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외이웃'을 위한 삶 … "보람이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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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이웃'을 위한 삶 … "보람이 크죠"
  • 이혜정
  • 승인 2010.11.23 18:0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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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사람 된 이웃] 권장숙씨-'명동분식' 주인


취재 : 이혜정 기자

26년 동안 사회에서 소외를 받는 노인과 어려운 이들에게 '나눔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경인전철 맨 끝자락에 있는 인천역. '웅장한' 차이나타운 팻말이 서 있는 옆 건물 1층에  '소문난' 분식집 '명동분식'을 운영하는 권장숙(62)씨를 만났다.

권씨는 인천역 건널목 바로 앞에서 26년간 소외이웃들에게 국수를 '공짜'로 제공하고 있다.

"전 남에게 자랑할 인물이 못 돼요.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냥 음식장사를 하면서 밥 대접한 것뿐인데…." 권씨는 인터뷰를 주저했다.

갑자기 '따르릉~' 한 통의 전화가 울린다.

"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할아버지에요? 할아버지 문 열었어요."

'누구세요?'라고 하자 권씨는 "우리집에 오는 단골 할아버지에요. 경기도 문산에서 인천까지 칼국수를 드시러 오시는데…."라고 말을 끊내기도 전에 또 전화벨이 울린다.
 
"할아버지~ 문 열었어요. 그냥 오셔도 돼요. 걱정말고 오세요. 네~ 기다리고 있어요."

권씨는 "할아버지가 우리집에 칼국수를 드시러 오신 지 7년째 돼요. 늘 문산에서 3시간 가량 걸려서 이곳에 오세요."라며 "할아버지가 소아마비로 인해 몸이 불편하신데도 1주일에 서너 번씩 인천에 내려 오세요. 정말 감사하죠.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칼국수 곱배기 정도뿐이에요." 라고 말했다.

"오실 때마다 서울역, 신도림역, 부천역, 부평역, 주안역…. 각 역을 지나실 때마다 항상 어디쯤 왔다고 전화를 주세요. 이제 출발한다고 전화하셨으니까 5시쯤 오시겠네요."

권씨와 20분 남짓 대화를 하는 동안 5통의 전화가 왔다.

5시쯤 되자 권씨가 "어? 저기 할아버지 오시네요"라고 말한다. 보니 분식집에서 바로 보이는 인천역 앞에 불편한 걸음으로 백발의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 왔어. 칼국수 만들어놨어?"

큰 소리를 치며 문산에서 온 양모(69)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이집 칼국수가 제일 맛있어. 저번에 전화 안 하고 왔더니 문을 안 열었더라고. 얼마나 속상하든지. 그날 저녁 굶었어. 이 집 양반이 나한테 별명을 지어줬지. '마라톤 생중계'라나? 와서 또 문이 닫혀 있을까봐 걱정되니까 계속 전화한다고 말야." 할아버지는 '화통하게' 웃는다.

양 할아버지는 "이집 주인 정말 따뜻한 사람이야. 내가 오면 반찬과 음식을 챙겨주니 올 때마다 기분 좋아. 이런 곳이 어디 있어? 난 여기 아니면 안 가"라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 올린다.

칼국수를 만들고 있던 권씨가 갑자기 미리 준비해둔 순대 한 접시를 들고 뛰쳐나갔다. 인천역 인근에 있는 노숙자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챙겨주기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곳에서 노숙한 지 6~7년째 된 할아버지에요. 얼마 전부터 추워져서 두터운 점퍼 하나를 드렸더니, 잘 입고 다니시네요. 다른 노숙자들이 빼앗을까봐 걱정했는데…. 이제 날씨도 추워지는데 식사는 잘 하고 다니시는지 모르겠어요."

귄씨는 걱정스러운듯 노숙자의 행로를 살핀다.

밀가루와 인연?

권씨가 분식집을 운영한 때는 1984년 봄. 결혼을 한 지 10여년 만에 밀가루를 만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시집 올 당시 집안일을 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만큼 부유한 집안이었기 때문이다. 1980년 초 남편의 사업이 부도가 나자 어쩔 수 없이 시부모님이 사는 인천에 내려와 정착하게 됐다. 이것이 밀가루와 인연을 맺게된 계기이다.

1990년 후반 IMF 이후 권씨는 분식점 운영방식을 바꿨다. 외환위기로 인해 한순간에 가정이 무너지면서 밖으로 내몰리는 가장과 아이들을 모른체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IMF때 유난히 인천역 근처에 실직자들이 많았어요. 처음에는 가게 앞을 서성이면서 자꾸 들여다 보더라고요. 그럴 땐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놓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어느 한 아저씨가 들어오더니 무릎을 꿇고 밥 한끼 달라고 하는 거에요. '테이블에 앉으세요. 드릴께요'라고 했는데도 도시락에 싸달라고 하더니 인천역 앞에서 드시더라고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권씨는 위기 청소년들의 임시 보호자 역할도 하고 있다. 분식집에서 내다보이는 건너편 화장실에는 방황을 하는 청소년들의 집합 장소였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화장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담배를 태우는 등 가출한 청소년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탈선하는 것을 모른체 할 권씨 성격이 아니다. 인천역 인근을 방황하는 아이들을 불러다가 김밥, 라면, 우동 등을 먹였다.

"'참 이쁘게 생겼구나. 근데 담배는 왜 태우니? 담배를 안 태우면 더 이쁠텐데…'. 그렇게 물어보면 아이들은 '그냥 습관이에요'라고 대답하더라고요. 얼굴을 익히다 보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담배를 피우면 네 뼈랑 살을 녹이는 거야. 다음부터 담배를 피우고 싶으면 아줌마한테 와. 맛있는 거 해줄께'라고 말했더니 아이들이 가게에 자주 찾아왔어요. 나중에는 아이들을 잘 타일러서 집에 돌려보냈지요." 권씨의 보람이다.

어르신들의 며느리이자, 딸이자, 친구인 권씨


몸이 편치 않은 노인들은 평균 식사 시간이 1시간을 넘는다. 권씨는 딸처럼 며느리처럼 친구처럼 살갑게 이들을 대한다. 권씨는 "어르신들에게 대화상대가 필요한 것 외에 바라는 건 별로 없어요. 그냥 이야기를 들어주고 대답해주고 하다 보니 어느덧 어르신들하고 친구도 되고 자식도 되고…. 이제는 저를 딸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계세요."

권씨는 자신을 딸처럼 여기는 경북 점촌에서 탄광사업을 했던 78세 할아버지 사연을 이야기했다. 할아버지에게는 목회자 길을 걷는 막내아들이 있다. 이 아들은 회사가 어려워지자 명예퇴직을 하고 신학대학교에 들어갔다. 서울 종로에 내로라 하는 종친회 사무실에서 문중 일을 보는 할아버지는 아들이 목회자가 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개척교회 자금을 마련해 주기 위해 살고 있던 집을 팔아 작은 곳으로 이사를 갈 정도로 자식 사랑이 극진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들 교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권씨는 그 할아버지가 국수를 먹으러 올 때마다 "할아버지 자식 많이 사랑하시잖아요. 아버님이 교회안 가시면 누가 나가겠느냐?'며 수차례 설득을 했다. 그런데 얼마 전 할아버지가 찾아와 "나 오늘 아들 교회 갔다왔어"라고 말했다. 

"정말 좋았어요.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라고요. 결국 아드님을 이해하고 마음의 문을 여신 거 같아서요."

권씨는 13년째 갑상선 종양을 가지고 있다. 좁쌀 같은 것이 3~4개 있어 피로가 쉽게 오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나 권씨는 오전 11시부터 밤 11시까지 특별한 일을 제외하고는 1년 내내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심지어 명절에도 어려운 이들이 찾아올까 걱정돼 문을 닫지 못한다.

권씨가 집을 나와 방문하는 이들을 위해 월동준비를 해두었던 몇벌의 헌옷이 새주인을 찾아갔다.

"몸이 불편하거나 노숙자 등 소외 계층 사람들이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남들한테 좋은 일 한다고 명함도 못 내밀어요. 그냥 제 힘이 닿을 때까지 이 공간에서 어려운 이들이랑 칼국수 한 그릇 나누면서 사는 게 제 꿈이에요."

권씨는 인천에 내려와 이곳에 자리 잡고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사람 사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에 오히려 자신이 얻는 게 훨씬 많다고 했다.

느지막이 공부를 시작한 그이는 인천대 시민대학교에서 아동미술을 공부하고 있다. 분식점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공부해 더 많은 이들에게 베풀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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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일 2011-01-27 15:13:34
네, 그러세요.

장윤석 2011-01-27 13:56:55
이 글을 제 블로그로 퍼가도 될런지 조심스럽게 여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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