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 눈치 안보고 살았다고..."
상태바
"시어머니 눈치 안보고 살았다고..."
  • 김인자
  • 승인 2019.01.29 09: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39) 괴짜 할머니


찬바람 쌩쌩 부는 한 겨울 아침, 다른 날 보다 울 엄니를 모시러오는 치매센터 송영차가 좀 늦는다.
"오늘 센터 차가 좀 늦네." 하는 내말에
"올 때 되믄 오것지. 새로 온 이 때문에 늦나?"
엄니가 장갑 한 짝을 손에 끼시며  말씀하신다.
"엄니, 왜 장갑을 한 쪽만 끼셔? 다른 한 쪽은?"
"금방 차에 탈건데 뭐. 차에 타믄 안전벨튼지 뭔지 끈 동겨매야대. 장갑 끼고 헐라믄 잘 안 매져."

"안녕하세요, 할머니."
"예, 안녕하세요. 심계옥 어르신 따님이신가? 엄니랑 똑 닮았네. 내가 여기서 제일 꼬랑지야. 막내지. 올해 일흔 다섯. 설 명절 쇠고 나면 일흔 여섯이 되지."
치매센터 송영차가 오고 맨 뒤에 앉으신 할머니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아는 체를 하신다. 묻지도 않은 말씀을 먼저 하시는걸 보니 성격이 활달하신 분인가보다. 할머니 한 쪽 귀에 마스크끈이 걸려져 있다. 엄니가 며칠 전에 펼쳐 놓으신 이야기주머니의 주인공 마스크 할머니신가보다.

"오늘 우리 핵교에(울 심계옥엄니는 당신이 다니시는 주간보호센터를 학교라고 부르신다.)어떤 이가 새로 들어왔어. 나이도 젊은데 아주 괴짜야."
"괴짜? 누가?"
"새로 들어온 이가. 생긴 것도 괴짜고 허는 행실도 남들과 달라."
"다른 할머니들과 많이 다르셔?"
"어 달러. 달라도 아주 많이 달라."
새해가 되어 구순이 되신 울 심계옥엄니 입맛도 없다시며 식사량도 줄고 말 수도 부쩍 적어지셔서 걱정했는데 오늘은 감사하게도 말문이 팡팡 터지셨다.

"새로운 이는 15년을 직장에 대녔대.
십 년이믄 강산이 변한다는데 15년을 직장을 대녔으니 돈도 음청 많이 벌었대.
딸 넷을 낳고 살았는데 딸 하나는 사위가 인물이 좋아서 (딸을)줬더니 아들인가 뭔가 하나를 낳고 나갔대."
"나가? 누가? 어딜 나가?"
"누구긴? 사우놈이 집을 나갔대지. 인물도 좋고 머리도 좋아서 우체국에 취직도 시켜줬더니만 이 잡놈이 바람이 나서 나갔대."
"에구, 엄니 남의 사위보고 잡놈이 뭐야아."
"내가 잡놈이라고 허나? 즈이 장모가 그르케 말했다고. 잡놈이라고."
"아, 그래서?"
"그래서는 머시 그래서야? 딸이 지어미보고 헌다는 말이 승질이 어떤지도 모르고 그저 인물만 좋다고 줬냐고? 그래서 이렇게 살게 만들었냐고 딸이 지 에미를 원망하더래지."
"마스크할머니 센터에 오신지 얼마 안되셨다면서 그런 이야기를 다 하셔?"
"아니, 딴 사람들이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심했단 소리를 하니까 자기는 시어머니 눈치 안보고 살았다고. 그 얘기 끝에 자기 살아온 얘기를 하더라고."
"아, 그르셨구나."
"남들이 어떻게 시어무니 눈치도 안보고 살았냐고 하니까 자기는 눈치 안보고 살았대. 오히려 시어무니가 자기 눈치를 보고 살았다고 하드만."
"마스크 할머니가 많은 얘기를 해주셨나보네."
"젊어서 그런가. 말을 아주 재밌게 잘해. 정신도 어찌나 좋은지 옛날 일도 하나도 까먹지 않고 죄 기억 하고 있더라고."
"많이 젊으셔? 그 할머니?"
"젊지. 그럼.우리 핵교서 나이가 제일 어릴걸? 그이가 15년을 직장엘 다녔다더라. 시집이라고 갔는데 가보니 집도 없고 빚도 300만원이나 있더래."
"빚이 300만원 씩 이나?"
"그래 삼백만 원. 당시에 삼 백이믄 큰 돈이지. 근데 어찌나 바지런한지 시집가서 일 댕기면서 그 많은 빚을 죄 갚았대."
"그 할머니가 그 많은 빚을 다 갚으셨다고?"
"그랬대. 메누리가 집도 사고 빚도 하나 없이 죄 갚아주니까 시엄마가 며느리 눈치를 슬슬 봤댄다."
"그래서? 엄니? 마스크 할머니 얘기 재밌다. 더 해봐요."
"재밌냐? 남 얘기가 머시 재밌냐?"
말씀은 그렇게 하시면서 오늘은 울엄니가 작정을 하고 이야기 주머니를 푸시려나 보다.

"그렇게 시집가서 애 낳고 잘 살았는데 영감이 저 세상으로 먼저 갔댄다.
그래서 그 새로운 이는 영감 마누라가 손 붙잡고 다니는 걸 보믄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대.
딸만 넷을 놓고 살다가 아들 낳기를 소원하더니 부러워만 하다가 죽었대."
"아, 마스크 할머니 딸만 넷이셔?"
"그래. 딸만 넷이라더라. 그래도 그이는 딸이 넷이나 있으니 너처럼 외롭지는 않겠구나 했다. 내가 들으면서."
엄니가 말씀 끝에 내 손을 끌어다 잡으신다.
"딸들이 많으니까 사우도 가지 가진가봐.
어떤 사위는 군대에서 아주 높은 자리에 있는데 하루는 장모가 그 딸네 집에 갔더니 임금처럼 아주 대우가 좋더래. 즈이 장모를 아주 높혀서 무슨 마마라고 했대지? 아마?"
"마마?"
"어, 무슨 마마라고 불렀다던데 내 들어두 금방 잊어버렸네."

평소에 말씀이 없으신 울 엄니. 요 며칠 기운 없으셔서 말 붙이는 것도 귀찮아 하셨던 울엄니. 오늘 따라 이야기꽃이 활짝 핀 울엄니의 길고 긴 수다가 조금도 지루하지가 않고 기뻤다.
엄니 남 얘기도 좋고 엄니 얘기도 좋고 나는 다 좋으니 지발 식사도 잘하시고 오늘처럼 수다도 많이 떨어주셔요.
들어주자, 들어주자 울 엄니들의 긴긴 수다~~들어주기의 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