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어줄께, 지켜줄 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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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 있어줄께, 지켜줄 께
  • 박교연
  • 승인 2018.11.27 05: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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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널' 활동가



지난 10월 11일, 10년 만에 여성감독 여성주연의 영화 ‘미쓰백’이 개봉했다. 적은 제작비 탓인지 상영관도 많이 없었고, 입소문도 크게 나지 않아 출발이 좋지 않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나온 여성중심 콘텐츠라, 이게 망하면 앞으로 10년 동안 여성서사가 또 없을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여성들 사이에 들불처럼 번졌다. 그래서 너도 나도 #미쓰백_지켜줄게 해시태그를 달고 ‘영혼보내기’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상영시간이 좋지 않아 직접 관람은 못하지만, 영혼이라도 가서 보겠다는 마음으로 여성들은 손익분기점이 넘을 때까지 표를 사들였다. 그렇게 운동이 시작된 지 3주도 채 지나지 않아서 미쓰백은 역주행에 성공했고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미쓰백 관객 수, 개봉일 대비 207% 상승. 역주행 시작.”
“고공분투 미쓰백, 그럼에도 손익분기점 벽은 높다.”
“영혼만이라도 보낸다. 미쓰백 영화표 구매행렬”
“미쓰백에 쏟아지는 영혼 보내는 후원물결. 영화 한편도 가치소비”
“역주행 또 역주행. 미쓰백의 기특한 생존력”
“미쓰백 손익분기점 70만 돌파. 흔들림 없는 장기흥행”
“우리에겐 여성 서사가 필요해. 손익분기점 넘겨낸 여성 팬덤”

위는 기사제목들을 시간 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관계자는 이 사건을 보고, “한국 콘텐츠 시장을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봤을 때, 현재 여성들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한편 원하는 콘텐츠를 직접 찾아내는 능동적 시청층으로 변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성들은 점점 더 사회전반에 걸친 여성혐오에 목소리를 높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다. 지난 11월 10일 벌어진 #요거프레소_불매 운동도 여성들이 더는 참지 않고 적극적으로 여성혐오에 대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천안의 한 요거프레소는 여자 알바생이 투블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해고했다. 해당 매장 점주는 “요식업은 용모단정이 기본이기 때문에 여자든 남자든 모두 코르셋을 차야한다. 남자도 머리가 조금만 길면 칼같이 잘라야하고 액세서리도 일체 금지다”라고 해고사유를 밝혔다. 문제는 해고된 여자 알바생이 남자 알바생과 같은 조건을 충족하고 있었던 거다. 머리도 깔끔했고 액세서리도 없었으며, 단지 여자에게만 요구되는 긴 머리와 화장을 안 했을 뿐이다. 왜 여자에게만 화장과 긴 머리가 필요한 것일까? 지난 6월 9일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서 삭발 퍼포먼스를 보였던 한 참가자는 말했다. “우리는 장모종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우리는 여자가 아니라 사람으로 살고 싶다. 머리를 자름으로써 이를 보여주겠다.”

여성들이 여자가 아닌 사람으로 살고 싶다고 처절하게 절규하는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다양한 형태의 여성혐오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성혐오는 여초집단 내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여성친화기업으로 알려졌던 요거프레소가 그랬고, 리디북스가 그랬다. 리디북스는 여성이 본사의 주 독자층인데도 불구하고, 섹스로봇에 관한 소설 ‘노라’를 연재할 당시 여성의 입과 질이 연결된 그림을 소설의 표지로 사용한 바가 있다. 적나라하게 오나홀화된 여성신체는 많은 여성들에게 성적수치심과 불쾌감을 유발했다. 소설의 주제는 섹스로봇일지 몰라도, 사람들이 소비하는 이미지는 성적 대상화된 현실의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디북스는 이걸 소설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변명하며 시정하지 않았다. 이에 분노한 여성들이 #리디북스_노라_판매중지 총공 프로젝트를 전개하며 SNS에 지속적으로 리디북스 탈퇴 인증샷을 올리자, 그제야 리디북스는 다양한 독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했다며 죄송하다고 사과문을 게시했다.

그게 여성혐오인지 몰랐다는 이유로, 큰일이 아니란 이유로, 표현의 자유란 이유로 여성혐오는 매일같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난다. 리디북스처럼 여성혐오를 지적받아도 아니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고, 여성혐오인 건 인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많다. 극심한 여성혐오 범죄에도 불구하고, 폐지가 어렵다는 이유로 방관적 행태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건 소라넷 폐지운동 때다. 당시 대부분의 남성들은 소라넷이 해외서버에 적을 두고 있어서 절대 폐지 못할 거라 단언했다. 하지만 여성들은 이에 굴하지 않았고, 소라넷 폐지를 향한 노력을 다각도로 실천했다. ‘여성시대’나 ‘레몬테라스’ 등 거대 여성커뮤니티에 소라넷의 실태를 알려 여성들의 관심을 환기했고, 이걸 다시 다국어로 번역하여 해외사이트에도 공유했다. 또한, 각국의 영사관에 소라넷 이용자들이 해외에서 벌이는 범죄를 메일로 제보했다. 특히 아동성범죄를 엄격하게 처벌하는 캐나다나 미국에 자국의 미성년을 대상으로 하는 몰카나 성폭행 등의 범죄를 고발했다. 그리고 성평등, 젠더평등을 실천하는 국회의원들에게 성범죄의 온상인 소라넷을 폐지해달라고 지속적으로 청원하기도 했다. 이런 수많은 노력들이 쌓이고 쌓여 진선미 의원이 2015년 11월 23일 ‘국회 행정안전위’에서 강신명 경찰청장에게 소라넷 폐지를 촉구한 걸 계기로, 경찰은 조사에 착수한지 6개월도 안 돼서 소라넷 메인서버를 폐쇄했다.

“오빠가 지켜줄게”라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공허한 말인지, 여성들은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점차 깨닫고 있다.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세상이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오빠의 심리를 거스르지 않으려 숨죽이기만 해서는 여성혐오가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여성들은 이제 안다. 2016년 이화여자대학교 미래라이프대학 신설 반대 시위 때, 폭력사태가 일어나자마자 뛰어온 건 국가도, 경찰도 아닌 '언니'였다. 마찬가지로 넥슨 클로저스 김자연 성우가 해고됐을 때 항의한 것도 자매들이었다. 강남역 살인사건, 왁싱샵 살인사건, 포항 약국 칼부림 사건 등 이유 없이 스러져간 여성의 죽음에 관심을 갖고 사회적으로 관심을 환기시킨 것도 자매들이었다. 자매들의 연대로 메갈리아4 소송후원을 위해 만들어진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는 1억 3천만 원이나 팔렸다. 여성들은 언제까지나 연약한 소녀로 남아있지 않는다. 현재, 많은 수의 여성들이 코르셋을 집어던지고, “우리는 꽃이 아니라 불꽃”이라며 거친 투사가 되고 있다.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여성들의 목소리가 영화 미쓰백의 백상아의 말과 겹쳐 들린다. “옆에 있어줄게.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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