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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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사랑
  • 정민나
  • 승인 2018.12.07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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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에 부쳐 - 정민나 / 시인




지난 달 초 인천 문화공간 <해시>에서 노동자 시인 정세훈의 출판기념회 겸 시화전 오픈식이 있었다. 시인이 열일곱 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포장지 파지에 쓴 시들도 크지 않은 공간에 시화로 걸려있다. 그를 통해 1960년대 말부터 부평수출산업공단에서 노동자 삶을 살아온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공장생활과정에서 진폐증에 걸려 30여 년간 투병 생활을 해오다 2011년부터 건강이 호전 되었다.

시인이 시화전을 기획하고 순회 시화전을 실행하게 된 이유는 함께 일하는 활동가의 열악한 처지를 보고 이를 조금이라도 개선해 보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 시인이 한국 민예총 이사장 대행이라는 직무를 맡아 먼저 한 것은 대의명분을 지킬만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삶의 토대가 피폐해져 있다면 어느 누가 행복한 심정으로 공동체의 일을 성심껏 해 낼 수 있겠는가? 등잔 밑이 어둡듯이 먼 곳에서 벌어지는 큰일에만 신경 쓰느라 가까운 사람의 생활 문제를 간과한다면 정작 큰일 또한 도모할 수 없는 법이다.
 
좋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남의 딱한 사정을 모른다.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시인이야말로 지금까지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왔다. 실제로 배고파 고생을 해 본 사람이었으므로 사회연대활동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과정 속에서 가까운 동료의 배고픔을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리라. 거미가 줄을 쳐야 벌레를 잡듯 작게 느껴지는 그러한 일이 사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본 그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멀리서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의 문제부터 풀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 두부 사온다’는 말이 있다. 시인이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은 화가 • 서예가 • 판화가 • 사진작가 • 전각가 등 시각 예술가들의 적극적인 재능기부 동참으로 ‘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푸른 사상)라는 멋진 개인 시집을 출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1989년 <노동해방문학>으로 1990년 <창작과 비평>으로 문단에 나와 노동현장에서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형상화 해 왔다. 그렇게 하여 첫시집 『손 하나로 아름다운 당신』을 비롯하여 『맑은 하늘을 보면』, 『저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끝내 술잔을 비우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죽어 저 저 하늘에 뿌려지지 말아라』, 『부평 4공단 여공』, 『몸의 중심』 등을 펴냈다.
 

더 이상 깊어지지 않을 만큼
밤은 깊어졌습니다
내일의 노동을 위해선
벌써 깊은 잠에 들었어야 하는데
도대체 잠이 아니 옵니다
말은 없지만 옆에 누운 아내도
아직 잠이 들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사 온 지 육 개월도 채 안 되었는데
또 이사를 가야 합니다
주인집 막내아들의
돌연한 결혼으로
셋방을 내놓아야 합니다
억지로 잠을 청하려는 나에게로
아내가 서럽게 안겨 오며
우리 집 가을을 말합니다
“가을인가 봐요”
귀뚜라미가 울잖아요.“
조그마한 창문에 비춰 오는 달빛이
시리도록 밝아 보입니다.

- 정세훈, 「우리 집 가을」 전문
 

위의 시 「우리 집 가을」에서도 시름겨운 부부 이야기가 나온다. 이사 온 지 6개월이 됐는데 주인 집 사정으로 또 이사를 가야하는 고달픈 인생이야기이다. 일찍 자고 다음 날 노동을 해야 하는데 잠도 오지 않는 가을 밤. 시인이 그런 추운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서럽게 안겨오는 아내마저 없었다면 “창문에 비춰 오는 달빛이/시리도록 밝아 보입니다.”와 같은 사무사의 시정신은 없었을지 모른다.
 

늘 그녀들로부터 위축되어 있었다
맘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내 처지만 생각하면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했다
가까이 접근을 하면
공돌이 주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며
면박을 줄 것만 같아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궁여지책으로 펜팔을 했다
펜팔 업체로부터 소개받은 그녀는
부평 4공단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립다, 보고 싶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연장 작업, 휴일 특근 작업, 36시간 교대 작업,
공장 생활의 고단한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아프지만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이 오고갔다
 

“아프지만”이란 소식에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 정세훈, 「부평 4공단 여공」 전문
 
이 시는 『부평 4공단 여공』이란 시집에 상재된 것으로 금번 시화전으로 기획(『우리가 이 세상 꽃이 되어도』에 실려)되어 독자들에게 다시 선보이게 되었다. 나는 인천작가회의 『작가들』에 이 시집에 대한 서평을 쓴 인연이 있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들려준 것은 자기완성으로서의 미적이고 감각적인 시심은 아니다. 하지만 진실의 토대 위에서 문학정신이 비롯됨을 알 때 당대의 시적 진실을 솔직하게 쓸 수 있는 자가 명실공히 시인임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 이는 몸으로 겪은 자신의 아픔으로 타인의 고통을 대변하는 일이며, 불확실한 세계 속에서 상실감에 빠져드는 타자들과의 상생의 길을 모색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땅의 기득 계층에게 손 내미는 일이기도 하다.
- 정민나, 「물신 시대의 노동시와 현실」, 『작가들』, 2013
 

자신의 가난한 삶을 곡진하게 표현하여 시집으로 묶고 그 속에서 시를 추려내 시화전을 열고 그 기금으로 열악한 환경에 처한 동료를 돕고 공동체적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인가. 시인이 “몸으로 겪은 자신의 아픔으로 타인의 고통을 대변하는 일”은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그 연원이 오래 되었다. “공돌이 주제”에 면박을 당할 것 같아 맘에 드는 상대가 나타나도 “적극적으로 나서질 못”하던 그는 펜팔 업체로부터 여자를 소개 받는다. 하지만 그녀는 “연장 작업, 휴일 특근 작업, 36시간 교대 작업을 하는 부평 4공단 여공으로 몸이 아프다. 시인은 “아프지만”이란 소식에/그녀가 보고 싶어졌다“고 쓰고 있다. “병원 갈 돈이 없다”는 소식에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밤하늘 꼭대기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내 비록 철야 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때워가고 있지만
- 정세훈, 「저 별을 버리지 말아야지」 전문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안이 곪는 것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언제나 가깝게 느껴지는 아픔을 모른 체 하고 중요한 사안만을 처리할 수도 없는 법이다. 정세훈 시인은 그것을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었다.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전은 부평 역사박물관 2층 화랑에서 내년 2월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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