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어진 응어리, 상실감을 풀어내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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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진 응어리, 상실감을 풀어내려면
  • 류재형
  • 승인 2019.03.03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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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치유를 위한 평화예술프로젝트


<소청도 예동 해변, 누군가 희망의 돌을 쌓아놓다>


<안개가 자욱한 가을 어느 날 예동 마을 유일한 슬레이트 지붕의 가옥>

 
해방 이후 근대화 물결 속에서 서해의 섬들도 다양한 사건들을 지니고 있지만 소청도에서는 1946년 기뢰폭발사건으로 희생된 67명을 위시해 1970년대까지 시시때때로 가리비조개잡이와 홍어잡이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도 50명이 넘는다.
당시는 홍어와 까나리, 조기가 주종의 어업이었다. 홍어를 주로 왕성하게 잡았는데 1951년도 경에는 태풍(돌풍으로)으로 피조개(가리비)잡이 나간 배 중 예동에 5척, 노화동에 3척이 한꺼번에 돌아오지 못했다. 최소한 20명 이상이 희생되었다.
 
당시 까나리 잡는 배는 80척이나 있었고, 4명이 한조로 한배에 타고 배로 나가고 그물을 바다에서 잡아당기는 조업을 하였다. 당시 고기가 엄청나게 많아 진남포까지 내다 팔았다.
홍어잡이는 10월에 시작해 이듬해 4월까지 조업을 했다. 홍어잡이 낚시채비를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많은 고기를 잡았다.
60년대를 지나 70년대 초까지 홍어잡이를 끝내게 되는 소청도의 홍어 역사이다. 지금은 대청도에서만 홍어를 잡는다.
 
특히 6.25전쟁 이후 UN사 관할 하에 놓여 있는 [서해5도]라 불리는 특별한 지역에 속해 제재와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특수성을 소청도가 고스란히 떠안고 살아왔다.
까나리잡이는 아침에 나가면서 부대에 신고하고 저녁에 들어오면 노를 부대에 보관하였다가 다음날 아침에 다시 노를 찾아가지고 나와 고기잡이를 했다.
조업 나가기 전에 우선 마을 앞의 군부대 행정관서에 출항신고를 하고 배가 있는 작은삭금(동남쪽 끝단)을 가기위해 마을에서 산을 넘어 가야하는데 이곳 초소에서 검문을 받고 산 넘어 가면 뱃터 내려가기 전 초소에서 두 번째 검문을 받았다.
날씨가 좋아도 툭하면 조업을 중단시키기도 했다.
극심한 조업 중단으로 75년도 경에는 태안 쪽으로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갔다.
6.25전쟁 나기 전에 1,200명 살고 있었고 6.25이후 서서히 외지로(주로 인천으로) 나가 지금은 250명 정도 살고 있다(김봉춘어르신 증언, 89세).
 
섬에서의 이런 고통과 마주할 때 스스로 털고 움직이고 추슬러야 하는데 그런 것들이 너무 크고, 여러 차례 싸여 있어 스스로 해결하지 못했다.
분노와 부정, 저항의 단계는 슬픔보다 앞서서 밀려온다.
이 과정 다음에 헤어짐, 슬픔, 이별, 이런 애도의 과정을 거치며 오랜 시간이 걸려서 상처가 아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덮여진 이런 사건들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섬의 생활과 외부에 강인하게 대처함으로서 또 다른 섬사람들 특유의 ‘고집’이 생성되고 마음이 단단해진다.
섬사람들의 마음은 굳어진 상태로 있다. 굳어짐은 오랜 세월동안 환경에서 겪은 죽음의 경험 때문이다. 순식간에 닥쳐온 마을사람들의 [사라짐]이나 섬의 날씨와 환경, 그리고 특정해역의 통제 등 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한없이 보류하고 있었던 상실감에 대한 애도의 과정을 이번에 실행하게 되었다.
이런 섬사람들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이번의 시도 형식, 예술적 공연은 ‘슬픔’에 대한 또 다른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이다.
외지사람에 의해 바위를 두드리고, 바위에 틈을 내고, 빛이 들어갈 구멍을 내며, 촉촉한 물이 들어가서 굳어있던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자 시도한 내용이다.
바늘구멍만한 틈새로 물이 계속 들어간다면 물은 바위를 움직일 원동력이 될 것이다.
작은 두드림에 불과하지만, 크기에 비해 미약하다고 느껴지겠지만 울림은 분명히 존재한다.
 
‘삶의 겪음’ 때문에 생긴 굳어진 마음의 상처를 깨고 녹이는 촉매제 역할을 믿으면서 기획자 자신도(섬사람의 근성을 알기 때문이고, 어찌 보면 이해하기 때문이다) 주위의 같은 시선으로 도와주고자 시도하였다.
그들을 돕고자 했고 좋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생각!
아프고 고통스러워 멀리했던 것들을 불러내어 대면하고 서서히 받아들이는 과정이 우리 모두(기획팀과 마을사람)에게 필요했다. 나도 기획자이면서 삶에 고통을 멀리했던 것이다.
문화예술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일이다.
섬사람들의 강인한 생명력으로 여기까지 온 소청도!
빼앗아도 일어나는 소청도의 강인함, 그런 바탕이 이번 프로젝트의 중심에서 생각하는 것들이다.
아픔과 고통에 닫힌 문을 두드리고 틈새를 파고드는 행위, 위령제라는 것이고 예술의 행위인 것이다.
누구도 나서지 않는 행위를 인간 본성의 따뜻함으로 소통을 이루려는 시도이다.
따뜻함, 춤, 북의 울림, 음식의 나눔 등 서로 공감하기 위한 기본재료인 것이다.
우리는 섬에서 잘 살고 있는데 웬? 이방인이 와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하지만 그런 것을 알면서도 시도했고 마을 사람들에게 불편함이 보여도 적극적으로 진행하였던 것이다.
 
단지, 시도하고 다가갔다. 반응은 예측할 수 있었고 이미 문갑도 섬에서 8년간의 경험으로 밀고 나갔다.
한이 남아있고 구천에서 떠돌지 않고 좋은 곳으로 가게 하는 것이 위령제인 만큼,,,
하지만 위령제는 소청도에서 어떤 의미인가?
살아있는 자(섬사람을 포함한 관계자와 기획자, 스텝들을 포함하여)에게 위로를 주는 것, 그래서 삶에 대한 ‘시’를 쓰는 것이다.
[화합], 이 단어는 굉장히 중요했다.
이 프로젝트는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작업이었다. 기획자는 과정과 결과에 부정적 요인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도했다.
 
섬사람들이 주관했더라면 할 수 없었던 일이고 섬사람 본인들이 여태껏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왜냐하면 섬사람 누구도 시도하려 들지 않았고 서로의 알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작업은 긍정적 기쁨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기획자가 감정적인 부분에서 소홀하게 여겼던 부분들을 다시 정리해야 했고 스스로의 감정을 open해야 이 프로젝트가 가능해지리라는 생각에서 우선 기획자가 자아를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번 작업은 모든 사람들을 대하거나 말할 때 가장 낮은 자세로 대하고 마을 사람들이 가지는 무의식 속에 잠재하는 고집과 슬픔을 인식하려는 생각을 기획자 자신이 가지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은 소청도를 여러 번 드나들면서 마을 사람들과의 접촉에서 생성되었다.

우린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가졌다.



<배에 가지고 나가는 찬합들(소청도 노화동 소재)>


<물질하기 위한 도구들(소청도 노화동 소재) 왼쪽부터 굴따개, 홍합따개, 전복따개, 미역다시마따개>


<채취 대바구니(소청도 노화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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