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문화(화장률84.6%) 의 대중화를 앞당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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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문화(화장률84.6%) 의 대중화를 앞당기다
  • 이창희
  • 승인 2019.02.2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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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고 최종현 회장을 생각하며 /인천in 시민기자





고 최종현 회장은 1929년, 아버지 최학배와 어머니 이동대 사이에서 4남 4녀 중 차남으로 경기도 수원군(현 수원시)에서 태어났다. 1952년 서울대학교 농화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나 위스콘신 대학교로 편입해 1956년 졸업하였다. 3년 후인 1959년 시카고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과정을 마친 뒤 귀국하였다. 유학시절 자유주의 시장경제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의 수업을 들었다. 그의 영향으로 국내기업인 중 자유시장경제이론에 가장 밝았으며, 가장 잘 실천했다.
 

1962년에 선경직물 이사직을 맡으면서 선경그룹 경영에 참여하였다. 형 최종건이 1973년 폐암으로 별세하자 선경그룹을 지휘하였다. 그 당시만 해도 선경그룹은 잠재력은 있어도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기업이었지만, 최종현의 리더십 아래 한국 재계 2위 이내의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물론 최종건이 닦아놓은 기반이 있었지만 창업주가 아님에도 거의 창업주와 같은 대접을 받고 SK 그룹을 최종건의 자식이 아닌 최종현의 아들인 최태원이 물려받은 이유라고 한다.
 
1975년에 1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해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수직계열화'를 선언했다.선경직물에서 생산 하는 합성섬유들의 주 원료인 석유를 수입하면서 중동거래선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쌓아 뒀다. 이를 바탕으로 1980년 2차 석유파동으로 한국이 석유위기에 직면했을 때 최종현 회장이 위기 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에 협력하는 나라에는 석유를 수출하지 않는다'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결정에 따라 한국은 석유수출 금지국으로 분류 되서 원유공급이 어려워지자 신군부는 최종현 회장을 사우디로 급파했다. 최종현 회장이 사우디로부터 하루 15만 배럴씩의 원유를 공급받을 정도로 사우디 왕실 측근과 친분이 두텁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에 급파된 최 회장은 왕실과 접촉하면서 야마니 석유장관을 만나 한국에 대한 OPEC의 석유수출금지 조치를 해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우디 왕실은 그의 요구를 들어줬다. 그 동안의 이런 노력을 높이 평가 받아 1980년 대한석유공사 인수전에서 당시 재계 1위 삼성과의 경쟁에서 이겼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 중 노태우의 장녀 노소영과 자신의 아들 최태원이 결혼함으로써 노태우와 사돈지간이 되었다.1980년에 이미 정보통신 중심의 시대가 올 것임을 강조하는 혜안도 보였다. 대한석유공사(유공. 지금의 SK이노베이션) 인수 후 임직원과의 대화에서 "조만간 무선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시대가 올 테니 여러분도 거기에 대비해야 된다."고 발언했다. 실제로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의 통신사업 진출을 10여년간 진두지휘 해 1984년 전 세계 통신시장을 이끌고 있는 미국에 텔레커뮤니테이션팀을 조직 했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공기업인 한국이동통신과 경쟁할 수 있는 민간사업자(제2이동통신 사업권) 선정"을 발표하자 그동안의 준비를 바탕으로 입찰해 압도적인 점수 차로 1위에 선정된다.하지만 당시 노태우대통령과 사돈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의 재벌사돈 특혜 의혹이 생겼다. 14대 대선에 출마하기 위해서 노태우와의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에 입당해 당 대표로 있던 김영삼이 자신의 지지율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선경그룹이 사업권을 포기할 것을 강요해 최종현 회장도 정부가 먼저 사업권을 취소하면 받아 들이겠다 하지만 김영삼이 이 말을 듣고 바로 기자들에게 선경이 제2이동통신사업권을 포기하기로 했다고 발언해 1992년 8월 27일 선경그룹에서 공식적으로 노태우 정권에서는 통신사업을 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듬해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후 청와대에서 제2이동통신 사업권을 선경에 주지 않기 위해서 사업자 선정을 최종현이 회장을 겸직하던 전국경제인연합회에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맡긴다.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바꾸고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에서 하도록 한 것이다. 이에 선경그룹에서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을 포기[5]하는 대신 제1이동통신을 서비스 하고 있던 공기업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한다. 인수 후 CDMA 상용화에 힘써 1995년 12월 31일 최종 테스트에 성공해 1996년 1월 3일부터 상용화하게 된다.

폐암 투병 중에도 그룹 업무보다 나라경제 걱정을 많이 했다. 병상에서 그는 여러차례 이런 말을 했다. “이제 나의 가정이나 회사는 그 나름대로 성장할 수 있는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제 여생은 국가발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보람된 일에 몰두하고 싶다.”(최종현 지음,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

실제로 그는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 그룹일은 거의 손을 놓다시피 하면서도 학자들과의 토론만은 거르지 않았다. 미국 뉴욕의 슬론 케터링병원에서 폐암수술을 받고 코네티컷의 한적한 곳에 집 한채를 빌려 요양중이던 97년 8월에는 송병락 서울대 교수, 좌승희 한국경제연구원장 등 학자들을 일부러 미국으로 초청해 토론을 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건강이나 챙기라고 극구 말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나면 그렇게 즐거운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는게 주변사람들의 회상이다.
 
최 회장은 이 시절, 학자들과의 토론내용을 빠짐없이 정리해나갔다. 이같은 원고들을 모아 사후에 출간한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SK그룹 발간)이란 책을 보면, 최 회장의 당시 관심사는 대부분 우리경제의 장래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인재양성, 글로벌라이제이션, 국가경제의 선진화 등은 지금 곱씹어 봐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질 내용들이다.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기 1년 전부터 아시아 경제위기를 경고했으며 폐암 투병 중이던 1997년 10월에 산소마스크를 단 채 청와대에 가서 김영삼 대통령에게 외환과 환율, 은행이자율에 관해 직언을 했다. 비상조치를 더 이상 늦췄다가는 ‘큰일난다’는 호소도 했지만 돌아온 대통령의 반응은 "알아보겠다."가 끝이었다. 이에 자택으로 귀가한 최종현 회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고 한다.
 
11월에 건강이 더욱 악화된 상태로 한 번 더 찾아갔지만 김영삼이 귀에 담지 않아서 외환위기가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에서 맞게 됐다.사망 전 유공의 CI를 SK로 변경 해 선경그룹에서 SK그룹으로 바뀌었다

1998년 8월 지병인 폐암으로 타계했다. 유언에 따라 화장(火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이후 SK 그룹의 회장직은 몇년 간 전문경영인 출신인 손길승이 맡다가 아들 최태원에게 승계되었다. 특히 최종현 회장의 화장 유언은 사회적 파급효과가 컸다. 기존 장례문화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되던 화장이 국내 굴지 기업의 회장의 유언으로 본격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덕분에 오늘날 화장문화(우리나라 화장률 84.6%)가 어느정도 대중화 보급된 데에는 고 최종현 회장과, 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공이 가장 크다는 시각이 많다.
 

별세 20주년이 되는 2018년 8월 14일부터 24일까지 열흘간 SK그룹이 기념 사진전과 추모식 '최종현 회장, 그를 다시 만나다'를 개최했다. 특히 24일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SK텔레콤이 인공지능 AI기술 홀로그램을 활용해 최종현 회장을 재현해 주목 받았다. 이날 행사에서 최태원 회장은 대한민국 국가 경제와 SK그룹을 위해 헌신하고 한국고등교육재단을 통해 인재를 양성한 선친을 기리는 가칭 '최종현학술원'의 설립 계획을 발표했다.
 

30일 SK그룹에 따르면 지난 1973년 고 최종현 회장이 황무지였던 충북 충주 인등산에 심은 30㎝ 크기의 나무가 지금은 지름이 30㎝인 우량목으로 자라 국내 대표적인 조림 성공 사례로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이곳에서 생산되는 호두는 ‘우리숲’이라는 브랜드로 시판돼 인기가 한창이라는 것.
 

고 최 회장은 35년 전 벌거숭이산에 나무를 심어 30년 후 고급 목재로 자라면 이를 인재 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사용하겠다며 조림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서양 사람들이 잘 먹기 때문에 체격이 좋은데 나무도 잘 먹이고 보살펴야 잘 클 수 있다”며 “사람 키우듯 나무를 키우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나무를 통한 인재 양성 구상은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다. 조림사업은 투자기간이 길고 사업 전망도 불투명하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나 고 최 회장은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나무를 심는다”는 말로 조림사업을 밀어붙였다.
 

그룹의 한 관계자는 “조림지도 부동산 가치 등을 고려해 일각에서는 수도권 근처를 주장했다”며 “그러나 고 최종현 회장은 ‘땅장사를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라며 지역주민과 국가에 이익을 주기 위해 오지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최 선대 회장의 강력한 의지로 SK그룹은 1972년 서해개발주식회사(현 SK건설 SK임업 부문)를 만들어 이듬해부터 나무 심기에 주력했다. 그 결과 SK임업은 현재 충주 인등산, 천안 관덕산, 영동, 오산 등 4개 사업소 모두 4,100㏊(약 1,200만평ㆍ여의도 면적 90만평의 13배)의 임야에 조림수 40종, 조경수 80여종 등 378만 본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시민기자 이창희 lee9024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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