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그 공감적인 직관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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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그 공감적인 직관으로
  • 정민나
  • 승인 2018.10.05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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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정민나 / 시인



 

   얼마 전 나는 원주 ‘메지호수’가를 걷고 있었다. 오래 전 혼자가 된 언니와 모처럼 원주로 일일 여행을 떠난 날이다. 이 때 우연히 아들을 잃어버린 슬픈 엄마를 만났다. 하루아침에 장대 같은 아들을 잃은 엄마는 처음에 잣나무와 소나무, 단풍나무 잎사귀를 들고서 우리에게 다가왔다.

 

   두 개 묶여 있으면 토종 소나무, 세 개 묶여 있으면 니기다, 다섯 개는 잣나무라고 밝히는 엄마의 표정은 밝은 편인데 목소리는 살짝 가라앉아 있다. “왜 묶인 나무들만 이야기 하느냐? 잎이 다섯 개로 펴지면 고로쇠, 일곱 개로 젖혀지면 단풍나무, 아홉 개로 벌어지는 단단풍 나무도 있다”라고 말하자 인사 대신 반갑게 우리 손을 잡는다.

   
   그녀는 시종 웃는 얼굴이다. 어느새 목소리 또한 가벼운 공기층을 웃돌고 있다. 하지만 반짝이는 호수를 바라보다 말고, 평화로운 새들의 노래를 듣다 말고 그녀는 문득 멈춰 서서 아들 이야기를 하곤 한다.

   
   “가족이나 친지들에게 명랑한 아이였어요. 최근 학교에서는 어땠을까 학우들에게 찾아가 묻고 싶어요.” “그녀 입 속에서 오래 뒤척이”는 것은 단지 잃어버린 그의 아들이었다. 공부를 마치고 장시간 탑승한 비행기에 내렸을 때 뭉쳐있던 혈전이 그의 숨구멍을 막았다고 한다. 기회만 있으면 울컥 밀고 올라오는 것이 있는데 그녀는 그 뜨거운 것을 삼킬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도 그녀는 씩씩하게 걷고, 웃고, 말한다. 조금만 일찍 응급치료를 했더라면 살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하니 그녀의 밝은 얼굴 이면에 가시지 않는 어미의 안타까운 심정을 읽을 수 있다.  

 

   칼 포퍼는 《생각의 탄생》에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해 “새로운 이해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감정이입은 ‘공감적인 직관’으로 이는 “문제 속으로 들어가 그 문제의 일부”가 된다는 것이다.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어린아이처럼 무의식적 기억들을 털어놓는 슬픈 엄마에게 오늘 나는 시인 라희덕의 「삼킬 수 없는 것들」 이란 시를 들려주고 싶다.

 

   내 친구 미선이는 언어치료사다

   얼마 전 그녀가 틈틈이 번역한 책을 보내왔다

   「삼킴 장애의 평가와 치료」

 

   희덕아, 삼켜야만 하는 것, 삼켜지지

   않는 것, 삼킨 후에도 울컥

   올라오는 것… 여러 가지지만

   그래도 삼킬 수 있음에 늘 감사하자. 미선.

 

   입 속에서 오래 뒤척이다가

   간신히 삼켜져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것.

   기회만 있으면 울컥 밀고 올라와

   고통스러운 기억의 짐승으로 만들어버리는 것.

 

   삼킬 수 없는 물, 삼킬 수 없는 가시, 삼킬 수 없는 사랑,

   삼킬 수 없는 분노, 삼킬 수 없는 어떤 슬픔,

   이런 것들로 흥건한 입 속을

   아무에게도 열어 보일 수 없게 된 우리는

   삼킴 장애의 종류가 조금 다를 뿐이다

                               ━ 나희덕,  「삼킬 수 없는 것들」 부분

 

   슬픈 엄마는 관절염이 도졌다고 내리막길에서 서슴없이 도움의 팔을 내민다. “원주 굽이길은 가을이면 은행나무가 아름답기는 한데 은행이 떨어지면 냄새가 나. 그럼 뭐 비켜 가면 돼지…….” 상심의 물기가 아직 다 빠져 나가지 않았는지 그녀 몸은 무겁다. 어린아이처럼 타인에게 몸과 마음을 내맡기는 그녀에게도 ‘삼킴 장애’라는 것이 있는 것일까? 내가 보기에 “삼켜지지 않는 것, 삼킨 후에 울컥 올라오는” 그 무엇이 그녀에게도 있다. 그녀가 메지 호수길을 찾아온 것은 지금은 없는 과거의 화원을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막혀있는 공간을 벗어나 실제로 바람이 일고 향기가 이는 그녀만의 화원을 느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비밀에게 / 화원이 없다면 세계의 질서는 어디서 살까 // 비빌도 언젠가 죽긴 죽나? 사람처럼 다음의 / 생을 받고 싶어 하나? // 여기서의 다음의 생이란 / 저를 벗어버린 순간! 받게 되는 다름인가? // 저의 돌발 상황을 돌보는 자세? 아무튼 훌쩍 / 커버린 꽃의 이름을 한 번씩 몰래 불러 / 바라보긴 하나? // 힘센 비밀일수록 수명이 길까? / 여기서의 수명이란 // 책상 위의 깨알 메모와 문자와 음성을 / 확 밀어버리며 / 너 따위들이 뭔데! 분개하면서 제 팔다리마저 / 부정하는 그 부정정신 말인가? // 잠깐만요 당신 / 누구야? 왜 날 붙들고 질문하나? / 왜 우나? 억지에게 / 또 눈 뜨고 당할까봐서죠! 걱정마 / 이번만은 모두 다 봤잖아? // 내 안의 질서도 / 나의 소소한 저녁들을 어서 밝히라며 / 으름장을 놓을 것이지만

                      박라연, 「비밀의 화원」 전문 (『시로 여는 세상』, 2017. 가을)

 

   함께 동행한 나의 언니도 아이들이 서너 살 때 남편을 잃었다. 원인은 격무에 의한 과로사였다. 그녀 나이 삼십 중반에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청상과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이들이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자는 비밀스런 이미지가 덧붙여지기 일쑤이다. 그러하기에 그녀 역시 유혹의 손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행히 돌보아야 할 화원이 있었다. 아이들이었다. 사시사철 화원에 물주고 가꾸느라 따로 “돌발 상황을 돌보는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아니 적어도 나에겐 그렇게 보였다.

   한사코 생의 질서를 흩뜨리지 않던 그녀는 아이들이 모두 성장하여 출가를 하자 문득 꽃을 들여다보곤 한다. 화원을 돌보느라 정작 한 번도 몰래 불러 바라본 적 없던 자신만의 꽃들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꽃은 마음이 아프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데 깜박깜박 이상 징후가 나타나는 것이다.

   힘센 비밀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화원을 만드는 동안 생성된 세계의 질서가 정작 화원이 완성된 후에 흔들리는 순환의 이치. 비밀은 때때로 불가사의하게 혹은 아이러니하게 이렇듯 배반의 얼굴로 다가온다.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국에 짓밟힌 은행알과 그것들이 남기는 악취처럼 아름다운 은행나무 길에서 슬픈 엄마는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꽃은 지고 ‘없음’이란 인식으로 그녀의 화원이 지속될 때, 그녀 세계에 질서를 생성하던 꽃들은 단지 닫힌 폴더 안에서 싱그럽게 웃고 있는 것처럼.

   

   삼킬 수 없는 것들은

   삼킬 수 없을 만한 것들이니 삼키지 말자.

   그래도 토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음에 감사하자.

                                    ━ 나희덕,  「삼킬 수 없는 것들」 부분

 

   현실적이든 관념적이든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뜻밖의 일을 겪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간혹 인간이 진심으로 저의 돌발 상황을 돌보는 것은 그냥 놓아 버리는 것일 수 있다. 그녀가 기억이라는 덧없는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널 때, 무의식적으로 위기의식을 느낄 때 그리스 철학에서 말하는 피시스(physis). 자연의 본성을 따르는 것. 스스로 자(自), 그러할 연(然). 저절로 이루어지는 모든 상태 속에 순수하게 현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체할 수 없는 힘센 비밀 앞에서 그녀는 스스로 살고자 했음일까. 시(자연)를 만나기 위해서 오늘 그녀는 비밀의 화원에 산책을 나온 것이다. 나와서 자기 세포 하나하나에 간직된 어두운 기억들을 떼어내 허물을 벗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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