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자’에 대한 단상(短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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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에 대한 단상(短想)
  • 장익섭 현용안
  • 승인 2019.04.02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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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7화 가엾은 시간 - 글 동산고 국어교사 장익섭/그림 동산고 미술교사 현용안


 
최근 학교의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부모님의 세대가 공부하던 그 시절과 비교해 보면 믿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이 변하였다. 교과서도 바뀌었고 선생님들의 생각과 아이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으며 그곳을 채우고 있던 교육문화도 많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교육문화는 ‘야자’라는 말로 통용되는 ‘야간자율학습’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다. 물론 요즘은 학생들의 학습 선택권 보장을 위해 전 학생들을 강제로 밤늦게까지 잡아두던 부모님 세대의 획일적이고 강제적이었던 ‘야자’의 모습은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학교에서 수업시간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시계를 바라보게 한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야자’시간일 것이다.
 
나도 학부모 세대에 가까운 시절의 ‘야자’를 경험하고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옛날처럼 여전히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교사인 나 또한 그 아이들과 함께 밤늦은 시간을 함께 보내곤 한다.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야자’ 감독을 하다 보면 가끔씩, 아니, 자주 ‘저 아이는 왜 여기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곤 할 때가 많다.

물론 정말 시간 가는 것을 아까워하며 자신의 계획대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노트와 잉크가 모자라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집중해서 공부하는 아이들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자습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엎드려 잠이 들어 깨워도 깨워도 졸음을 참지 못하는 아이, 내 눈을 피해 스마트폰으로 열심히 게임을 하다 내가 옆으로 가도 모르고 화면에만 집중하는 아이, 근처 친구들과 필담을 나누며 무엇이 그리 좋은지 마냥 즐거운 표정으로 웃음 짓는 아이. 담배포장지에 그림을 그렸다던 이중섭 화백이 울고 가도 좋을 만큼의 수준급 그림을 ‘낙서’라는 이름으로 책상과 교과서에 채우는 아이. 아이들의 야간자율학습 시간은 이렇게 흘러간다. 무의미하게 책상을 지키며 무의미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만다. 아, 먼 훗날 얼마나 아까운 시간으로 기억될까?
 
차라리 그 시간에 집 안 침대 위에 누워 편히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등교를 한다면, 숨어서 눈치 보며 게임을 하느니 차라리 집 근처 PC방에서 화끈하게 스트레스를 풀고 남는 시간 집중해서 공부할 수 있다면, 몇 글자 적어 희희낙락 숨어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친구들과 함께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아 서로의 개똥철학을 나누며 우정을 쌓을 수 있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 자신들의 가능성만큼이나

 
   
 

넓은 순백의 도화지 위에 자신이 꿈꾸는 세상과 그곳에서의 삶을 그려내면 얼마나 멋있는 시간이 되어 그 아이들의 미래를 빛낼 수 있을까? 이렇게 보낸 시간들이 진정으로 의미 있게 보낸 시간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 아이들의 자습시간이 정말 무의미한 시간들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렇다. 저 아이들이 보낸 시간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저 아이들이 이곳에서 흘려보내는 저 4시간은 자신도 부모님 세대와 다를 바 없이 늦게까지 학교에서 ‘야자’라는 교육문화를 이어온, 이 나라에서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으로 살아왔다는 자기 정체성 발견의 시간이다. 이 아이들이 머물렀던 4시간은 운동장을 가로지르며 바라본 하늘 위 별들을 보며 마치 열심히 공부를 한 듯 착각하게 만들어 자신감을 불러일으킨 자기만족, 자기 위안의 시간이다. 혹시나 이 4시간마저 학교에 헌신하지 않으면 정말 학교에서 공부 안하는 아이라는 주홍글씨가 찍힐 것만 같은 불안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간이다. 어쩌면 저 아이들의 4시간은 무서우리만큼 치열한 경쟁에서 낙오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친 시간들이다. 어쩌면 저 4시간은 자신의 부모가 보내는 현실과 동떨어진 기대감으로 부푼 눈빛으로부터 조금 덜 미안해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시간들이다.

어쩌면 몸서리치게 미안하지만 그 아이들이 보낸 그 시간은 어쩌면 나를 비롯한 기성세대가 ‘노력’과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아이들에게 강요한 시간들이다.
 
‘야자’를 마치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어두운 뒷모습 위로 미세먼지로 뒤덮힌 희미한 별들에게 어느 시인은 하나 하나 이름을 불러줬다던데 나는 그 별 아래를 지나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시간들에게 미안함과 위로의 마음을 담아 하나 하나 의미를 떠올려 본다.
 
세상엔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다만 가엾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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