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의 흔적을 쫓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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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산의 흔적을 쫓아서
  • 이김건우
  • 승인 2018.09.03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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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이김건우 / 서울시립대 2학년

광주기의열사능원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고등학생 때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아리랑』을 집었다. 그때는 이 책을 몇 번이나 다시 읽고, 다른 이들에게 권하고, 책에 담긴 김산의 흔적을 찾아가기까지 할지 전혀 몰랐다. 지난 8월 15일,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한 독립대장정에 참가하였다. 임시정부 후반기의 여정을 뒤따라가면서 김산을 비롯한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던 광저우에도 잠시 들릴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내 삶의 이정표가 될 『아리랑』의 김산 선생님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출발하는 날,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옆에 앉은 형이 깨울 엄두가 안 날 정도로 잘 잤다고 한다. 항상 운 좋게 창가 자리에 앉지만 소용없다. 만날 이착륙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리니 말이다. 이륙도 전에 잠들었다가 기내식을 먹어야 해서 깼다. 일어나니 상해 항공을 지나고 있었다.

 

  100년 전, 김산 선생님 역시 상해에 이르렀다. 만16세의 김산에게 상해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두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미 조선에서 삼일운동, 짧은 동경유학, 신흥무관학교 3개월 코스를 지나 상해를 맞이하였으니 두렵지 않을 법하다. 그는 정치학을 공부하고, 조선인의 정치운동에 합류하고자 만주를 떠나 상해로 왔다.

 

  김산 선생님은 상해에서 굵직굵직한 독립운동가들과 어울려 지냈다. 소학교 시절 우상이었던 이동휘 장군과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안창호 선생까지. 특히 안창호 선생님의 댁은 매일같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안창호 선생님 역시 10대의 김산을 기특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그는 김산이 좋은 학교에서 더 교육받을 수 있도록 손을 써 주었다.

 

   그는 1921년 톈진에 있는 남개대학에서 장학생으로 잠시 공부하다가,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  1925년 광저우로 향한다. 왜냐하면 1924년 1차 국공합작이 타결된 후 광저우가 중국혁명의 중심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를 비롯한 많은 조선인들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조선독립으로 이어지리라고 생각하였다. 중국혁명을 목표로 하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북쪽의 군벌을 토벌하고 나면 자연스레 조선으로 들어가 독립전쟁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은 조선인들이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에 입학하여 중국혁명에 이바지하고자 하였다.

 

  김산 선생님께서 교편을 잡으셨던 중산대학 앞에서 담뱃불을 붙였다. 그새 또 담배를 피우냐고 옆 사람들이 핀잔주었지만, 나는 당당히 대꾸하였다. "김산 선생님도, 이육사 선생님도 이 앞에서 피우셨을 거 아니에요!" 이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사람들은 수긍하며 말을 덧붙였다. "김원봉 선생님도 여기서 한 대 피우셨겠죠? 피우시면서 무슨 생각하셨을까?" 이런 말들이 오가면서 사람들도 하나 둘 담배를 꺼내 물었다.

 

  김산 선생님은 수업을 마치고 나와서 이 앞에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국공합작 이후 독립운동의 큰 그림을 다시 그리며 자신은 어느 퍼즐조각을 맞출지 고민하지 않으셨을까. 지금도 많은 사회활동가들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김산 선생님이 그렸던 큰 그림도 얼마 가지 않아 무너졌을 것이다. 1927년 장개석의 쿠데타로 1차 국공합작이 깨지고, 정권을 잡은 장개석이 공산주의자를 무자비하게 숙청했기 때문이다.

 

  김산 선생님이 계셨던 광저우에는 4월 15일부터 숙청이 시작되었다. 숙청이 계속되던 18일 김산 선생은 형장으로 끌려가던 3명의 청년을 마주한다. 이들 사이에 16살에 까만 단발을 한 나유매가 있었다. 그녀는 총파업에 참가해 유인물을 배포했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세 사람은 모두 냉정하였다.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죽음을 향한 두려움은 아니었으리라.” 그들은 총살되기 직전 그들의 구호를 높이 외쳤다.

 

  그러나 총알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들은 구호를 마치지 못 했다. 쓰러진 나유매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고, 이 눈물방울에는 김산 선생의 모습이 비쳤다. 김산 선생은 울먹이며, 그리고 나지막이 그들의 구호를 끝맺었다. 숙소로 돌아와서도 김산 선생은 이 모습을 잊지 못 했다. 쓰러진 동지들을 추모하기 위해 “동교장의 휴머니티”라는 시 한 편을 쓴다. 그리고 12월, 김산 선생은 광저우봉기를 통해 휴머니티를 이어간다.

 

  12월 10일 밤, 광저우에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당군이 분열하고 있는 틈을 타 봉기를 일으킨다. 봉기가 성공하고 첫 집회에서 김산은 몇 달 전 처형당한 이들의 구호를 다시금 외쳤다.

 

  광주기의열사능원에 있는 중조인민혈의정 앞에서 이 구절을 다시 읽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총과 펜을 쥐었던 김산 선생은 어떤 감정이었을지 생각하였다. 옆에 있던 형은 왜 여기를 들렸는지 처음에는 의아했다고 했다. 조선이면 북한일 테고 다 공산주의자들이 했던 일인데 왜 우리가 여기를 들려서 추모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동행했던 선생님들께서는 지금의 이념에 갇혀서 역사를 보지 말고,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왜 이 길을 택했는지 봐야한다고 말씀해주셨다. 이 말씀을 듣고 다함께 『아리랑』을 듣고 사진을 찍었다.

 

  동행했던 선생님께서 “역사는 인간이 우연을 만나 필연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씀하셨다. 열 몇 살 먹은 소년이 우연히 3.1운동을 만나 낭만주의, 무정부주의를 거쳐 공산주의자로써 중국혁명과 한국독립운동에 투신한 김산, 그리고 김산의 『아리랑』을 우연히 접해 100년 전 그의 생각과 감정을 되새김질하며 삶의 이정표로 삼은 나. 모두 우연을 만나 필연으로 만들고 있다. 이번 독립대장정을 통해서 수많은 우연들을 만나서 결국에는 역사가 되는 삶을 살리라고 다시금 다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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