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동 세대’의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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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동 세대’의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 20년
  • 이김건우
  • 승인 2018.11.05 0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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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이김건우 / 서울시립대 2학년

 

1999년 10월 30일, 인현동에서 큰 불이 났다. 이 날, 막 돌을 넘긴 나는 인현동과 그리 멀지 않은 집에서 칭얼대며 엄마를 괴롭히고 있었을 것이다. 그 날 큰 불로 100명이 넘는 중고등학생이 죽고 다쳤다. 이 참사를 보면서 어머니는 많이 불안해하셨을 터이다. 아들이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어 비슷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셨을 테니 말이다.

 

엄마가 인현동 화재 참사에 대해 자세히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참사에 대한 엄마의 기억은 내 10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는 엄마에게 나는 ‘엄마는 걱정이 지나치게 많다’고 항상 툴툴거렸다. 한 번은 내가 크게 불평하자, ‘너 태어났을 즈음 동인천에서 큰 불이 나서 지금 너 만한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며 ‘그러니 내가 안 불안하겠냐.’고 이야기하셨다.

 

인현동 화재 참사에 대해 희미하면서도 짙은 기억은 우리 집뿐만이 아니었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내 또래도 집에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참사에 대해서 부모님께 들은 적은 없다. 내 친구들도 청소년기의 삶에 참사의 영향을 받았지만 참사에 관해 들은 적은 없는 ‘인현동 세대’였다.

 

인현동 화재 참사의 영향은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학교 축제를 크게, 또 저녁 늦게까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 했다. 실제로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 중고등학교 축제의 규모는 축소되었다. 항상 축제는 ‘재미없지만 형식상 해야 하는 것’이었다. 한 번은 학교 축제를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고 저녁 늦게까지 다른 학교 친구들을 불러서 놀자고 작당 모의한 적이 있었다. 다행히 학생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긴 했지만 학교의 큰 반발로 그 이후로는 ‘재밌는 축제’를 할 수 없었다.

 

사실 청소년이 밤늦게 돌아다니지 못 하게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게 규제하는 일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인현동 화재 참사 이후, 청소년이 여가와 문화를 향유할 환경의 부재가 참사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렇다면 청소년이 놀지 못하게 억압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놀 거리를 개발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다 밤늦게 돌아다녀도 안전한 환경을 만드는 작업이 우선이어야 한다. 그러나 더 우선이어야 할 일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가 모두 그랬다. 청소년의 새로운 문화생활이 사람들 입에 오르면 “아니 어린 애들이…”라는 말들이 뒤따른다. ‘인현동 세대’ 그리고 그 이후 청소년들은 여전히 참사의 원인이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현동 화재 참사 15년 후, 또 다시 수많은 고등학생들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있었다. 세월호 참사였다. 고등학생이었던 우리에게 세월호 참사는 큰 충격이었고 또 공포였다. 모든 학교에서 “세월호를 다음번에 우리가 타고 가려고 했다더라.”, “원래 옆 학교에서 세월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기로 했었다더라.”는 ‘카더라’가 떠돌았다. 희생자의 자리에 우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우리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에 진위도 알 수 없는 소문이 떠돌았던 것이다.

 

세월호 참사의 모습은 인현동 화재 참사와 많이 닮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라’고 방송하고 몰래 탈출한 선장, 학생들에게는 돈 내고 나가라며 문을 걸어 잠그고 탈출했던 사장. ‘공부 못 하는 애’들이 놀러가다 죽었다고 희생자들을 욕보였던 정치인들, 애들이 술 먹다가 죽었다고 희생자들을 ‘날라리’로 몰았던 언론. 생명보다 이윤을 중시하는 작태, 청소년을 통제해야 하는 객체로만 보는 시점은 15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았다. 1999년 인현동 화재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렇게 나의 아동·청소년기의 시작과 끝에는 나였을 수도 있다는 불안과 공포를 안겨준 사건들이 서 있었다.

 

작년에서야 ‘내가 태어날 즈음에 있었던 큰 불’이 ‘인현동 화재 참사’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부끄러웠다. 어머니가 20년 동안 나를 키우면서 불안케 했던 일이 무엇이었는지 왜 이제야 알았을까. 청소년 인권에 관심이 많아 이것저것 하고 다녔지만 왜 나는 ‘청소년인권 사건’이었던 이 참사를 알지 못했을까. 20년 가까이 희생자의 어머님과 아버님들이 아파고 계셨음을 왜 모르고 있었을까.

 

인현동 화재 참사 19주기 전 날이었던 29일 밤, 학생문화회관 뒤켠에 있는 추모비 앞을 찾았다. 추모제를 마치고 아버님들과 술을 마셨다. 좀 많이 마셨다. 생각이 복잡해서. 아버님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 참사를 알지 못 하고 있음에 속상해하셨다. 20주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 수 있도록 열심히 알리겠다고 약속드리고 집에 가는 택시에 탔다.

 

택시를 타고 집에 가면서 ‘인현동 세대’들은 참사를 어떻게 기억해야 하며, 또 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무엇을 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먼저 청소년 인권의 관점으로 참사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 특히 참사 이후 인천에서 자란 나와 같은 ‘인현동 세대’에게 20년 전 이런 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 참사가 반복되지 않고 청소년이 주체인 사회를 만드는 작업은 인현동 화재 참사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될 테니 말이다.

 

20주기에는 ‘인현동 화재 참사 추모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길 소망한다. 또 20주기 추모제에는 ‘높은 분’들이 많이 오셔서 희생자 유가족을 위로해주셨으면 좋겠다. 또 이 참사를 청소년인권 사건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청소년 포럼이 열렸으면 좋겠다. 추모와 기억이 꾸준히 이어지면서 청소년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문화를 향유할 수 있고 부모님들은 안심할 수 있는 인천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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