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엔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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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엔의 가치'
  • 한인경
  • 승인 2018.10.25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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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백엔의 사랑』


<한인경의 시네공간>은 2016년에는 그해 상영된 독립영화들을, 2017년부터 현재까지 ‘다시 주목하는 영화’라는 테마로 평론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는 이미지 너머로 발견하는 한 권의 철학서와 같다. 우리는 그 속에서 힐링하고 비상하며 철학적 사유로 삶의 의미를 읽는다.


다시 주목하는 영화
『백엔의 사랑 百円の戀, 100 Yen Love』

- '백엔의 가치'
 
개  봉 : 2016.06.16(113분/일본)
감  독 : 타케 마사하루
출  연 : 안도 사쿠라, 아라이 히로후미, 이니가와 미요코
장  르 : 드라마, 멜로/로맨스                      
등  급 : 청소년 관람불가



출처:영화『백엔의 사랑』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SF, 멜로, 공포, 코미디, 범죄, 스포츠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만들어 지고 있을 것이다. 개봉되는 모든 영화를 감상할 수는 없지만, 선보여지고 있는 영화들에는 어떤 형태로든 끈끈한 삶이 녹아 있다. 영화를 찾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다.

오늘은, 그저 그런 한 사람, 지나가다 눈이 마주쳐도 마치 투명 인간 같은 사람, 투박하지만 솔직한 민낯을 보여주는 영화 이야기다. 고단한 처마 아래를 슬쩍 들여다보면 꼭 만날 듯한 ‘이치코’를 소개한다. 주인공이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성공했고, 그래서 꽃길 인생이 보장됐다는 스토리, 역경을 딛고 대회에 나가 우승을 한다는 작위적인 감동의 뻔한 결말이 아니다. 보통 사람의 소박한 도전과 노력, 약간의 기대, 포기에 대한 치열한 이야기다. 씁쓸하지만 또 그저 그렇게 흘러가는 부초 같은 이웃의 이야기다.


주인공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이렇다.
32세, 전문대 졸업 후 주로 집에서 조카와 게임을 즐김. 부스스한 긴 머리, 입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난다고 치료받으라는 어머니의 걱정에도 여자이길 포기했다며 무시, 늘어지고 큼지막한 바지와 티셔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 허구한 날 피어대는 담배. 부모로부터 독립 후 100엔 샵 심야 아르바이트로 취직, 평생 연애 한 번 못 해봤는데 직원 중 이혼하고 혼자 사는 띠동갑 동료로부터 강간당함, 그저 그런 가난한 복서 카노(아라이 히로후미)와 가깝게 지내는 듯했으나 그가 두부 파는 여자와 눈이 맞으면서 헤어짐. 애인 카노의 배신으로 권투에 집중하면서 상황이 바뀌는듯하나 사이다 급의 반전은 엔딩까지 없음.



출처:영화『백엔의 사랑』


이치코 주변은 이렇다.
자그마한 도시락 가게 운영 중인 어머니, 다른 직업도 존재감도 없는 아버지, 이혼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여동생과 학교에서 왕따 당하고 있는 조카, 여동생과는 물과 기름으로 자주 싸우고 급기야는 식탁을 뒤집고 난타전까지. 백엔 샵에서 발생되는 유통기한 지난 상품들을 점장 몰래 챙겨 가곤 하는 약간 정신 이상한 여자, 18시간의 고된 노동, 우울증까지 와서 퇴사 당한 백엔 샵 점장.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이치코의 일상을 굳이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로 가두며 영화를 열어 가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감독은 부모와 함께 살면서 보여준 이치코의 모습을 거의 히키코모리와 가깝게 부각하고 있다.



출처:영화『백엔의 사랑』


“은둔형 외톨이, 얼마나 아시나요”(경향신문, 2018년 10월 20일) 라는 기사. 기사 내용 중에서 여인중 동남신경정신과 원장은 은둔형 외톨이는 범죄와 같은 반사회적 행동을 일삼는 반사회적 외톨이와 명확하게 구분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은둔하는 외톨이들이 각각 다른 상황과 이유를 복합적으로 갖고 있는데 그걸 뭉뚱그려 반사회적 행동과 결부시키는 건 오히려 문제를 더욱 심화시키는 꼴”이라고 말했다. 또한 대체로 최소한의 사회적 접촉 없이 3개월(일본의 경우 6개월) 이상 집 안에만 머무르면서 외부 활동이나 인간관계를 피하고, 자신의 은둔 상태에 불안감이나 초조감을 느끼고 있는 경우를 은둔형 외톨이로 본다고 말하고 있다.

은둔형 외톨이들의 고여 있는 일상은 가족에게도 고통을 주고 이치코의 경우처럼 자주 평화를 깨는 충돌이 있곤 한다. 자존감이라고는 1도 찾아볼 수 없는 이치코는 비슷한 힘든 시간을 겪어 내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상념을 동시에 줄 것으로 생각된다.

단, 구분 짓는다. 사회가 갈수록 세분화되고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회에 실망하여 스스로 은둔을 선택한 사람, 업무 특성상, 개인 사정상 재택 근무를 택한 사람, 완전히 편향된 생활을 아니나 성격상 혼자 있는 것이 편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혼족’이 늘어나는 세태를 반영해 볼 때 각자의 생활이 외톨이 아닌 외톨이 즉, 자발적 외톨이가 되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인생, 어떻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 정답이란 것이 있을까. 어쨌든 상식선에서 이치코 일상은 추측할 수 있다. 이치코 본인만을 봐도, 그 주위를 둘러봐도 출구 없는 인생 미로 같고 뾰족한 답이 없어 보인다. 사방이 막힌 이치코가 조심스럽게 택한 탈출구는 권투. 그러나 감독은 여전히 뭔가 결의를 보이진 않은 채로 복싱 짐의 회원이 되는 이치코를 보여준다. 복서로서의 시간이 확실한 전환점이 되지 못할 것이라 읽히는 장면이다. 영화 구성상 음지에 있는 주인공이 권투를 배우기 시작하면 그는 뼈를 깎는 듯한 모진 훈련을 이겨내고 결국엔 당당히 승리할 것이라는 전개를 예상할 수 있다.


 
출처:영화『백엔의 사랑』


이치코는 본인의 무기였던 레프트훅을 가하긴 했으나 첫 시합에서 패한다. 경기 후 비록 벌에 쏘인 얼굴처럼 퉁퉁 부었고 피를 흘리고 있었지만, 상대 선수의 어깨를 두드리는 파이팅을 보인다. 이치코는 왜 하필 권투를 하냐는 카노의 질문에 한 번은 꼭 이겨 보고 싶었다며 비원(悲願)을 쏟아낸다.

“그냥 한 번은 꼭 해보고 싶었어.”

필자에게 산뜻하게 기억되고 있는 영화 중에서 ‘델타 보이즈(2017)’, 4명의 순수 청년들이 오버랩 된다. 영화 카피처럼 ‘그냥 좋아서 한다’는. 돈, 명예, 권력, 열정 어느 것 하나 내세울 것 없었던 30대 후반 청년들의 중창단 대회 도전기, 우주 대스타를 꿈꾸는 동기가 순수하다. 낡은 옥상에 모여서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보이는 연습 장면은 오히려 신선해 보였다. 고봉수 감독은 “나 같이 무능한 놈은 안 돼? 가슴 뛰는 일, 그런 일 딱 한 번만 하면서 살고 싶은데, 안 되는 거냐?” 라는 의도로 제작했다고 한다. 이치코가 권투로 한번 이겨보고 싶었고 시합이 끝나면 링 위의 상대 선수 어깨를 두드려 주는 장면을 그려 본 것뿐이었다는 고백과 맥이 통하는 부분이다.

작곡가 박진영의 ‘B급 인생’이란 제목의 곡이 있다. ‘답답한 내 맘보다 더 답답해하는 내 주위의 사람들의 표정보다 나까지 지쳐가죠. 언젠가 내 안에 있는 내 특별함을 찾아내 보여줄 날이 있을까요? 마음에 얼마 남지 않은 내 꿈을 다 잃기 전에 나에게 빛이 비칠 수 있을까요? 라는 가사가 귀에 들어온다.

거창한 이유가 필요 없다. 좁은 방에서 가족들의 한숨 섞인 걱정을 들어가면서 하루 종일 게임에 빠져 있고, 눈칫밥에 습관적으로 식탁 위 반찬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마치 식충 같은 인생을 살고픈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인생 고달픈 마이너들이 조심스럽게 꾸는 꿈이다. 화려한 내일, 미래를 그려 볼 수 없는 현실에 그저 한번 해보고 싶었다는 것. 그들의 바람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최고의 순간을 만들어간다. 그중 한 사람 이치코도 금메달만, 1등만을 알아주는 사회에서 시원한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

사회는 그래도 살만하다고 위로받기도 하지만 또 가끔 차갑고도 객관적이다. 감독이 만들어가는 영화 속에서도 이치코가 처해있는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다. 영화 거의 종료 즈음, 이치코에겐 허술하기만 했던 애인 카노가 다시 찾아오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가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그리 견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충분히 그려진다.



출처:영화『백엔의 사랑』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함 역시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지만, 상영 시간이 지날수록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 제39회 일본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과 각본상, 제1회 마츠다유사쿠상에서 대상을 거머쥐며 저력을 과시한 영화다.

모든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아주 미세한 빛을 남겨 두었다. 이치코의 비둔했던 몸은 권투에 올인하면서 나는 듯 가벼워진 스텝을 보여 주며 날렵해졌고 초점 잃은 듯했던 눈빛에는 미약하지만, 표정까지 갖췄다. 이 변화는 음지, 포기, 은둔, 외톨이, 두려움으로부터 세상을 향한 아주 작은 외침, 존재감, 꿈과 자연스럽게 대비를 이룬다.

백엔 사랑도 그들에겐 느끼고픈 설렘이며 백엔 인생도 꿈이 있으며, 행복한 과정과 결과도 맛볼 수 있다. ‘백엔’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액수이며, 스스로가 부여해가는 아름답고 절대적 인생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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