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발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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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탄'
  • 조영옥
  • 승인 2019.07.0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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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칼럼] 조영옥 / 인천노인종합문화회관 소통의 글쓰기반 회원

차례

 
남편은 한동안 기력을 잃고 눈만 감으면 한없이 잠을 자서 가족들의 마음을 졸이게 했다. 일주일이면 서너 번씩 가던 대공원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겨우 기운을 차리고 조금씩 회복이 되는 듯하여 마음을 놓으려는데 저녁 밥상에서 느닷없이 아이들한테 한 마디 한다.

“나는 엄마와 남쪽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나련다”
“네?” 아이들은 눈을 둥그렇게 뜨며 동시에 반문한다.
“아버지 안 돼요! 기차 여행이라면 몰라도 자동차 여행은 아직 무리예요. 다녀오셔서 또 병이 나실까봐 마음이 안 놓여요”
 
한마디 던진 남편이 생각지도 않게 아이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머쓱해서 앉아 있다. 모처럼 기운을 차려 남해바다 넘실대는 푸른 물결과 푸릇푸릇한 보리 들판을 바라보며 시원하게 달리고 싶은 마음에 불쑥 건냈는데, 아이들은 제 아버지의 건강을 생각해서 순식간에 반대하고 나선다. 딸이 무안했는지 “가족이 함께 가면 어떻겠어요?”라고 물으면서 아버지의 마음을 달랜다. 자동차에 온 가족이 좁게 타고 다니는 것은 내가 반대한다, “차라리 기차 여행을 가자”라는 남편의 의견에 아이들도 찬성한다. 언제 가는 것이 좋은지 달력을 짚어가며 아들과 딸은 서로의 일정을 맞추어 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러면 차례는 어떻게 하고 가느냐?”
“제가 말씀 드릴게요.”
아들은 선뜻 대답한다.
“아버지는 늘 제사나 차례가 돌아가신 조상님을 생각하고 식구가 다 모이는 데에 의의가 있다고 하셨지요. 저도 거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조금 개선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아들이 진지하게 말을 한다.
“엄마도 허리가 아프셔서 힘들어 하시고 작은 어머니들도 마찬가지고 또 어떤 아이는 여행 간다고 빠지고 차례를 지내고는 서로 바빠 푸근히 이야기 할 사이도 없이 가버리지요.”
아들은 오랫동안 생각해 왔던 제례 의식에 대해 제 속마음의 말을 꺼내 놓는다.
 
지난 설날에도 남편과 아들은 차례를 지내고 성묘하러 가기 바빴다.
“이러면 모이는 의미가 없어요. 그러느니 설 전에 가족이 모두 모여서 조용한 곳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이야기도 해주시고 어른들 함자도 적어서 프린트해서 나누어 주고 돌아가면서 새해에 계획은 어떤지, 꿈은 무엇인지 이야기도 들어 보면 더 뜻있게 보내지 않을까 하는데요…….”
 
동서들도 명절이나 무슨 때에 모이면 “형님, 누구 네는 이렇게 한 대요, 뉘 집에는 이번 정월에 콘도에 가서 차례를 지낸대요” 하면서 은근히 나를 부추겼다. “가만히 있어 봐 내가 틈을 봐서 아주버님께 우리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지내면 어떻겠냐고 여쭤볼게”그렇게 둘러대고는 유교사상으로 완강히 자리 잡고 있는 남편에게 나는 의사를 타진 할 틈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째 동서는 교회에 열심히 나가면서도 지금까지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집안 제사에 늘 협조적이어서 그런 문제로 얼굴을 붉힌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서나 나나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둔한 나이가 되었다. 동서는 손주 복이 넘쳐나서 고만고만한 아이들 다섯 명이나 곁에 머물지만, 동서의 무한한 체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고단한 몸이다. 맞벌이 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엄마 같은 할머니 노릇을 해야 하고 곁에 사는 딸네 손주들 역시 학교가 끝나면 외가로 온다. 두 집에 아이들이 모여서 할머니 혼을 몽땅 빼 놓고 저녁까지 먹어야 제 집으로 간다. 아이들이 쉬는 명절 연휴에는 젊은이만 그런 게 아니라 나이 든 동서 역시 어디론가 붕 떠나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듯도 하다. 그 마음을 나도 읽었지만 동서는 이웃집 이야기로 돌려서 말하고는 했다.
 
“듣고 보니 네 의견도 괜찮은 듯하다. 수일 내 작은 아버지들하고 만나서 의논해 보자구나” 하고 남편이 반승낙을 하듯이 말을 맺었다. 나는 남편이 그게 말이나 되냐고 불 같이 화를 내며 중간에 말을 끊을 줄 알았는데 저렇게 수긍을 하다니… ‘앓고 나더니 저 사람, 마음이 약해졌나?’ 하며 아린 마음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들은 모처럼 아버지와 집안일을 의논하고 제 의견이 받아들여진 것에 대해 흡족해 하는 눈치다. “어머니 연말인데 와인 한 잔 할까요?” 하며 찬장 높이 올려놓은 와인 잔을 꺼내 오고 고기를 구워서 연신 남편과 나의 접시에 올려 준다.

“건강 하세요” “그래, 너희들도 모두 건강하고 하는 일 잘되어라”하며 와인 잔을 높이 들고 부딪치는 어설픈 동작도 하면서 화기애애한 저녁 시간이 흘러갔다. ‘세월이 지나니 우리 집도 변화의 물결을 타려나?’ 아직도 나는 어렴풋한 의구심이 드는데 아이들은 그 정도면 90%는 확정이 되었다 생각했는지 구체적인 계획을 의논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추위를 타시니까 강원도 쪽으로 가지 말고 남쪽으로 행선지를 잡는 것이 어떠냐고 하면서 오랜만에 남매가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 한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듯 했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이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은 아버지가 마지막 결정을 내리셨나? 하고 환한 얼굴로 남편 앞에 섰다.
“내가 어제 잠들기 전 곰곰이 생각하니 너희들 이야기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 다시 이야기 해 보아라” 아들은 어제와 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말한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남편이 “그건 안 된다. 결과적으로 차례를 지내지 않고 간다는 이야기 아니냐?” 남편은 어제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말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조상에 대한 예법을 좀 다르게 바꿔보자는 의미로 말씀을 드렸는데요”
얼핏 당황한 얼굴로 아들이 말을 잇는다. 어제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에 아이들은 ‘이건 무슨 결과지?’하는 표정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는 아침에 해야 한다는 걸 잊었네. 어째 너무 쉽게 통과 한다 했더니…” 하며 딸애가 작은 소리로 내게 말한다.

“그럼, 아버지 뜻대로 하세요”
아들이 순순히 대답을 한다. 순간, 어제 저녁 고기를 굽던 불판 열기와 와인 향에 달구어져 하늘 높이 올라갔던 오색 애드벌룬이 바람이 빠지면서 거실바닥으로 ‘픽’ 하고 나뒹군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보일 듯 말 듯 드리워졌던 소통의 막이 오랜만에 걷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다시 아래로 스르르 내려왔다.
 
“아버지는 모든 것이 자신의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하시는데 바뀌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에요”
아들이 내게 와서 말을 한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운은 떼었으니 아버지가 스스로 결정하셔서 말씀하실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자”

푸른 물결 넘실대는 부산으로 한 바퀴 돌아오자는 가족여행이 “그건 안 된다”라는 남편의 한 마디에 불발탄이 되어 가족들 발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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