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우리가 잘 가꾸어 자식들이 좀 편하게 살았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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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우리가 잘 가꾸어 자식들이 좀 편하게 살았으면..."
  • 정혜진
  • 승인 2019.11.13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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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의 마을 탐험기]
(9) 마을의 선배 시민을 만나다 - 정혜진 / 마을교육공동체 '파랑새' 대표

<인천in>이 과거 주안염전(미추홀구 주안·도화동, 서구 가좌동, 부평구 십정동 일대)을 중심으로 펼쳐졌던 염전골 마을 탐험기를 연재합니다. 1909년 전국 최초로 시험 염전이 만들어져 1965년 경인고속도로 건설과 함께 폐쇄될 때까지 이 일대는 염전 고유의 마을 문화권을 이루었습니다. 이제 잊혀져가는 그 뿌리를 찾고 이 일대 형성된 마을 공동체를 찾아 이야기를 나눕니다.

 


    <(좌)과거 1947년 항공사진과 (우)2016년 항공사진>

 

과거 우리 마을이 천일염전이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이다. 바로 주안염전. 오늘은 우리 마을을 먼저 살아가고 계신 선배시민이 들려주는 마을이야기를 전해 본다. 주안에서 60년 이상 살고 계신 이정례 어르신을 인터뷰했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을 피해서 이주오신 어르신은 생계를 위해 안 해본 일이 없다. 먹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염전은 먹거리를 제공하는 공간이었고 삶을 유지 할 수 있는 삶터였다. 그곳 바로 옆에 터를 잡으신 어르신은 그 때의 기억을 곰곰히 되살리셨다.

4살에 전쟁을 피해 주안으로 피난오신 어르신은 그때 부터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마을에서 작은 상점을 하며 가족들과 함께 살아가고 계시던 그때... 찬이 없을 때는 마을 앞 저수지에 나가 조개를 캐오기도 하고 해초를 뜯어 다 반찬으로 해 먹기도 하였다. 한 번씩 밤에 불을 비추며 나가면 나무재 위에 달랑 달랑 매달려 있는 게를 잡을 수 있었고 그것을 가져다 반찬을 해 먹었는데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하신다.

 

                      
                    마을 역사에 대해 이야기 해 주시는 이정례 어르신
 
그렇게 어른이 된 후 마을에서 결혼을 하고 정착을 하신 어르신은 본격적으로 마을활동을 하셨다. 70년대 5,6공단이 들어오고 마을이 정돈되기 시작하는 그때 우리 마을에는 없는 것이 참 많았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수선한 마을이 상상이 되었다.

그때를 생각해 보면 참 열정적이었단다. 마을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마을의 여자들이 모두 나와 일을 도왔다. 필자도 어렸을 적, 엄마의 많은 마을 활동이 어렴풋 생각이 난다. 부녀회란 이름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함께 해결해 나갔다는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때는 결혼식장도 없고 장례식장도 없으니 당연히 각 집마다 그런 일들이 큰 일이었다며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온 마을사람들이 십시일반 도와 일을 처리 했다고 이야기 하신다.

한번은 마을에 동사무소가 들어서는데 예산이 적어 책상도 부족하고 집기도 부족하여 부녀회에서 마을 유지 분들을 찾아다니며 상황 설명을 하고 기부를 받아 텔레비전과 집기를 들여 놓았다고 이야기 하시는 어르신... 마을에 도로 포장을 하는데 가로수를 심을 사람이 없다고 하여 하던 일을 미루고 각 집마다 나와 도로의 가로수를 손수 심으시며 하신 생각은 '잘 가꾸어서 자식들이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라 하신다.
 
 

     <선배 시민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도시와 그늘을 선물해 주는 도심의 나무>   

    
우리 마을은 더디 발전되어서 그때 어르신들이 손수 하나하나 만든 것들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거주하는 집이 재개발이 되어 이사를 가야 하지만 마을 구석구석 손때가 많이 남아있고 추억이 많아 이 마을을 떠나기 아쉽다고 하신 어르신은 바로 옆 동네로 이사를 하셨다.

어르신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하며 현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으로 나는 마을에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나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많은 것을 벌기위해 일하는 것 말고, 우리는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줄 마을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것인지? 자문해 보는 시간이었다.
 
사실 어르신들을 인터뷰하기 전에 나는 국가나 사회에서 도로를 만들고 집들을 만든거라 생각하고 지금의 사회를 너무 당연히 생각 했던 건 아닌가 반성도 들었다. 지금 우리가 편히 살 수 있는 이유는 마을을 위해 노력하신 많은 분들이 계셨고 사람이 조금 더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고자 하는 많은 분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한 것이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예전에는 당연했던 것들이 지금은 법으로 제도로 만들어져서 마을사람들에게 뿌려지고 있다. 품앗이로 농사를 짓던 우리 선조들은 알아서 서로 돕고 살아갔으나 지금 우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지며 옆집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러운 형국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또 다시 공동체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함께 할 수 있도록 행정에서 앞서고 있다. 또 주민참여제, 주민자치위원회등 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을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 할 수 있도록 제도화 시키고 있다. 과거 마을 어르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결정하던 다양한 분야를 지금은 마을 사람들이 참여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형성되지 않기에 주민참여제 주민자치위원회란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 형국이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현재 발전하고 있는 것인가? 후퇴하고 있는 것인가? 우리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안전하고, 지금보다 행복한 마을을 물려주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나만 아는 이기심이 아니라 함께 사는 마을을, 함께 만들어가는 마을을 고민하고 실천해 나아가는 것이 아닐까? 그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성장할 때 자연적으로 배움이 일어나 성인이 되었을 때 마을의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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