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없는 골목길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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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없는 골목길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
  • 최일화
  • 승인 2019.07.19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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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시단] 김윤성 시집 《아무 일 없는 하루》를 읽고 - 최일화 / 시인


나는 청소년 시기 때 한동안 시문학에 심취했다가 진학, 병역, 결혼, 취직 등의 문제로 꽤 긴 기간 시를 잊고 살았다. 30대 중반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 다시 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인으로 등단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누구에게 시를 배운다는 생각은 아예 없었고 종종 문학잡지를 사 보며 혼자 열심히 시를 써보는 게 고작이었다. 그때 내가 만난 기성 시인들의 시는 난해한 시 일색이어서 쉽게 접근할 수가 없었다. 당시 김윤성 시인의 시를 여기 저기 지면을 통하여 종종 읽게 되었는데 시가 어렵지 않고 정감이 느껴져 자꾸 마음이 끌리던 것이었다.

선생의 시는 호흡이 무척 안정되어 있고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시인의 이름은 곧 내 마음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시집 한 권 사서 읽은 적 없이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근래 들어 갑자기 선생의 작품과 근황이 궁금했다. 나는 인터넷을 검색해 선생의 시를 찾아 읽고 인터넷 서점을 방문하여 선생의 시집 두 권을 구입하게 되었다. 81세에 펴내신 《아무 일 없는 하루》와 87세에 펴내신 시선집 《그냥 그대로》이다. 그리고 선생이 2017년 92세로 타계하신 것도 알게 됐다. 시인의 한 생애가 아련하게 마음에 잡혀오는 것이었다.
 

아무 일 없는 하루
 
1
뾰족한 고드름 끝에 맺힌 물방울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다가
끝내 떨어지고야 만다
쪼록!
 
떨어진 자리에 다시 물방울이 달린다
그 물방울이 또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다
쪼록! 하고 떨어진다
 
여기저기서
쪼록! 쪼록!
물방울 떨어진다
아프게 찢기면서 빛으로 흩어진다
 
2
잠든 손녀 곁에서
할아버지는 심심하다
방바닥에 구르는 장난감 나팔을 집어 분다
뚜우-
뜻밖의 큰 소리에
할아버지는 깜짝 놀라
얼른 아기의 얼굴을 살핀다
아기는 쌔근쌔근 자고 있다
뭔가를 훔치려다가 들킨 양
할아버지는 나팔을 방바닥에 내려놓고
가만가만 밖으로 나온다
아무 일 없는 하루
 
3
무더운 여름 한낮
인적 없는 골목길에
어디선가 검은 고양이 한 마리 나타나
바쁜 걸음으로
건넛집 담장 밑으로 사라져간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다
이런 무더운 한낮에
고양이는 무슨 볼일이 있었을까, 담장 너머로
숨소리 발소리도 없이
환상처럼 사라져간 고양이
나에겐 오늘도 아무 일 없었다


 
  이 시는 조용히 주변을 응시하는 노시인의 일상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시인 스스로도 시인의 근황을 잘 나타내 주고 있는 시로 생각하여 시집의 제목으로 선택했을 것이다. 시를 읽으며 조용히 시 속 정경을 떠올려보는 것으로 공감은 우러나고 정서는 고스란히 감정이입이 되어 오는 것이다.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 보았을 혹은 체험했을 극히 평범한 풍경이 시인의 묘사를 거쳐 한 편의 시로 탄생되고 그 시를 통하여 풍경은 선명하게 독자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 시엔 시인과 물방울, 시인과 잠자는 손녀, 그리고 시인과 고양이가 나오는 세 개의 장면이 한 편 시를 이루고 있다.
 
맑고 순수한 세 존재와 시인의 교감은 소박한 풍경을 영원과 우주의 진리와 통합시키는 역할을 해내고 있다. 시에서 철학적인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면 짧은 시 한 편에서도 수십 매 원고지 분량의 의미를 찾아낼 수도 있다. 이 시에서도 동서양의 사상을 인용하여 길게 해설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으면서 바로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 시의 바른 독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런 해설도 없이 독자가 읽고 나름대로 공감하여 감동을 얻는다면 가장 좋은 시 읽기의 방법이 될 것이다.
 

산책길에서
 
살랑살랑 바람 불어
나뭇잎 반짝인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니
온몸이 저려온다
일생에 이렇게 좋은 날 흔하지 않다
소는 저만치 풀밭에 누워
한가히 새김질이나 하고
가끔 꼬리 흔들며 쇠파리를 쫓는다
 
멋지게 구부러진 소나무
외로이 서있는 언덕 위로 뻗은 오솔길
누가 처음 이 길을 걸었던가
오솔길도 자주 걷다 보면
큰길이 되고
큰길도 자주 걷지 않으면
잡초 우거진 황무지로 변한다
여기저기 노란 원추리꽃들
평화로운 햇살 속에
시간은 이대로 멈추어주었으면 싶구나
 
한없이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움에 찬
소의 커다란 눈,
깊이 모를 그 눈, 그 심연深淵
자연의 속마음이 들여다뵈는 그 눈 속으로
나는 한걸음 한걸음 발길 옮긴다.

 

이 시의 배경은 한국의 전형적인 농촌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이규보(李奎報)도 이런 풍경을 읊조렸을 것 같고 조선 전기 김시습(金時習)도 이런 농촌 풍경을 노래했을 것 같은 농촌의 고전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풀밭이 있고 소가 있는 풍경, 그 옆에 소년이 피리를 부는 목가적인 풍경은 그림을 통해서도 옛 시가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내가 청소년 시절이었던 60년대만 해도 도회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소가 있는 풍경은 아주 흔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 이런 시가 쓰이고 읽힌다는 것은 80대 시인의 작품이라고 해도 신선한 감동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모든 유행은 돌고 돈다. 음악이나 패션계에서도 복고풍이 맹위를 떨치기도 한다. 물론 이 시는 사회 전반의 복고적 경향이 아니라 노시인의 개인적 취향의 작품일 뿐이지만 젊은 시인들은 이제 이런 시를 쓰지 않고 또 쓸 수도 없다. 노시인이 젊은 날의 체험을 옛날의 기억을 되살려 썼을 개연성이 높다. 옛 시절의 풍경과 정서를 간직하고 있던 시인이 우연하게 길가에 매여 있는 소를 발견하고 저절로 감흥에 겨워 단숨에 이런 회고조의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종착역
 
“곧 종착역에 도착합니다
유쾌한 여행이 되셨는지요
잊으신 물 건 없이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차내 방송이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선반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
자다가 깨어나 코트를 걸치는 사람
먼저 내리겠다고 출구 쪽으로 가는 사람
차 안은 갑자기 부산해졌다
 
나도 내리긴 내려야 할 터인데
이대로 내려도 되는 건지
정말로 잊은 것은 없는지
뭔가 아쉽고 허전하여
주머니 속의 차표 한 장
만지작만지작 확인하면서……

 

나는 근래 80대 시인들의 시를 비교적 많이 읽었다. 최재형 시인, 김종길 시인, 김남조 시인, 홍윤숙 시인, 신경림 시인… 그분들의 시를 읽으며 한결같이 느끼는 것은 긴 인생을 관조하며 달관의 경지에 이른 듯 삶과 죽음을 담담하게 바라본다는 것이다. 죽음을 인간의 숙명으로 겸허히 받아들이고 생명현상의 한 과정인 죽음을 통해 인간의 숙명을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여 본다는 것이다. 생에 대한 강렬한 의욕이나 사회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 보다는 주변의 사소한 사물이나 자연 현상에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는 점이 공통점인 것 같다.
 
시집 《아무 일 없는 하루》에서 제 2부는 죽음에 대한 시인의 성찰과 상념이 짙은 시들로 채워져 있다. 죽은 아내에 대해 회상하는 시를 비롯하여 제목 <시드는 꽃>을 비롯해 16편의 시 모두가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이 시 <종착역>도 시집의 2부에 실려 있다. 이 시를 읽으면 죽음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여행자가 목적지에 거의 도착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그건 표면적인 관찰이고 이 여행이 바로 인생이라는 여행임을 금세 알게 된다.
 
제 1연에서는 이제 하차하려는 사람들의 허둥대는 모습이 나타나 있고 2연에서는 화자가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돌아보며 뭔가 미진한 마음에 하차를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 준다.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아무런 미련 없이 홀가분하게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실로 종잡을 수 없던 삶, 온갖 갈등과 애증과 희로애락에서 파생되는 감정의 기복을 헤치며 살아온 인생에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종착역에 이르러 한 생에 대한 아쉬움과 허전함을 노 시인은 이렇게 조용히 시작품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 김윤성(1926~2017): 시인. 서울에서 태어났다. 주요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산길》 《예감》 《애가》 《자화상》 《돌의 계절》 《돌아가는 길》 《깨어나지 않는 꿈》 《저녁노을》 시선집에 《김윤성 시선》 《바다와 나무와 돌》 《그냥 그대로》 한국문학가협회상, 월탄문학상, 대한민국예술원상, 청마문학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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