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김시흔. 2019년 60대의 나이에 <문학와 의식> 봄호에 소설로 등단했다. 그에게는 올해 소설로 등단한 것이 무엇보다 50년 만에 선생님과의 약속을 이루게 된 것이어서 감회가 남다르다. 4월 25일 인천문인협회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늦은 나이에 소설 등단을 하게 된 것이 특이하다. 일찍 등단하지 못한 이유라도 있는지?
춘천중학교 다닐 때 글 잘 짓는 학생을 뽑아 운동선수처럼 백일장에 내보내려 중점 지도를 했다. 내가 그 학교 입학하자마자 1학년 410명이 작문시험을 봤다. '글짓기 선수'를 선발하려고 했던 것이었다. 거기서 뽑혔는데 지도하시는 분이 전상국 선생님(소설가, 김유정문학촌 명예 이사장, 2018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에 피선)이셨다.
선생님은 경희대 국문학과 졸업 전인 1963년에 단편 ‘同行(동행)’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셨고 교직으로 처음 나온신 곳이 춘천중학교였다.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학교 대표로 백일장에 나가서 입상도 하고 어떨 때는 빈손으로 오기도 하면서 3년간 잘난 척해가며 지냈다. 선생님께서 지명하셔서 졸업 연도 교지에 단편소설이 실리기도 했다. 선생님께서는 헤어질 때 “소설가가 되어서 만나자”라고 하셨는데 나는 순진하게도 당연히 소설가가 되는 것으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부친이 군대 전역하시고 사업하시다가 쫄딱 망하시고 그런 여파로 어린 인생이 좀 뒤틀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신춘문예에서도 연거푸 떨어지더라. 젊은 나이에 충격이 많았다. 그래서 글재주가 없음을 자학하면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기로 다짐했었다.
- 이력을 보니 詩(시)로 먼저 등단을 했던데.
그 뒤로 정말로 소설은 아예 쓰지도 않았다. 학교 대선배이신 오재철 시인(현대문학 추천으로 시 등단)께서 “혹시 소설은 아니더라도 뭐라도 쓰냐?”라고 하셔서 보여 드린답시고 드린 시를 선배님이 문예지에 등단을 시켜주셨다. 그게 2003년 만 49세였고 글을 안 쓰겠다고 작정한 지 20년이 지난 늦은 등단이었다. 신춘문예가 아니면 등단이 아니라고 우겨온 주제에 그런 등단이라도 했으니 다시 문학에 정신을 기울일 수 있었음은 뒤돌아보면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지금도 오재철 시인님께는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 그런데 이 소설은 어떻게 해서 쓰게 되었는지?
그걸 말하자면 좀 길어진다. 2017년에 내가 쓴 결혼 축시 ‘두 별이 만나면’을 창작 판소리로 만들어 보겠다며 허락을 요청해온 소리꾼 심예은이 있었다. 시 제목과 같은 국악 창작곡을 만들어 21C 한국음악프로젝트와 대학국악제에서 ‘흥얼’팀으로 경연을 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즐거운 일이 생겼다. 그러다가 작년 10월에 졸업 작품으로 불면증을 소재로 하는 판소리를 만들고 싶다 하더라. 그때는 19년간 같이 살을 맞대고 지냈던 아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가 버려서 한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던 즈음이었다.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고통스러운 불면증을 겪고 있는데 불면증을 소재로 하는 판소리라니…….
사실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소리꾼의 재촉으로 판소리체로 엮을 수 있도록 바탕이 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두 친구의 아들, 딸 결혼식에 부탁받아 썼던 결혼 축시로 시작된 인연은 이렇게 해서 작은 글을 만들게 했다. 아마도 예전 같으면 썼던 글을 그냥 묵혔을 것이나 어려 인연이 겹치고 쌓여 만들어진 글이라서 소중한 생각이 들었다. 그 글을 다듬어 계간 문학과 의식 신인문학상 공모에 냈고 다행스럽게도 소설 부문 신인상으로 선정해주었다. 모두에게 감사한 일이다.
- 등단한 소설의 내용은 무엇인가?
소설 제목이 "잠 좀 푹 잡시다" 인데 현대인의 심각한 불면증에 관한 이야기다.
지방에서 상경하여 오로지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대학을 졸업한 여자 주인공이 또 어렵게 회사에 취직은 했는데 알고 보니 조건부 인턴이었다. 부조리한 현실의 축소판인 이 회사에서 정사원으로 되기 위해 분투를 하지만 뛰어난 능력 때문에 오히려 여사원들의 시기와 심각한 따돌림을 받는다. 지하 방에서 탈출하고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정사원으로 되는 것이 당면 목표다. 따돌림과 그런 생각 때문에 불면증이 갈수록 깊어져 간다. 그러다가 정사원 사내 마지막 시험 전날, 조금이라도 잠을 이루고 면접장에 나가려고 하다가 약물 과다로 사망하게 된다. 죽어서 귀신이 되었지만 억울하다고 외치는 그녀를 가엽게 여긴 염라대왕이 불면증에 걸려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인간을 한 명이라도 구제해오면 인간으로 환생시켜 주겠다고 한다. 뭐 이렇게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실패의 연속, 반전이 있고 결국은 인간 환생으로 된다는 줄거리인데, 내가 글로 써 놓고 말로 이야기를 하자니 매우 어색하기도 하다. 책을 읽어 보면 알겠지 (웃음)
- 그런 소재나 내용이 좀 뻔 하거나 진부하지는 않을까?
그 점에 대해서는 이 글을 쓰면서도 내내 조심한 부분이다. 그러나 사회의 어두운 부분이거나 부조리한 어둠을 심각하게 읊조리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그런다고 어느 날 갑자기 바꿔질 일도 아니다. 어둠과 빛은 항시 공존하는 존재다. 그래서 그냥 사건을 나열하고 경쾌하게 흘러가는 것으로 했다. 이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심사평(심사위원: 김유조 평론가, 김선주 평론가, 정소성 소설가)을 답변의 일부로 하고 싶다.
“근대 리얼리즘 문학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가장 강고하게 믿기 시작한 일종의 미신 같은 것이 바로 서사의 사실성이라는 가설이었다. 문학의 가치는 그 사실성에 있다는 평가체계까지 굳건하게 구축된 가설 말이다 (중략) 이윽고 해체의 시대가 오며 독자들은 만고불변의 리얼리즘 성채를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보기 시작한다. 세상에 사실주의적 재현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김시흔의 소설은 바로 이러한 토대에서 큰 시도, 대단한 실험을 하고 있다. 부조리한 세상의 저변부에 운명적으로 나락해버린 주인공은 고생 끝에 낙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고생을 안고 살다가 어쩌면 생활의 반전을 앞둔 날 저녁에 그만 이 세상을 하직하고 만다. 그리고 귀신이 된다. 귀신이 되었다는 설정에서도 작가는 무슨 변명이나 양해를 구하지 않고 독자들도 그냥 그 설정에 함몰한다.”
- 50년 만에 이룬 선생님과의 약속에 대해 설명을 부탁한다.
중학교 졸업하는 1969년에 전상국 선생님께서 “소설가가 되어서 만나자”라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신춘문예에서 연거푸 떨어지자 아예 소설을 쓰지 않았으니 여태껏 그 약속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이런저런 인연이 쌓여 쓰게 된 글이 등단이 되었는데 햇수로는 50년이 되더라. 참으로 긴 세월이 지나갔다. 이것으로 50년 선생님과의 약속을 이루는 시작이 되었음이 매우 기쁘다. 전상국 선생님께서 이번 등단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를 “축하하오. 새로이 시작한 작가의 길, 그 동안의 어둡고 거친 돌길, 그 모두가 소설 쓰기의 큰 즐거움으로 살아날 것이오. 정말 좋은 소식 고맙소”라고 하셨다. 평소의 소신을 깨고 결혼 주례도 해주셨고 긴 세월 동안 나를 보아오신 분이시기에 해주실 수 있는 좋은 말씀이시다.
- 작가의 이력에는 다른 분야의 예술도 한다고 되어 있던데?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대회에 나갔었다. 중,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님은 한결같이 “미대로 가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소질이 있다고 미대에 가는 것도 아닌 시절이었다. 본격적인 미술은 1998년 노희정 선생님을 만나고서부터 다시 시작했다. 미술단체인 아라회에서 매년 정기전, 수시 작품전을 하고 있고 올해는 창립 10주년 기념전을 5.31~6.6 기간 동안 인천문화예술회관 소전시실에서 크게 열 예정이다.
노희정 선생님은 내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 또 다른 것은 바이올린이다. 춘천중학교 1학년 때 체임버오케스트라가 창설되었는데 바이올린을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학교 글짓기 대표로 활동 중이어서 가고 싶어도 허락이 될 수 없었다. 나의 예술에 대한 분기점은 1998년쯤이 될 것 같다. 바이올린도 그 즈음에 시작했다. 현악기는 늦게 시작하면 취미로 끝나고 만다는데 그러고 싶지 않아서 정말 죽을 힘을 다해 악기 연습을 했다. 심각한 손가락 부상도 입었었다. 오랜 개인 레슨을 거쳐 단원 모집 오디션에 합격하여 부천 신포니에타에 입단했고 2004년 12월 정기공연에서 세컨드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퍼스트 바이올린으로 자리를 옮겨 14년 동안 연주 활동을 했고 단무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도 음악방송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면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그만큼 열중했던 악기였다.
사진 촬영은 20대부터 해왔고 2007년부터 김시흔포토갤러리라는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잘 찍은 사진을 지인에게 선물로 줄 때가 가장 기쁜 일이다. 남들은 너무 이것저것 한다고들 하지만 글쓰기, 미술, 바이올린, 사진 촬영은 나에게는 모두 소중한 예술이다.
- 소설 등단한 작가로서의 앞날에 대하여 이야기해 달라.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큰 만화방에 갔다가 구석에 꽂혀 있던 동화책, 위인전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에 이끌려 만화는 안보고 수십 권 되는 동화책을 모두 읽었다. 그 당시는 내 머리가 총명했는지 읽으면 모두 차곡차곡 저장 되었다. 그런 덕분에 나는 그것을 밑천으로 초등학교에서 아주 유명한 이야기꾼이 되었다. 선생님들이 수업을 쉬고 싶거나 빼먹고 싶으시면 나를 빌려다가 자기 반 학생들 앞에서 한 시간씩 이야기를 시켰다. 레퍼토리는 무궁무진했고 그런 게 싫증나면 각색을 해서 더 재미있게 이야기도 해줬다. 나는 이렇게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이야기꾼이었다. 그러나 총명함도 진지함도 사라지고 나이만 한참 먹은 지금, 과연 진부하지 않은 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려는지 앞으로의 일은 잘 모르겠지만 어릴 적 이야기꾼처럼 앞으로도 독자들이 재미있어하는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
김시흔
1954년 대구 출생, 2003년 《문예사조》 시 등단
한국문인협회, 인천문인협회 회원
화가 그룹 아라회 회원
前 부천신포니에타 단무장 & 1st viol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