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판단이 항상 옳다'라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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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판단이 항상 옳다'라는 착각
  • 최원영
  • 승인 2019.05.27 07: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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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거친 말, 부드러운 말




 
요즘 정치인들의 극단적인 말로 인해 정국이 계속 파행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꼭 저렇게 거칠게 말할 필요가 있을까?’ 또는 ‘왜 저런 말을 내뱉은 것일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저런 거친 말들이 우리의 일상생활 곳곳에서 쉽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합니다. 직장이나 집안에서도 크게 다를 바가 없으니까요. 한 예로, 엄마와 아빠가 거칠게 언쟁을 하느라 어린 아이를 돌보지 못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됩니다. 부부가 다투던 그때 아이가 넘어져 울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서로 ‘네 탓’을 하며 부부의 언성은 더욱 높아지겠지요.

그런데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그 옛날 먹을 게 없었던 시절에도 부부싸움은 있었을 겁니다. 아무리 부부싸움을 하고 있던 중이라고 해도 잠시 다툼을 멈추고는 배고파 울고 있는 어린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들을 떠올려 보면 이런 다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라는 언쟁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일은 어린아이의 주린 배를 먼저 채워주어야 하는 일일 테니까요.
 
거친 말은 항상 더 거친 말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말이 정당했음을 인정받기 위해 지지층을 모읍니다. 그래서 편이 갈리고, 급기야는 서로를 함께 걸어가야 할 ‘벗’에서 아예 상종해서는 안 될 ‘적’으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갈등하는 사람이나 갈등하는 집단들의 실체적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 이렇게 거친 말들이 난무할까요? 어쩌면 상황에 대한 ‘판단’을 ‘사실’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은 그럴 수가 있습니다. ‘사실’은 객관적인 것이어서 감정이 배제된 상태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판단’은 매우 주관적입니다. 주관적이기 때문에 감정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라는 판단이 담겨 있기 때문에 그 말을 듣는 사람의 자존심이 크게 훼손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때부터는 ‘사실’과는 전혀 다른 왜곡된 ‘판단’이 마치 ‘사실’처럼 다시 군림하게 되어 상대방을 아예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해버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갈등으로 점철된 집단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서로의 자존감이 상할 대로 상해 있어서 대화의 낌새를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해법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려면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판단을 하지 않고 살 수는 없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스스로 경계해야 할 점은, 내 판단이 항상 옳다 라는 착각입니다. 내 판단이 틀릴 수도 있다 라는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을 한하면 상대방의 자존심을 훼손시키는 일은 많이 줄어들 겁니다.
 
「마음의 암호에는 단서가 있다」라는 책에 당나라 말기의 재상을 지냈던 육상선이라는 사람에 대한 일화가 나옵니다. 육상선이 동주라는 곳의 최고 관리로 있을 때, 그가 데리고 있던 어린 몸종이 말을 타고 가다가 육상선의 부하인 참군과 마주쳤습니다. 그 시대의 예법으로 봐서는 하인이 말을 타고 가다가 관리와 마주치면 말에서 내려와 인사하는 것이 예법이었지만, 그 몸종은 웬일인지 말을 탄 채로 참군을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참군인지를 몰라서 지나칠 수도 있었을 것이고, 또는 보지 못했을 수도 있을 테니 이 사건이 그리 큰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참군이었습니다. 자신을 무시했다고 여긴 겁니다. 그래서 몸종의 등짝을 몇 차례 세게 때렸지만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 육상선을 직접 찾아가 말했습니다. “제가 대인께 결례를 범했습니다. 저를 파직시켜 주십시오.” 참군의 이 말은 사실 겉과 속이 다른 말이었습니다. 대인의 몸종에 손을 댄 자신을 벌하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무례한 대인의 몸종을 벌하라는 것일 테니까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육상선은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참군의 말대로 그를 파직시킨다면 자신의 몸종만 감싸고 돈다고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것이고, 그렇다고 참군을 벌하지 않으면 자신이 우유부단한 사람임을 자인하는 꼴이 될 텐니 말입니다.

그런데 육상선은 이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유유히 떠났다고 합니다. “노비가 관리를 만났는 데도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면 때릴 수도 있고 때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한 부하가 상관의 노비를 때렸다면 관직을 빼앗을 수도 있고, 빼앗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정답이 ‘하나’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사람일수록 육상선의 이 모호한 태도를 이해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러나 세상은 오로지 하나의 정답 만이 존재하는 곳은 아닐 겁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당사자인 참군은 무척 신중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실만 이야기하면 관계에서 그리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겁니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판단’한 것, 즉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판단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상대방의 행위를 규정하면 할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봉합될 수 없는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어 갈 겁니다. 그래서 적어도 독자 여러분과 저 만큼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을 경계했으면 좋겠습니다. 더 좋은, 더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자서전에도 이와 비슷한 자기고백이 실려 있습니다. “나는 남의 의견을 정면에서 반대하거나, 내 의견을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심지어는 ‘확실히’, 또는 ‘의심할 여지없이’ 따위의 글이나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에 ‘~라고 생각한다’ 또는 ‘~인 것 같다’라는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누군가가 잘못된 주장을 한다고 해도 나는 퉁명스럽게 지적하지 않았다. 그의 제안이 비록 엉터리라고 해도 그 자리에서 당장은 내 생각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의 생각과 내 생각이 조금은 다르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나의 태도의 변화가 나에게 더 많은 이익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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