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역사가 키운 맛밤, 율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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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역사가 키운 맛밤, 율목동
  • 유광식
  • 승인 2019.11.14 22: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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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유람일기]
(17) 율목도서관 일대 / 유광식
율목공원 중앙의 고래가 사는 물놀이 시설, 2019ⓒ유광식
 


주말에 자유공원을 가면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공원은 인천항에 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찾는 첫 관문으로, 방문객들은 자유공원에서 내항을 바라보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이곳은 멋진 전망대 역할을 하지만, 보다 조용한 곳을 원한다면 동쪽 건너 율목공원에 가보는 건 어떨까. 공원이 있는 율목동(栗木洞)은 먼 옛날 부촌이었다고 하나, 지금 보면 얼핏 경동에 묻히고 신흥동에 가려져 외진 구석이 있다. 사실 두 동보다 높은 지대에 자리해 노출된 곳인데도 말이다. 빌라 천국 율목동 중앙에 자리한 율목공원은 숱한 사연이 묻힌 채, 이젠 숲이 있는 작은 놀이터가 되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히 찾는 공간이 되었다. 

율목동으로 가는 길은 사실 평탄하지 않다. 동인천역에서 내려 야트막한 산을 오른다는 느낌이니, 주민 이외에는 쉽게 가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어쩌다 길을 잘못 들어선 자동차가 ‘여긴 어디지?’라고 하거나,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자신만의 숨겨진 도서관 열람석을 찾아가는 루트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경로 중에서도 인천기독병원 뒤편 골목을 통해 성산교회 후문을 가로질러 도서관으로 들어서는 길을 선호한다. 산 정상에는 도서관이 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때 정미소를 운영했던 리키타케의 별장이었다. 드넓은 밤나무골 꼭대기에 전망 좋은 집을 지었으니 조선인들의 원망이 얼마나 컸을까 싶다. 본채 자리가 율목도서관이고, 별채 가옥을 리모델링하여 어린이도서관으로 조성했다. 율목도서관은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도서관이었는데, 시립도서관이 구월동으로 이사를 한 후 율목도서관으로 개명한 지 9년이 흘렀다. 접근이 까다롭지만 사색하기 좋은 작은(or 큰) 도서관이다.

 

흡사 작은 밀림과도 같은 옛 리키타케 별채 앞, 2019ⓒ유광식
 


도서관 앞마당은 신흥동이고 뒷마당이 율목공원이다. 공원에는 어르신도 보이고 이곳이 풀장이었음을 증명하듯 어린이 물놀이시설도 갖춰져 있다. 공원의 수목 중에는 밤나무골 아니랄까 봐 밤나무가 군데군데 심겨 있다. 이곳이 풀장 이전에 일본인들의 묘지 및 화장터였음은 알만한 사람이면 알 것이다. 지금은 그런 분위기는 없지만, 북쪽 기슭의 움푹 팬 장소라는 점이 다소 상상을 부추긴다. 근처에는 경아대(景雅臺)라는 초창기 국악회관 역할을 했던 곳이 있다. 명필 박세림 선생이 쓴 현판을 달고는 지금도 국악 연습이 활발한데, 문 앞에 서니 ‘아리랑’이 선창 되고 있었다. 경아대 바로 위쪽에는 점자개발로 유명한 송암 박두성 선생의 생가 표지석이 있는데, 이는 귀중한 역사의 한 톨이었다. 표지석 뒤로는 문인석 세 개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는데,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위치가 어색했으나 내막이 소중했다.   
 



율목공원 끄트머리 밤나무 아래 자리한 송암 박두성 생가터 표지석, 2019ⓒ유광식

율목공원 중턱에 자리한 인천 국악의 산실인 경아대, 2019ⓒ유광식


최근 멧돼지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 매개체로 뭇매를 맞고 있다. 그래서 멧돼지 덫까지 나오곤 했는데, 공원에 작은 덫이 있었다. 의문은 금방 풀렸다. 너구리가 출몰한다고 한다. 난데없이 웬 너구리인가 싶은데, 놀란 주민이 적잖이 있었던지 현수막이 너무도 빳빳하고 정갈하게 붙어 있었다. 유유자적 고양이들은 몇 마리 봤는데 자칫 그들이 덫에 걸리지는 않을까 돌아서며 걱정했다. 

 

단아하게 치장된 오래된 가옥, 2019ⓒ유광식

전력량계로 점쳐보는 검은 유착관계, 2019ⓒ유광식

 

자유공원만큼의 편의시설은 없지만, 주택가 한가운데에 도서관이 우뚝 있어서인지 고즈넉하다. 도서관 앞 등나무 아래 의자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새소리가 그동안 쌓인 자동차음을 몰아내고 있었고, 바람은 슬쩍슬쩍 어깨를 치며 도망을 간다. 건물에 가려 조금 답답해도 도서관 앞뜰은 내항을 전망할 수 있는 파노라마 풍경 스팟이다. 답동성당의 종탑과 월미산도 보여 한껏 사색하기 좋은 공간임을 느낄 수 있다. 일본인의 별장인 만큼 일본식 정원도 살짝 엿볼 수 있는데, 어린이도서관 앞에는 당시의 돌조각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고 건물을 빙 둘러 길이 조성되어 산책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따뜻한 날이면 벤치에 앉아 가족끼리, 연인끼리, 친구들과 소곤거려도 좋을 것 같다. 어린이도서관 내부에 들어가면 오래된 주택 내부 구조를 살펴볼 수도 있다. 

 


신흥동(좌)과 율목동(우)을 가르는 율목도서관 앞 담장 아래 길, 2019ⓒ유광식

율목도서관 앞 담장 아래, 2019ⓒ유광식
 


시끄러운 곳에서 무엇 하나 생각하기 힘든 반면 조용한 곳에서는 차근히 사색할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일까. 간결한 율목공원과 차분한 도서관이 서로 참 잘 어울린다. 가끔 비가 내릴 때나 겨울철에 잠시 들러 지친 삶을 내려두고는 어떤 다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도서관 화장실도 이용하고 책도 하나 빌려 오는 여유가 더해지면 금상첨화다. 

 

율목도서관 앞 등나무 아래 휴식처, 2019ⓒ유광식

 

 


도서관 돌담 아래 배 볼록 좁은 길은 기록상 김구 선생이 탈옥하면서 지났을 수도 있는 길이다. 점심 후 1~2회 오가면서 김구 선생을 떠올려보고 따뜻한 햇볕에 찌뿌둥한 기분도 말려 보면 어떨까. 한편 공원 아래 옛 BBS건물(청소년회관)은 50년 수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주민들은 이곳에 주민자치센터가 세워지길 바란다고 하는데, 언제쯤에야 ‘센터’ 건물이 주차할지 좀 더 기다려봐야겠다. 율목공원은 마을 안 단맛 가득한 공간으로 익어가고 있다. 이곳은 마치 따가운 가시 속 맛깔 나는 알밤을 간직한 밤송이처럼 까칠하면서도 다정하다.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율목도서관, 2019ⓒ유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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