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구경하고 입질허러 가는거지. 갈 때도 마땅치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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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구경하고 입질허러 가는거지. 갈 때도 마땅치않고"
  • 김인자
  • 승인 2019.05.21 06: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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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 계산대 총각과 할머니


"나 이거 한 개 줘~~~어."

꽃장갑을 예쁘게 낀 할머니가 빨간 파프리카 하나를 들어 계산원 총각에게 내민다.

"안돼요, 할머니. 그거 한 개에 십 원 띠기에요."

"안되긴 뭐가 안돼. 어서 줘어. 내가 맨날 달래는 것도 아니고."

"진짜 안돼요 할머니. 저희가 장사가 잘되는 것처럼 보여도 남는 거 별로 없어요. 할머니 같은 분이 한 두 분이 아니거든요. 할머니 한테 그거 공짜로 드리면 저희들 오전 장사 말짱 도루묵이예요."

"에이, 무신 소리야~~장삿꾼이 손해본다는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거짓뿌렁 시키지말어어."

"거짓말 아녜요, 할무니 진짜에요.요즘 날이 하두 가물어가지고 야채값이 금값이에요."

"그래도 그냥 줘. 나 돈 없어. 꽁으로 그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덤으로 달라는 건데 그것도 못줘? 동네장사 하면서 그렇게 야박시럽게 장사하믄 못써."

빨간 파프리카 하나를 더 달라는 할머니와 안된다는 계산원 총각 사이에서 이 말 저말이 오가고 할머니는 계산원 총각이 그러던지 말던지 이미 계산을 마친 검정봉투에 빨간 파프리카를 슬쩍 집어 넣으신다.
그러자 계산대에 서있던 총각이 날쌔게 손을 뻗어 할머니의 손에서 검정봉투를 빼앗아 빨간 파프리카를 꺼내 본래 있던 자리에 휙 하고 던져 넣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시던 할머니 금새 풀이 죽으셔서는 가뜩이나 굽은 허리가 더 구부러지셨다.

할머니 뒤에서 계산하려고 차례를 기다리던 나는 할머니의 낙담하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영 안좋았다.
나는 파프리카 상자에서 할머니가 덤으로 달라시던 빨간 파프리카 한 개와 노란 파프리카 두 개를 집어들었다.그리고 계산원 총각에게 내밀었다.

"2000원입니다."
계산원 총각이 웃으며 말한다.

흙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닐건데 할머니에게 덤을 주지 않은 계산원 총각이 왠지 미워서 "아니 무슨 파프리카가 이렇게 비싸요?"하며 괜히 툴툴거렸다.

"할머니, 이거 가져가서 드세요."

값을 치룬 빨간 파프리카를 할머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걸 왜 날 줘? 하는 얼굴로 쳐다보신다.

"할머니, 제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선물? 무신 선물? 색시가 돈주고 산걸 왜 날 줘?"

"저는 빨간 파프리카보다 노란 파프리카가 더 좋아요, 할머니."

"그럼 노란 거로 세 개 사."

"전 두 개면 충분해요, 할머니."
할머니가 거절하실까봐 나는 얼른 할머니 검정봉투 안에 빨간 파프리카를 넣었다.

"젊은 색시 마음씀씀이가 참 고맙네."

조금 전까지도 시무룩해 계시던 할머니 얼굴이 빨간 파프리카처럼 곱게 피어났다.

"와~~할머니 깻잎 많이 사셨네요~~이 깻잎으로 뭐 만드실 거예요?"

할머니의 검정봉투안에는 깻잎말고도 가지도 여러 개 오이는 더 많이 들어 있었다.

"깻잎장해서 먹어볼까하고. 요새 내가 통 입맛이 없어가지구 밥을 못먹어. 그래서 이거라도 해 먹으믄 입맛이 돌까하고."

"잘하셨어요,할머니. 그럼 이 가지는요?"

"이 가지는 테레비에서 박사들이 나와서 몸에 좋타길래 볶아 먹어 볼라고."

할머니가 신바람이 나시나보다. 묻지도 않은 가지볶음 얘기도 하신다.
'말씀이 많이 고픈 할무니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깨순이랑 곰취랑 볶으면 어떤 게 더 맛있어요?"

"어떤 게? 둘 다 맛있지. 근데 난 깻순이 더 좋아. 곰취는 괜히 싫더라고. 근데.
내가 상추를 샀나? 안 샀나?" 내가 산 상추를 보며 할머니가 물으신다.

"제가 봐드릴께요, 할머니."
나는 얼른 할머니의 이동 끌차 뚜껑을 열었다. 걸을 땐 할머니의 지팡이가 되주고 힘들 땐 할머니의 즉석 의자가 되주고 장을 볼 땐 할머니의 시장바구니가 되주는 할머니의 껌딱지 끌차. 뚜껑을 여니 할머니가 산 야채들 속에 싱싱한 초록 상추가 눈에 보인다.

"할머니, 상추 사셨어요."

"그랬지? 내가 요즘에 정신이 깜박깜박 해. 금방 산 것도 잊어버려."
"할무니도요? 저도 그래요. 할무니."
"아이구 젊은 사람이 벌써 그럼 써? 그나저나 이 마늘 실한 것 좀 봐. 나물 볶아 먹을 때 하나씩 까서 넣으믄 참 맛나겠네. 이 마늘 한 망에 을마래? 사천 원이라고 그랬나?"

"할머니, 저 마늘값 잘 몰라요."

"사천원이랬어. 계산하는 총각이."

"사천 원이요, 할머니? 그럼 제가 얼릉 가서 사다드릴께요. 요기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유 그래줄텨? 글치 않아두 내가 다리가 아파서 저기까지 못 가겠다 그랬는데, 참 고마와요."

마늘 한 망을 들고 할머니가 속바지에서 꺼내주신 오천 원을 계산대 총각에게 내밀었다.

"반접은 안 팔아요.한 접에
팔천 원이예요."
"사천 원 아니에요?"
"팔천 원이에요."
"할머니가 사천 원이라고 하셨는데."
내가 하는 혼잣말을 계산원 총각이 들었나보다.
나 한번 쳐다보고 멀리 서 계신 할머니 한 번 쳐다보던 계산원 총각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할머니가 또 잘못 들으셨군."한다.

"할머니, 마늘 한 망에 사천 원이 아니라 팔천 원이예요."

"팔천 원? 무슨 소리야? 내가 아까 총각이 사천 원이라고 하는거  똑똑히 들었는데."

"제가 언제요? 할머니, 이거 백 개에요. 팔천 원도 싼거예요. 사천 원이믄 반 접인데 할머니 어디 딴 데서 보신거 아니세요?" 어느새 따라왔는지 계산원 총각이 할머니에게 말하자 할머니가 펄쩍 뛰신다.

"보기는 어디서 봐? 마늘 살라믄 한 접은 사야지 누가 마늘 반 접을 사. 그르지말고 사천 원에 줘어.아까 덤도 안 줬는데. 어서." "할머니는 아까도 그러시더니 자꾸 우기지마세요."

총각의 얼굴이 확 구겨지는걸 보는 순간 나는 얼른 할머니 귀에 대고 흥정을 하기 시작 했다.
"할머니, 저거 팔천 원도 싼거예요. 저한테는 만 오천 원이라고 그랬어요. 저 총각이요.근데 할머니한테는 팔천 원이라고 하잖아요. 할머니한테는 엄청 싸게 부른거에요."
그러자 할머니가 내 귀에 입을 바짝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래? 그럼 이따 일찌감치 저녁 해먹고 다시 와야겠네."
"여길 또 오신다고요? 할머니?"
"응, 색시도 이따 해질 무렵에 다시 와. 저거 이따 가게 문 닦을 때 되믄 더 싸져. 아마 삼 천 원에 줄지도 몰라.난 운동삼아서 이곳에 하루에 두 번은 꼭 와. "

"나 땜에 괜히 먼길 돌아서 가야되는거 아냐? 여기서 집 어떻게 가는지 알아?"
"그럼요, 할무니. 저희집 여기서 가도 가까워요."

"아닌거 같은데. 이 늙은이 집에 데려다 줄라고 일부러 왔지? 진짜 여기서 집 찾아갈 수 있어?"
"그럼요, 할머니 조심히 들어가세요."
파프리카 할머니를 집에 모셔다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봐요, 이쁜 색시."
뒤돌아보니 할무니가 손짓으로 어서 오라신다.

"이쁜 색시 물김치 좋아하나? 좋아하믄 이거 갖구 가서 먹을텨?"
"아니에요 할무니, 할머니 두고 잡수세요."
"내가 먹을건 한 사발 덜어놨어. 입맛에 맞을거 같으믄 가져가서 먹어. 요즘 세상에 색시 같은 사람 첨봤어. 날도 더운데 그 무건 걸 들고 여기가 어디라고 낯선 노인네를 데려다주고가나 그래."
"그거야 ?제가 할머니가 좋으니까 ?"
"그것도 참? 자식도 늙은 부모 내다버리는 세상인데? 고맙네. 복 받어요. 색시. 그리구 나 욕심 사나운 늙은이라고 숭보지말어. 나 사실 많이 먹지도 않아. 심심하니까 말씨름도 하는거지. 나도 젊어서 오래 장사를 했어. 장사치들 남는 거 벨반 없어. 이거저거 다 떼주고 나면 입에 풀칠이나 하는 정도지. 야채 총각이 파르르하는게 재밌자나. 순순히 달래는 대로 다 주고 사믄 이말 저말 씨부릴 것도 없지. 살 것도 없는데 심심해서 가는 거야. 집에 혼자 있으믄 생전가야 입 한 번 놀릴 수 없으니까. 사람도 구경하고 입질허러 가는거지. 어디 갈 때도 마땅치않고.
그나저나 색시 참 고마워요. 수다쟁이 늙은이 말 막지않고 죄 다 들어줘서 참 고맙네. 한 사날 입 꼭 다물고 있어두 괜찮것어. 고마워요. 조심히 가."

꽃장갑 예쁘게 낀 할머니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신다. 그 모습이 포토라인에 선 여배우같다.
할머니, 건강하게 여름 잘 지내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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