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문화'와 '강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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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문화'와 '강간범'
  • 박교연
  • 승인 2019.08.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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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박교연 / '페이지터너' 활동가


지난 7월 9일 발생한 강지환 준강간은 철저한 계획범죄다. 사건 발생 직후, 그는 대인배 행세를 하며 피해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지도록 거들었다. 최초 보도 당시 여성 2명을 동시에 성폭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피해자를 꽃뱀으로 매도하는 2차 가해가 많았는데, 강지환이 이를 언급하며 “오빠로서 미안하다”라고 말하자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는 가속화됐다. 피해자들이 대중으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는 사이, 피해자가 속한 업체 팀장은 회유를 가장한 협박으로 피해자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이후 발뺌할 수 없는 물적 증거와 전파 문제로 신고할 수 없었던 정황이 드러나자, 강지환은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술에 만취한 상태라 기억이 잘 안 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처럼 강간범은 자신이 남긴 증거가 어디까지인지 정확히 알고, 피해자가 방어할 수 있는 정황과 방어할 수 없는 정황을 정확히 파악해 법정대응을 시작한다. 절대적 물증이 남아있지 않는 한 범죄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부정할 수 없다면 심신미약을 주장한다. 3일 전, 죗값을 달게 받겠다는 강지환은 다가올 첫 공판을 앞두고 대형로펌 변호사 4명을 선임했다. 사실 죗값을 기꺼이 받겠다며 사죄해놓고, 최선을 다해 법적대응을 시작한 강간범은 강지환 뿐이 아니다. 불법촬영 범죄로 전 국민을 경악에 빠트렸던 정준영이 역시 그렇다.
 
7월 16일 첫 공판에서 정준영은 물적 증거가 있는 불법촬영 및 유포에 대해선 인정했지만, 2016년 3월에 벌어진 집단 성폭행은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대신 재판부에 “수사 과정에서 대부분의 증거가 카톡 내용과 진술 증거인데, 처음 카톡을 복원하는 과정에 개인정보법 위반의 여지가 있다. 위법하게 수집된 증거면 효력이 없다”는 취지의 의견서를 냈다. 같이 재판 중인 최종훈도 같은 진술을 했다. 둘 다 지난 3월 사건이 알려진 직후 쓴 사과문과 정확히 반대의 진술이었다. 처벌을 달게 받겠다는 최종훈은 심신미약을 강조했고, 정준영은 메신저 대화 내용을 인정하면서도 증거 채택에 이의를 제기했다.
 
강간범이 사죄하기보다 합의와 심신미약을 강조하는 건, 개인의 부도덕성과도 연관이 있겠지만 우리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강간문화와도 관련이 깊다. “합의했다”라고 우기다보면 강간범은 어느새 '강간연대'의 지지 뒤로 숨어 꽃뱀에 물린 피해자 행세를 하며 자연스럽게 다시 TV에 나타난다. 대표적인 예가 박유천이다.
 
2016년 6월 박유천은 화장실에서 한 여성을 강간했고, 그 사실이 알려지자 같은 일을 겪은 피해자들이 연달아 고소장을 접수했다. 하지만 여성 속옷에 박유천의 DNA가 있었음에도 법원은 강제성을 입증할 수 없다며 4건에 모두 무혐의 판결을 내렸다. 박유천은 무혐의 판결을 받자마자, 곧바로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고발했고 꽃뱀 피해자 행세를 하며 케이블 TV나 유튜브에 얼굴을 내비쳤다. '강간연대'는 박유천을 반겼고 그의 억울함 만을 조명했다.
 
'강간문화'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공격성이나 폭력성을 지지하고 장려하는 문화다. 인류는 여성의 몸을 사용하여 남성중심 연대를 강화해왔다. 강간은 유희가 됐고 '강간문화'는 구성원들의 침묵과 방조로 인하여 널리 퍼져나갔다. 일찍이 수잔 브라운밀러는 1975년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책을 저술하며 강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타파하고자 했지만, '강간문화'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다각도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좋으면서 싫다고 한 거야. 나중에 자기도 즐겼어”라며 강간을 강간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고, “술 먹고 한 실수겠지. 부족한 게 없는 사람이 왜 그랬겠어.”라며 강간을 묵인한다. 심지어 “집으로 초대했으면 허락한 거지. 싫다고 진짜 그만두면 남자도 아니다.”라며 강간을 조장하기도 하고, 피해자를 향해 “뭐 입었어? 술 준다고 그걸 마신 거야? 이거 거짓말 아냐? 꽃뱀 아니야?”라는 등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한다.

피해자를 비난하지 않더라도 “이 바닥 좁아. 너 무서워서 어디 일하겠냐? 가해자랑 얘기해서 잘 풀어봐. 그래봤자 너만 손해야. 사회생활하려면 감수해야지. 좋게 넘어가.”라는 말로 피해자의 문제제기를 틀어막는다. 또한, 이건 범죄가 아니라 남녀 둘만의 문제이자 사생활이라며 강간 범죄 자체를 부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강간은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다. 여성 폭력사건 전문 변호사 조디 래피얼은 자신의 저서 <강간은 강간이다>에서 가해자의 책임은 줄여주고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범죄는 오로지 강간이나 가정폭력 같은 여성 관련 범죄뿐이라고 말한다. 법원이 구속영장을 두 차례 기각한 폭력 남편이 결국 아내를 살해한 사건이나 ‘#OO_내_성폭력’ 폭로 사건에서 보듯이 많은 경우가 한 명의 괴물이 아니라, 이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강간문화'와 알고도 침묵하는 권력의 카르텔 속에서 발생했다. 그러므로 '강간문화'는 필히 바뀌어야한다. '강간문화'가 남아있는 한 강간범은 '강간연대' 뒤로 숨을 것이고, 피해자는 2차 가해로 계속 고통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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