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만큼 겸손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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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만큼 겸손한 인간
  • 이김건우
  • 승인 2019.09.3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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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칼럼] 이김건우 / 서울시립대 3학년, 교지 편집장

여기서 모르는 만큼 겸손한 인간은 어디 있나요

지하철 빈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이어폰을 끼고 페이스북을 켰다. 백일장이라도 열린 듯 모두가 한 이슈에 관해 자기 생각을 포스팅하는구나. 한 달만 지나면 누군가는 글을 몰래 지우고 입을 싹 닫을 것이다. 페이스북에 틀릴지도 모르는 글을 자신 있게 쓰면 누가 원고료라도 주나? 솔직히 나도 한 가락 얹어보고 싶지만 곧 틀릴지도 모를 소리를 할 자신은 없다. 저 이슈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9.21 기후위기 비상행동 집회에도 좀 더 관심을 주면 좋을 텐데… 한낱 인간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면 뭐하냐. 멸종될지도 모르는데.
의식의 흐름대로 페이스북 피드를 넘기다가 이어폰에는 몇 년 전 노래가 흘러나왔다. 한때 인기를 끌었던 우원재의 노래였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데요. 여기서 모르는 만큼 겸손한 인간은 어디 있나요." 이거다.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나도 백일장에 껴야겠다.

 


ⓒ엠넷

 

아는 것이 힘이다

못 배운 한이 크셨던 부모님께서는 교육열이 남다르셨다. 한국 부모님들은 모두 교육열이 남다르시니 우리 집이 남달랐다고 하긴 어려울 수도 있겠다.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없는 살림에 학원 하나는 꼭 보내셨다. 학원을 빼먹고 학교 앞 문방구에서 오락기를 신나게 두들기고 오면, 신나게 두들겨지며 여러 꾸중을 들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씀도 그 꾸중 레퍼토리의 하나였다. 대학에 가지 못하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한다며, 공부해서 출세해야 된다는 맥락에서 나온 말씀으로 기억한다. 대들고 싶었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에 반박하긴 어려웠다. 내 또래라면 누구나 겪어봤을 일이다.
우원재의 노래를 듣고 나니, 공부해서 출세하라는 말인 줄로만 알았던 “아는 것이 힘이다.”를 새삼 고민하게 되었다. 아는 것이 정말 힘이야? 이 문장에서 ‘아는 것’이란 무엇일까? 이 말을 처음 외친 베이컨은 사변적인 철학을 거부하고 경험과학으로 입증 가능한 것만 아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입증 가능한 것만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험적으로 입증 가능하면 정말 확실한 앎일까? 그렇지 않다. 경험과학이 과학적 법칙·사실을 도출하는 방법은 수없는 실험과 관찰이다. 경험과학자들은 수많은 사례를 통해 법칙·사실을 도출한다. 하지만 반례가 하나라도 나오는 순간 이 법칙은 무너진다. 이러한 귀납적 추론이 완벽한 앎을 보장해줄 수는 없다.

완벽한 앎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경험과학은 사실 객관적이지도 않다. 경험과학의 앎은 객관적인 체하지만 사실 주관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 ‘과학주의’다. "아는 것이 힘"라고 하지 않는가. 처음 이 선언을 한 베이컨은 과학적 지식을 통해 자연을 정복하길 바랐다. “아는 것이 힘”이라 꾸중하신 부모님도 내가 배움의 칼로 타인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길 바라셨다. 다시 말해, 힘을 위한 앎은 여러 폐해를 낳는다. 베이컨의 바람대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였지만 2019년인 지금, 인간이 30년 뒤에도 이 자연에서 살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은 어떠한가. 모든 것을 경험과학의 앎으로 만들려는 노력은 수치화·계랑화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계산할 수 없는 것들, 계산해서는 안 되는 것들까지도 억지로 실증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세계 곳곳 똑똑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말하는 ‘인간 소외’다.
 

침대도 과학인 사회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그의 선언 이후 전개된 근대 사회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자연, 더 나아가 다른 사람을 정복해나갔고, 이 흐름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굳이 어려운 말로 풀이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과학을 힘으로 부리는 사회에서 살고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침대마저도 과학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무엇이 좋다고 이야기하거나 무엇이 반박 불가능함을 이야기할 때, 농담 삼아 “00은 과학이지~”라고 이야기한다. 또 경험과학과 거리가 먼 학문에도 쉬이 ‘과학’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지 않는가. ‘사회과학’, ‘과학적 사회주의’, ‘인문과학관’처럼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일이 ‘과학’이라고 우기기 바쁘다. 자신이 확실하고 유용한 지식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 위함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경험과학의 한계와 그 폐해가 명확하다.

침대도 과학인 사회에서 과학도 아닌 것들의 과학주의적인 태도는 경험과학의 과학주의만큼이나 심각하다. 차라리 진짜 경험과학만 과학이라고 으스대면 모를까. 나의 페이스북 피드에는 아직도 편협한 표본에서 귀납적 추론을 거친 시사‘과학’들이 싸우고 있다. 자신의 말이 법칙인 양 말하다가 틀리면 몰래 글을 지운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이슈가 터지면 또 자신의 시사‘과학’을 설파하기 바쁘다.
 

모르는 만큼 겸손한 인간

다시금 우원재 노래를 돌려 듣는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라는데요. 여기서 모르는 만큼 겸손한 인간은 어디 있나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 아는 것이 힘? 다 좋다. 과학은 인간에게 좋은 도구다. 경험과학은 완벽한 앎을 보장해주진 않지만 그럴싸하고 현실에 들어맞는 믿음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이 믿음이 절대적·객관적이라 여길 때 생기는 문제가 곧 현대사회의 문제 전부 아닐까. 비단 경험과학의 폐해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경험과학의 잣대를 들이댈 수 없는 것에 관해서도 과학주의적으로 말하는 태도 역시 문제다. 우리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항상 틀릴 수 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아는 것을 맹신할 때, 그것은 폭력이 된다. 모두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할 줄 아는 겸손함을 갖길 바란다. 자연 앞에서 겸손해야 하고, 논쟁 앞에서도 겸손해야 한다.
쓰고 나니 이 글도 부끄럽다. 말할 수 없는 것에는 말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다만 나는 꼭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틀리면 수정하는 겸손한 인간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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