, 돌돌이 여름옷을 사기로 했다. 아동복 코너는 앙증맞은 옷들이 가득했다. 우선 내 맘에 드는 티셔츠를 몇 개 골라 들었다.

“아 이거 멋지다. 이거 어때 돌돌아.”

돌돌이는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휙 지나가 버렸다.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이었다. 또 다른 코너에도 내 마음에 드는 것이 있어 권해 보았지만, 여전히 같은 반응이었다.

“돌돌아, 어떤 티셔츠 사고 싶어? 말해봐.”

“응 할머니, 우주 그림이 있는 것 사고 싶어. 우주선이랑 우주선 발사대랑, 목성이랑, 토성이랑…….”





돌돌이는 요즈음 우주 관측소에 다녀오더니, 꿈이 우주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블록으로 우주관측소, 우주정거장, 우주 발사대 등 우주에 관한 것만 만들고 있다. 그림책도 우주가 그려진 것을 사서 열심히 보고 온통 그 주제에 빠져있다. 우리는 아동복 매장 전체를 뒤지며, 우주와 관련된 그림을 찾으려고 애썼다.

내 마음속에는 ‘5살짜리 꼬맹이의 취향을 이렇게까지 들어주어야 하나’라는 약간의 갈등과 짜증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절대로 입지 않는 고집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하는 마음으로 발품을 팔았다. 매장 아주머니들이 안쓰러워했다.

“아이구, 어쩌나! 우주를 하나 그려 줄 수도 없고…….”

온 가족이 흩어져 찾다가 드디어 우주선이 그려진 티셔츠 2개를 찾아냈다. 돌돌이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게 제일 좋아. 이것 사주세요. 할머니.”

 



단번에 승낙을 받은 우리는 큰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반가워하며 쇼핑을 마무리했다. 돌돌이의 손을 잡고 내려오면서 문득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7살 쯤 되었을 때, 엄마는 내 구두를 사주겠다고 양키시장 신발가게에 갔다. 그 당시는 물자가 귀해서 내 발사이즈에 맞는 구두가 딱 2개 밖에 없었다. 1개는 얄상하고 예쁜 흰색 샌들이었고, 또 하나는 랜드로버 같은 갈색 구두였었다. 나는 흰색 샌들에 보는 순간 마음이 빼앗겨 버렸다.


“엄마, 이거 예쁘다. 이것 사 줘.”

엄마는 구두를 찬찬히 보더니 두 말 않고 랜드로버를 샀다.

“엄마, 그것 말고 이것 사 줘. 이게 더 예뻐.”

다급하게 호소했지만 엄마는 들은 척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사서 나에게 선물을 주었다. 흰색 샌들이 눈앞에 아른아른해서 억지로 며칠 신다가 구석에 쳐 박아 두고 신지도 않았다.

지금도 구두의 디자인까지 또렷이 기억이 나는 걸 보면, 내 의견을 무시하는 엄마가 미웠고 사준 구두까지 싫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랜드로버가 실용성이 있어서 사 준 이유가 이해되지만 내 의견이 묵살당하는 거절감을 크게 느꼈던 것 같다.

이어서 또 한 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5살 된 딸아이와 부평시장에 구두를 사러갔다. 흰색에 조그만 비즈가 박힌 세련되고 심플한 샌들이 눈에 들어와 그것을 점찍었다. 얼른 가격을 물어보는 동안, 딸은 자기 마음에 든 샌들 한 개를 들고 왔다.

“엄마, 이거 예쁘다. 정말 예쁘다.”

아이는 그 신발이 마음에 들어 어쩔 줄 몰라 했다. 그것은 총 천연색으로 된 알록달록한 샌들이었다.

“이건 너무 촌스럽다. 하얀 걸로 사자.”

딸은 자기가 고른 샌들을 꼭 잡고 놓지 않았다.

“엄마, 이게 좋아. 이것 살래.”

나는 딸이 집은 샌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아, 달래고 달래서 하얀 샌들을 샀다. 딸은 시무룩하게 내가 사 준 신발을 며칠 신더니 결국은 신지 않았다. 그리고는 부평시장 옷가게 옆을 지나갈 때면 눈을 황홀한 듯 반짝이며 층층이 총 천연색으로 만든 피에로 옷 같은 원피스를 사고 싶어 했다.

“엄마, 이거 너무 촌스럽다. 이것 사줘.”

아이는 자기 눈에 예쁜 것을 촌스러운 것으로 알아들었는지 학용품도 마음에 들면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 달라고했다.

“엄마, 이거 너~무 촌스럽다. 이것 살래.”

나는 내 엄마와 마찬가지로 아이의 선택을 무시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때 사준 하얀 샌들은 엄마가 나에게 사주지 않았던 그 하얀 샌들과 디자인과 색깔이 딱 일치했다.

내 오래된 좌절된 욕구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해서 내 눈에 그 하얀 샌들이 딱 마음에 들었고, 나는 내 욕구를 풀었던 셈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엄마에게 배운 양육방식을 내 자식들에게 사용하고 있었구나.’하고 생각하니 잠깐 미안하기도하고 씁쓸하기도 했다. 부모의 양육방식은 아이들의 뇌리에 깊이 스며들어 학습된 것들을 현실에서 그대로 사용하게 되니, 부모의 양육방식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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