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권순영 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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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년' 권순영 판사
  • 허회숙
  • 승인 2019.06.11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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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권용은 교수의 '인간가족'을 읽고 - 허회숙/ 전 민주평화통일회의 인천부희장

 

‘자랑스러운 명문가의 옛 앨범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보면서 단순한 가족사진 이상의 예술성에서 감동과 가문의 품격을 느꼈다는 것’. 권용은 교수의 ‘인간가족’을 읽고 난 소감이었습니다.
 
제가 인하대 교육심리 전공 박사팀에서 권용은 교수를 만난지는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가까이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어 자세한 가족사는 알지 못하면서도 권용은 교수에게서 풍기는 단아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를 은연 중 느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권용은 교수가 펴낸 ‘인간가족’을 읽으면서 ‘아, 이런 가정에서 성장하신 분이었기에 몸에 배인 품위와 권위가 느껴졌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1977년 1월, 권용은 교수는 자신의 대학입시 발표 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권용은 교수가 50세가 되었을 때, 본인이 암에 걸리고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죽음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충분한 애도의 기간을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마음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사진과 책을 정리하며 사방에 흩어진 아버님의 유품과 유작을 모으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0여년 세월 동안의 엄청난 노력과 끈기로 오늘 ‘인간가족’이라는 책을 출판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권용은 교수는 홍익대 상상마당에서 포토 에세이 강의를 수강하시면서 아버님이 남기신 수많은 사진들이 예술적으로도 귀중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전문작가로부터 검증 받았습니다. 또한 중앙대 문예창작과정에 등록하여 글쓰기 공부도 하였습니다. 금년 1월에는 북메이킹 클래스를 통해 책 출판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다 직접 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독립출판사 <신촌책방> 이란 출판사 등록을 하였다고 합니다. 책 디자인, 충무로에 나가서 종이를 선택하고 인쇄하는 과정을 모두 직접 해 내셨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흉내 낼 수 없는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에 ‘인간가족’이란 훌륭한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가족’은 권용은 교수의 아버지 권순영 판사의 일대기를 정리한 것으로 권순영 판사는 보통학교 5학년 때에 동아일보에 실린 춘원 이광수선생이 쓴 〈흙〉이라는 소설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아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문학성이 강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님의 권고를 좇아 법학공부를 하신 후, 해방 후 판사특임시험과 간이법원판사임용시험을 거쳐 1946년부터 법관 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판사로 활동하시면서도 틈틈이 수필을 쓰고 발표하여 1955년 ‘법창의 봄’이라는 수필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자상하시고 낭만적이셨던 판사님은 보이스카우트 활동과 카메라를 메고 다니시며 사진 찍기를 즐기시는 멋쟁이 이셨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4남매는 유난히 따르고 사랑하여, 권용은 교수의 표현에 의하면 ‘부모가 자식에 대해서도 편애를 하듯이 나와 형제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있어서 아버지를 편애하였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멋지고 다정한 모습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낭만적이고 경제관념이 없는 분임에도 정갈한 살림솜씨로 조용히 종가집 살림을 꾸려 갔습니다. 명문가의 따님으로서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가 탁월하였습니다. 명주솜을 넣어 누빈 손주들의 배냇저고리는 지금도 세 딸들의 집에 간직되어 있고, 개성식 보쌈김치와 만두, 겨울냉면은 가문의 자랑스러운 특별 메뉴로 기억되고 있다고 합니다.

판사 권순영의 유명한 판결로는 1955년 한국판 카사노바라고 불리우는 박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십명의 여성들을 유혹하여 혼인빙자 간음의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권순영 판사는 공무원사칭에 대하여는 벌금형, 혼인빙자 간음에 대해서는 무죄판결을 내렸던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 통념으로는 엄중한 처벌이 당연시 되던 분위기였음에도 ‘법은 정조라고 하여 모두 보호하는 것이 아니다. 법의 이상에 비추어 가치가 있고, 보호할 사회적 이익이 있는 정조만을 보호한다’ 라는 시대를 앞서가는 명판결문을 남기어 찬반 양론의 토론이 일어나는 등 사회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6개월간의 미국무성 초청으로 콜럼비아 대학에서 선진사법제도를 공부하고 돌아온 권순영 판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1958년 3월 ‘서울 아동상담소’를 개소하고 초대 소장을 맡으셨습니다. 아동상담소장과 한국아동복지연구회장을 역임하면서 ‘버림받은 십대’를 편찬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1963년 사형제도 찬반 논쟁에서 권순영 판사는 사형제도 반대의 글을 〈동아춘추〉1963년 1월호에 게재하여 또한번 논쟁의 불씨를 지피시기도 했습니다. 이 역시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었습니다.
권순영 판사는 1946년에 시작한 판사직을 18년 만에 끝내고, 1964년 변호사로 개업을 하여 돌아가시는 날까지 변호사로 살았습니다.
 
늘 책을 가까이 하시며 수필집을 발간하시고, 사진을 즐겨 찍으시는 멋진 변호사. 고전 음악과 미술 작품을 사랑하셨던 예술적인 영혼을 지니신 법조인. 양심에 입각하여 시대를 앞서 가는 판결을 하고, 비판을 의식하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소신을 밝히시는 법조인이 권순영 판사이셨습니다.
 
이렇게 맑은 영혼으로 소신있고 양심적인 판결을 내리시는 법조인들이 앞으로도 우리 사회를 이끌어 가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권순영 판사님의 일생을 기린 ‘인간가족’이란 책의 발간을 다시한번 축하드리면서, 가족사를 깔끔하게 엮어내신 권용은 교수의 그동안의 노고와 열정에 깊은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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