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그리고 정직, '한국'을 만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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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 그리고 정직, '한국'을 만든 아버지
  • 송정로 기자
  • 승인 2019.02.25 0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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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 인하대 교수『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 영문판 출간



 


일제 순사들이 3.1운동하다 잡힌 사람들의 상투를 끈으로 연결해 묶고 질질 끌고 가며 칼로 마구 찔렀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들을 느티나무 뒤에서 숨도 못 쉬고 지켜보았던 어린 아이.

대동강 다리를 건너려고 보니 폭격을 맞아 여기저기 무너져 있고,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셀 수 없이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 쇠난간을 잡고 아슬아슬하게 건너는데 하도 추워 쇠난간을 쥐었다 놓으면 손바닥 살가죽이 쩌억쩍 붙어 살점이 떨어지며 피가 흘렀다.
 
어려서부터 일제강점기의 쓰라림을 겪고, 청·장년기에 닥친 6.25 전쟁. 부모와 생이별하고 오른 피난길, 맨주먹에 피난살이를 하며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살아온, 이제 그 굴곡진 인생의 막을 내리는 바로 윗 세대.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대구로 피난 와 가정을 일구고 북에 두고 온 부모의 당부대로 꿋꿋이 선(善)을 실천하며 살아온 아버지 박정헌(1914~2010)의 이야기다.

박영신 인하대 교수(교육심리학 전공)가 지난 2013년 출간한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정신세계사)이 2015년 중국어판(동방출판사)으로 출간된 데 이어 올 1월 영문판(『Stories my father told me: A Korean father’s wisdom for his child』, 한림출판사)이 나오고 세계 최대의 온라인서점 ‘아마존’에도 올라 다시 화제다. 영문판은 올해 독일 라히프치히 도서전(3월 21일-24일)의 한국관에 출품돼 전시될 예정이다. 라히프치히 도서전이 끝나면 한국관에 출품된 책들은 베를린 대학의 한국어학과에 기증된다. 한국에 관심있는 대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스카이 캐슬’로 대변되는 참담한 부모자녀 관계에 갇혀있는 요즈음, 우리를 이 만큼 성장시켜준 지난 세대 한국 아버지들의 삶과 정신세계, 자녀교육이 다시 주목받고있다.
 
그 격동기에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겨온 아버지는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던 것인가?
빈손, 그리고 정직이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갑자기 빈손으로 떠난 고행의 피난길에서 체득한, 사무치도록 선명한 깨달음이었다. ‘나중에 이 세상을 떠날 때에도 모든 것을, 너희들마저도 그대로 두고 갑자기 빈손으로 떠나는 것임을’(p32 빈손) 깨치게 된 성찰이었다. 그러니까 정직하게 살아야했다. 아버지는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과적으로 정직한 것 만큼 최선은 없다!’(45p 혼났어도 후회되지않아)는 것을 철칙으로 살게 됐다.
  
검소와 근면 성실, 절제된 자기관리, 나눔과 선행, 인내와 강인한 의지, 예의와 성의, 효심과 보은, 사회환원, 생명사랑... 등등이 교과서에 나오는 덕목들이 아니라 하나하나 아버지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됐다. 그것들은 또한 맏딸인 박영신 교수 등 자녀들을 알게 모르게 ‘교육’시켰다. 전쟁의 폐허에서 대한민국을 일으킨 바로 그 ‘동력’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래 세대로 전수해야 할 한국 사회의 소중한 규범이었다.
 
맨손으로 피난 온 아버지는 막노동에서 시작해 정직하게 살기 위해 뿌린대로 거두는 과수원 농사를 지었다. 1970년대, 농사를 지으면서 인근 초·중학교의 어려운 학생들에게 해마다 장학금을 내놓았다. 부모를 모시지 못하는 아버지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음식을 대접하고 선물을 전달한다. 그의 회갑 잔치는 대구시내 전체 넝마주이와 거지들을 초대하여 하루종일 음식을 대접하는 날이었다.

 


[ 그림 정유진 작가]

 

‘선을 베풀면, 선은 반드시 선으로 언젠가는 꼭 돌아온다는 사실이다. 불쌍한 사람을 도우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돕는 것이야!’(p47 평소에 사과나무를 대접하며)
 
‘새 공책을 사 주시고 내가 쓰다 만 공책은 과수원에 아버지 장부가 되어 있었고, 새 책상을 사 주시고 내가 쓰던 헌 책상은 과수원에 아버지 책상이 되어 있었다... 40년 전 과수원 집 툇마루 앞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아버지 흰 고무신, 찢어진 뒤축이 검은 실로 엉기성기 꿰메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문득 기억해 냈다.’(p62 흰고무신과 검은 실)
 
‘고생을 고생으로 받아들이면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생을 올바로 받아들여야한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것을 행복의 첫걸음이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고생을 슬기롭게 받아들여야 고생 끝에 낙이 온다’(p68 고생과 행복)
 
‘그 당시에는 하늘이 두동강이라도 난 것처럼 힘들어했다. 그때 고향을 찾았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께서는 내 마음을 다 읽으셨던 것일까? 딱 한마디 하셨다. ‘고생의 맛을 모르는 사람은 인생의 멋을 알 수 없다!’’(p70 맛과 멋)
 
‘10대에는 건성으로 들었다. 이미 한문시간에 인내(忍耐)라는 한자를 배워서 다 알아요...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왜 그런지, 처음 듣는 사람에게 말하듯 말씀하셨다. 20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는 척하며 속으론 딴 생각했다... 30대가 되어 귀에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40대가 되니 마음에 깊숙이 다가왔다... 50대가 되니 삶 전체로 느끼게 되었다.’(78p 마음이 흔들릴 때)
 
‘‘논밭은 잡초가 해치고, 사람은 허욕이 해친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40세가 되었을 때, 50세가 되었을 때에도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그 말씀 나에게 강조할 필요 없어요. 나는 허욕이 별로 없으니까요’ 나는 늘 내가 허욕이 별로 없는 사람이라고 착각해 왔다. 허욕 가운데 허욕 덩어리로 있을 때에는 그것이 허욕이라는 것을 알 수 없어.’(p129 논밭은 잡초가 해치고)
 
‘소학교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읽으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 매일 동네 뒷산에 올라 많은 생각을 했다... 단상에 올라가서, 일본인 선생님께서 다 써주신 정해진 답사 대신에 교탁을 주먹으로 치며 후배들을 향해, ‘인간답게 살아라!’를 크게 외친 뒤에 ‘조선만세! 조선만세! 조선만세!’ 만세삼창을 했다. 엄숙하던 졸업식장은 갑자기 아수라장이 되었다. 극도로 분노한 일본 순사들이 앞으로 뛰어나와, 그대로 질질 끌어갔다... 학적부에는 품행이 최하인 병(丙)으로 적혔다.’(p231 만세삼창)

 


[그림 정유진 작가]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은 학술서를 저술해온 박영신 교수가 대중에 읽힐 책을 써야겠다는 다짐 아래 쓴 첫 책이다. 그는 이 책을 ‘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들을 가감 없이... 가식을 덧붙이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p5 책을 내며) 써내려갔다.
 
박 교수는 지금까지 30여권의 학술저서를 출간했다. 대한민국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수상한 『한국인의 부모자녀관계』(2004년), 『한국의 청소년문화와 부모자녀관계』(2004년), 『한국 청소년의 일탈행동과 학교폭력』(2015년) 등이 그것이다. 특히 아버지를 모델 삼아 평범한 한국의 부모자녀관계에 천착해 학술서적과 논문을 부단히 발표해왔다. 명예나 권력을 가진 것도 아니고, 돈도 많지 않은 소시민으로서 아버지가 살아온 삶은 ‘한강의 기적’에 기반이 되었던 인내와 희생정신과 나눔정신이었다. 박교수는 이를 통해 한국 부모들의 원형을 찾아내고 서양이 아닌, 한국의 위대한 토착심리 탐구로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박교수는 앞으로의 저술은 학술적이 아닌, 보통사람들의 피부로 가 닿을 수 있도록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처럼 쉽게 읽혀질 책을 더 펴낼 생각이다. 그는 이미 이 책 서문에 ‘『한국인의 부모자녀관계』를 몇 년도 모자라 몇 십년 동안 과학적 학문으로 검증하고 연구해왔지만 아직도 가볍디 가벼운 껍데기. 아버지의 살아있는 이야기가 더욱 진한 감동임을 깨달았으니!’(p7 책을 내며)라고 하였다. 두번째 책은 올 하반기 마지막 안식년을 맞아 집필할 계획이다.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의 마지막 소제목은 ‘세상을 바꾸는 힘’(p269)이다. 2005년 8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투병생활할 때 휠체어를 끌어드렸는데, 그때 아버지의 갑작스런 말이 강하게 저자를 붙잡았다. 입을 떼기도 어려운 투병 와중에 어눌하지만 명료하게,
“책은 참 중요하다” “예?...”
“책.은.한.사.회.를.일.으.켜.세.우.는.힘.이.고, 책.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그 말이 딸의 뇌리에 박혀 그의 삶을 움직이게 되었다.
 
여전히 입시위주의 교육현실에서, 부모자녀 관계부터 정상적으로, 생산적이고 창의적으로 바뀌어야만 하는 우리 사회. 참 어른상이 희미해져가는 우리 사회에서, 주어진 삶을 어떻게 바로 살아야 하는가 화두를 던지기 위해 그는 또 펜을 잡을 것이다.

 

   
<한국어판 표지>                   <중국어판 표지>                            <영어판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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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이 2019-03-06 07:17:16
눈가에 흐르는 눈물을 닦습니다. 가슴이 메이네요.

sky고래 2019-02-27 23:01:42
감동적이고 가슴뭉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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