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마을 지킨 고택, 고택을 지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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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년 마을 지킨 고택, 고택을 지킨 사람
  • 정혜진
  • 승인 2019.03.29 00:22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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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을과 사람 - 정혜진/ 마을교육공동체 파랑새대표

<인천in>이 과거 주안염전(미추홀구 주안·도화동, 서구 가좌동, 부평구 십정동 일대)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염전골 마을 탐험기를 연재합니다. 1909년 전국 최초로 시험 염전이 만들어져 1965년 경인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폐쇄될 때까지 이 일대는 염전 고유의 마을 문화권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잊혀져가는 그 뿌리를 찾고 이 일대 형성된 마을 공동체를 찾아 이야기를 나눔니다.


                                       과거 가좌동 일대 빛바랜 사진 <사진제공 = 심재갑 선생님>

  마을은 몇 백 년이 지나도 그 자리를 지키며 사람을 품고, 삶도 품어주며 그 마을의 문화와 역사를 이어간다. 서구 가좌동에 그 마을을 지키며 300년 동안 사람들을 품어온 고택이 있다.  300년이나 마을의 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지금 이 집의 주인은 그 집을 닮은 심재갑 선생님이다. 전쟁의 고비들을 넘겨온 우리 역사를 돌아 보았을 때, 오랜 기간 한 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더욱 어렵지 않았을까? 현대 사람들은 상황에 맞추어 그때그때 이사를 하는 것에 비추어 보면 300년 동안 대를 이어 꿋꿋이 한 곳에 산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까? 

  이 집에서 태어나신 심재갑 선생님(87)은 인천의 현대사를 고스란히 기억하고 계신 분이시다. 창영초, 인천중, 제물포고를 졸업하시고 제물포고 선생님으로, 인하공업전문대학 교수님으로 긴 시간 교직 생활을 하셨다. 선생님은 학교 내 교직 생활만 하신 것은 아니다. 마을 안에 배움이 어려운 친구나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중3부터 사랑방에서 야학을 시작하셨고 제물포고 재임 시절 가좌농업학교를 설립, 교장선생님을 겸임하시기도 하셨다. 어머니께서 배운 것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셨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야학을 시작하셨다고 한다. 


(좌)가좌농민학교 초기사진  (우) 오래된 사진을 설명하고 계시는 심재갑선생님 <자료 심재갑선생님 소장본>

  그러다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는데, 한국전쟁 때는 제주도에서 군복무를 해야 했는데 집이 너무 그립고 부모님이 너무 걱정되어 매일 매일 일기로 기록하셨다는 선생님. 배를 타고 와야 했기에 다른 사람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 왔다고 이야기 하시는 선생님은 그때의 기억 뿐 만 아니라 쓰신 일기도 소장하고 계시다.

  전쟁이 끝나고 돌아온 선생님은 본격적으로 야학당을 시작했다. 전쟁 후 마을 사람들에게 더 많은 지식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은 전쟁 전보다 더 학습할 상황이 되지 않았기에 야학당을 시작하신 선생님은 장소가 없어 염전 창고를 빌려야 했고, 대학을 다니던 친구의 함께 초등반, 중등반으로 나누어 가르치셨다.
혼란스런 시대이기도 했고 물자도 부족한 시대였기 때문에 칠판과 백묵도 선생님 친구 분들이 십시일반 보내주어 수업을 하셨다. 이후 공부만으로는 식량난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농업기술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하여 가좌농민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한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가까이서 들으니, 그 당시 선생님의 열정이 고스란이 느껴졌다.

  선생님은 교육만이 아니라 지역의 불편함을 해소하고자 많은 노력을 하셨다. 도화동에는 전기가 들어오는데, 가좌동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자 선생님은 직접 중앙정부에 편지를 보내고, 담당자들을 만나러 다니며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셨다. 결국 전기공사를 시작하였고 이후 수도, 우편취급소 까지 마을에  들어오게 한 일등공신이 되셨다.


                                            <좌,우>  현재 수리중인 300년 된 고택

  전쟁 후 마을은 아수라장이 아니었을까? 피난 온 사람들이 살 곳이 없어 선생님 집에서도 30가구 정도 숙식을 함께하셨다. 물이 부족하여 마을 사람들이 마실 물을 걱정하자 집 안에 우물을 개방하여 언제든 물을 떠 갈 수 있도록 하셨다는 선생님. 전쟁이 끝난 후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고민하던 보릿고개에는 부러 떡을 하여 지내지도 않던 고사를 지내고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시기도 하셨다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300년 동안 그 집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 그 집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마을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 하셨을 선생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지금 시대에 이야기하는 마을 활동가란 표현이 당시 심재갑 선생님에게 딱 맞는 단어인 것 같다.

  이 집과 주인은 또 한 번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오랜 역사를 마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고택을 수리 중이라 하신다. 지금도 여전히 선생님과 고택은 마을과 마을 안 사람들과 잘 어울려져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천하시는 중이셨다.

  교통도 통신도 불편하던 시기, 물자도 부족하던 시기의 마을활동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마을 활동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선생님의 마을을 사랑하고 마을 안에 살아가는 사람을 걱정하는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 한 것 같았다.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시간이었고, 작은 것이라도 마을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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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2019-04-03 19:19:06
심재갑 선생님은 인천대에 근무하신게 아니고 인하공업전문대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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