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평도 대포 터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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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대포 터진 날'
  • 신은주
  • 승인 2010.12.02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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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에 사는 '인일여고 임시학생'이 쓴 글, 잔잔한 파문

연평도에 살고 있는 이하늘(고교 1학년) 학생이 임시로 인일여고로 와서 공부하면서 북한의 포격 당시를 글로 써내려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다음은 이 양이 쓴 글의 전문.

    
2010년 11월 23일, 모의고사 시험을 보고 있을 때부터 대포소리가 나서 시끄러웠다.

군인들이 부대에서 사격연습을 한다고 하길래 점심시간 때도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으러 아이들과 뛰어서 급식실로 갔다. 점심을 먹고 다시 시험을 보는데 대포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그런데 점점 더 대포소리가 커지더니 창문이 깨질 것 같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밖을 내다보니 마을에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너무 놀랐다. 군인의 실수인 줄 알았는데 또 다시 대포가 마을로 날아왔다. 그 순간 모두 소리 지르며 반에서 뛰어나왔다. 나는 무서워서 복도에서 귀를 막고 쭈그려 앉아 있었다. 겁이 나서 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같은 반 남자애가 같이 대피소로 도망가자고 소리를 쳐서 그 애랑 같이 학교 바로 안에 있는 대피소에 들어갔다.

내 신발이 EXR이라서 도망치면서 챙겨 나왔다 그런데 대피소에서 운동화를 신은 아이는 나 혼자였다. 대피소에서 교복은 움직이기 불편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아까 같이 도망을 친 남자 아이가 자기 옷을 벗어주겠다고 했다. 겨울이라 춥다고 추리닝 3개를 껴입은 그 아이는 내게 바지 한 개를 벗어주었다. 휠씬 편했다. 그리고 고마웠다.

우리는 대피소에서 북한군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생활할까? 밥은 어떻게 먹지? 그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불안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나는 가족이 걱정되어 문자로 ‘대피소로 피해’라고 보냈다. 약 2시간 뒤 인천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다. 세은이는 학교에 핸드폰을 내기 때문에 받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그 뒤로 전화는 불가능했다. 북한이 우리 통신망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계속 대포가 터졌다.

얼마 후 마을방송으로 전쟁이 났으니 대피소로 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17년 살고 죽는 것 같아 서러워서 엄청 울었다. 그런데 내가 우니까 중학생 아이들도 울어서 나는 눈물을 얼른 그치고 아이들을 챙겨주었다. 잠시 후 고깃배를 가지고 있는 주민들이 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아이들이 한 명 한 명 가고 몇 명만 남았다.

한참 후, 아빠가 나를 가족들이 있는 대피소로 데리고 갔다. 집 걱정을 하는 고모가 혼자 집에 가신다고 해서 나는 고모랑 같이 고모집으로 갔다. 산에서는 불이 붙고 폭탄이 떨어진 자리는 바로 구멍이 생기고 학교 앞에는 폭탄이 터지고, 그 모든 일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인생이 이렇게 훅 가는구나 그 생각이 들었다. 고모집의 불씨가 꺼진 후 고모와 마을을 돌아다니며 어르신들을 대피소로 모셔다 드렸다. 연평도 어르신들은 전쟁이 났는데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모르고 계신 분들이 많아서 내가 도와 드렸다. 모두들 인천으로 피난을 가느라고 난리인데 우리 가족은 피난을 가지 않고 있었다. 집이 무너졌는데 무슨 집을 지킨다고 안 가는지 나는 가족들을 설득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전쟁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나중에 아빠는 나랑 동생을 먼저 인천으로 보내고 이틀 뒤에 인천으로 오셨다. 우리 아빠는 시민상을 받아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앞가림에 급급할 때 아빠는 대책회의에 참여하고 주민들을 챙기며 계속 돌아다니셨다. 현재 고모와 고모부는 공무원이라 아직도 연평도에 남아 있다. 마음이 편하지 않다.

나는 현재 인일여고에 임시학생으로 와 있다. 내 친구들 중 일부는 인천영어마을에서 심리치료도 받으면서 생활하고 있다. 모든 것이 다 순식간에 일어났다.

폐허로 변한 연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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