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전골 마을, 그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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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전골 마을, 그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다
  • 정혜진
  • 승인 2019.03.06 0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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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초의 염전 이야기 - 정혜진 / '마을교육공동체 파랑새' 대표



<인천in>이 과거 주안염전(미추홀구 주안·도화동, 서구 가좌동, 부평구 십정동 일대)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염전골 마을 탐험기를 연재합니다. 1909년 전국 최초로 시험 염전이 만들어져 1965년 경인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폐쇄될 때까지 이 일대는 염전 고유의 마을 문화권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잊혀져가는 그 뿌리를 찾고 이 일대 형성된 마을 공동체를 찾아 이야기를 나눔니다.



주안염전 지도 - 주안 철도의 위치와 염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수 있는 사료다. <자료제공 - 국립민속박물관 정연학 박사>


우리가 살아가는 마을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될까?
대한민국은 여러 전쟁을 겪으며, 혹은 개발 바람에 초고속 성장을 거치며 많은 역사가 자료로 보존되지 않은 지역이 많다. 일제강점기 가지고 갈 수 있는 자료는 모두 등짐을 지고라도 가지고 퇴각하기도 하고, 가지고 갈 수 없는 건 불을 질러 그 '역사'를 모두 소각시켜 버리기도 했다. ‘대한민국이 고유의 역사를 되찾기까지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한 일본 우익세력의 말이 현실이 되었다. 전쟁 중에는 살아남아야 했고 전쟁 직후엔 굶지 않아야 했다. 그 후에도 여유가 없었다. 경제적으로, 마음적으로, 시간적으로도 여유가 없던 시대... 그사이 우리는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지워가며 살아왔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과거는 어떤 모습 이었을까?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던 차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전하고 기억하게 해야 할까?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지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나 스스로에게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마을의 역사에 관해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내가 모르는 우리 마을 이야기가 존재했다.
어렴풋이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제물포부락부란 내용이 실려 있었다. 교과서 속 제물포가 지금의 제물포인가? 궁금하여 선생님께 여쭈어 봤지만 그때 당시는 그 누구도 정확히 알려 주는 분이 계시지 않았고 얼버무리고 지나 갔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마을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 계시지 않았기 때문에 답해주지 못 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누군가는 알고 기록하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마을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을 이제 풀어가고 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것이 많았다. 최초의 염전, 전매청등의 익숙하고 유명한 단어의 주된 활동지가 우리 마을이란 것을 알게 되자 호기심이 들기 시작 했다. 과연 내가 사는 마을에는 어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사는 마을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던 것 일까?



< 현 염전골 마을센터 사진>


최초의 천일염전 <주안염전을 이야기 하다.>

염전골마을을 이야기하기 전에 그 역사부터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인천에 최초의 염전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나도 두 번째 스무 살을 보내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안지는 불과 3년이 되지 않았다. 마을활동을 하며 염전골 마을센터가 생기고 염전골 마을센터의 이름이 생기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이 사실이다.
염전골마을센터는 마을의 어른들이 마을에 작은 보탬이 되고, 마을을 재생하며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 위해 노력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지역의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계승하기 위하여 이름을 염전골마을센터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염전골에 관한,  염전에 관한 대략적 이야기를 듣고 난후 왜 염전골이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염전골의 배경은 대한제국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종은 대한제국에 소금부족의 현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염전을 개발하고자 하지만 실패하게 된다. 그후 고종은 염전개발에 관한 전문가를 채용하여 염전을 개발하고자 하지만 바로 일제강점기로 들어가 버리고 만다. 그로인해 일본의 전문가들이 염전을 개발하기 시작 하는데 이미 일본은 아시아에 2개의 염전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사료에서 확인이 된다. 때문에 보유한 염전의 전문가를 불러들여 시험 전 2곳을 설치하는데 한곳은 부산에 다른 한곳은 인천에 조성 된다. 인천에는 천일염을 부산에는 제제염 시험염전이 만들어 졌다. 부산의 제제염은 질 좋은 소금은 생산되지만 가공이 힘들고 소량 생산되며 가공하는 비용이 비싸게 드는 반면, 천일염은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생산비용도 저렴하여 인천에 염전을 확대 실행 하게 된다.

처음 염전시험소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십정동일대 열우물이라고 불리던 곳이다. 그 곳에 염전시험소를 두었던 이유는 인천의 바닷물이 십정동 까지 들어오는 큰 갯골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십정동과 주안일대는 밀물과 썰물이 있고 갯벌이 넓게 자리 잡았으며 건조한 바람이 부는 특성상 천일염의 적격의 장소였던 것이다. 시험염전의 성공으로 인천에는 거대한 염전 조성계획이 진행 된다. 주안염전 개요에서 보여지듯 시험염전 성공 후에 광범위한 염전이 조성되었던 것이다.



과거 염전일대 사진 <자료 네이버>


시험염전을 시작으로 1909년 염전이 조성되기 시작하여 1919년까지 1구에서 8구까지 거대한 염전이 조성되게 되고, 전매청 인천지소도 설치된다. 그 여파로 마을을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상권이 조성 되었다. 주안염전 이후 토지금고(용현동),,소래, 군자 등 염전이 확대 조성되어 인천의 갯가는 대단위 소금 생산지가 되었다.

해방 후 소금의 가격은 점차 하락하고 거기에 국가 경제 개발책으로 인해 1968년 주안염전은 폐쇄됐다. 그 자리에는 경인고속도로와 주안 5.6 공단이 조성되어 지금의 주안의 모습이 되었다. 최초의 시험염전이 의미도 있고 해서 염부들이 1호염전의 1정보만이라도 지키려 했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최초의 염전을 알려주는 표지석만이 길가에 방치돼있다. 남동구 간석홈플라스 위에 위치해 있는데, '한성자원' 자리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최초 천일염전 표지석>                                   <주안염전 소금 채취 모습>


과거 주안의 모습은 넓은 염전이 있고, 논과 밭이 함께 있었으며 소금을 운반하는 외발이 레일이 주안역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각 구마다 조성된 저수지에 바닷물을 가두어 염도를 높이고 각 염밭으로 옮겨가며 자연 건조를 시켜 마지막 염전에서 소금을 긁어모아 창고에 쌓아 두었다. 그리고 가마니에 포장하여 주안역 소금창고로이동 후 전국으로 배송되었다고 한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인 못사는 곳이라 일컬어지는 곳, 연탄공장이 있어서 빨래를 널어놓으면 까맣게 되는 곳,  4구와 6구의 갯가 저수지는 여름에는 수영장으로 온 마을사람들의 나들이 장소이자 청소년들의 놀이터였다. 바닷물 저수지는 망둥어와 조개, 게 등 먹거리를 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렇게 염전은 마을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이자 문화이고 삶이였던 것이다. 


마을의 다양한 역사이야기, 삶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 지는 경우가 많다.
마을의 선배들은 마을을 살아갈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을 만나는 분들마다 느낄 수 있었다. 마을을 이야기하며 함께 사는 공동체란 인식이 과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보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현저하게 적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우리 마을을 어떻게 발전시켜 갈지는 이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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