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와 '700유로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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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와 '700유로 세대'
  • 김정화
  • 승인 2011.01.11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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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김정화 / 문학평론가 · 가천의과대 교양학부 겸임교수


지난해 3월 고려대 교정에 나붙었던 '김예슬씨 선언'

유럽의 '700유로 세대'

"춥고 작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 너를 봤어
10시간의 일을 마치고 잠시 쉬려는 너를 봤어
수많은 꿈들이 바래지면서
비겁한 700유로 월급쟁이가 되는 걸 참을 수 없어"

최근 남부 유럽 그리스에서 유행하고 있는 노래다. 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다면, 유럽에는 '700유로 세대'가 있다. '700유로 세대'란 월 700유로(약 130만 원) 수준의 저임금을 받고 비정규직이나 임시직에 종사하는 유럽의 30세 이하 청년세대를 지칭하는 신조어다. 이 용어는 대학에서 문학석사 학위까지 받고도 8년간 식료품 가게 계산원으로 일하다 겨우 정규직 자리를 잡은 프랑스의 안나 샘이 2008년 여름에 자신의 생생한 체험담을 담아 출간한 <어느 계산원의 고난(Tribulations of a Cashier)>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널리 쓰이기 시작했다.

유럽의 청년층은 전 세대인 '베이비 부머' 세대의 고성장의 혜택을 누리기는커녕 경기침체와 재정위기로 부모 세대의 빚만 잔뜩 물려받았다면서 "우리(젊은 세대)는 당신들(부모 세대)이 진 빚을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그리스의 경우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세계 금융자본이 일으킨 경제위기의 희생양이 된 그리스는 주력산업인 관광산업의 침체까지 겹쳐 지난 해 5월 IMF와 EU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다. 이에 정부의 긴축재정으로 청년층과 서민들의 생활이 직격탄을 맞으면서 고대문명과 민주주의의 발상지 아테네에 연일 심각한 폭력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대학마다 학생들이 '취업전쟁'을 치른다.
한 대학생이 학교 게시판에 붙은 모집 공고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워킹 푸어(Working Poor)'의 악순환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소위 '워킹 푸어(Working Poor)' 가 전지구적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본도 심각한 사회 문제여서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PC방이나 만화방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중국에서는 바쁘게 일하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켜 '충망쭈(窮忙族)'라고 한다.

워킹 푸어의 확산은 한국에서도 심각한 수준이다. 외환위기와 카드대란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에서 약 300만 명이 워킹 푸어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워킹 푸어 문제는 단순히 소득이 적은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번 워킹 푸어로 전락하면 구조적으로 그 덫에서 벗어나는 게 매우 어렵다. 경제가 출렁일 때 첫 번째 희생자가 되는 것도 이들이다. 이들이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계획적이고 장기적인 시스템은 있는가.
 
눈물겨운 취업 전선

이 자리에서 거시경제나 실물경제를 들먹이자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 국민에게 대학은 선택이 아니라 이제 의무교육에 가깝다. 긴 입시지옥을 치르고 당도한 상아탑의 현주소는 직업훈련소로 바뀐 지 오래여서 급기야 '김예슬 선언'까지 낳았다. 일자리의 불안감에 미래를 저당 잡힌 학생들은 상대평가 학점 속에 큰 중압감을 느낀다.

단언컨대, 청년들이 겪는 일자리의 고민은 그리스보다 한국에서 더 크고 깊다. 청년실업 비율이 25퍼센트에 달하고 젊은층의 43퍼센트가 700유로 세대라는 그리스가 우리보다 심각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수치가 아니라 취업을 향한 눈물겨운 과정과 그에 따른 좌절감과 사회구조적 문제 등 현상의 이면으로 고개를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매서운 한파의 날씨 속에 대학마다 캠퍼스 곳곳에는 취업을 위한 '~스터디' 공고와 플래카드들이 나붙어 있다. '면접대비 스터디', '합숙대비 스터디', '논술대비 스터디'…. 물론 토익 고득점 전략 비법, 인턴 경험 쌓기, 참으로 다양한 자격증 취득 광고 등은 기본이다. 서점가에는 이러한 시류에 편승한 얄팍한 상술의 <20대여, ~에 미쳐라>등의 자기계발서들까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다.

곧 대학 졸업시즌과 입학시즌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토록 열심히 취업에 매진한 그들에게 마땅한 일자리는 없다. 그들을 볼 때마다 미궁 속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리스 신화의 청년 테세우스가 떠오른다.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힘든 다이달로스의 미로, 그 안을 헤매는 테세우스처럼 우리 청년들은 꼬일대로 꼬인 취업시장에서 방황하고 있다.

하지만 테세우스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그를 사모하던 아리아드네 공주의 도움으로 청년은 무사히 미로를 빠져나온다. 입구에서부터 공주가 전해준 실타래를 풀어가며 이를 이정표 삼아 탈출에 성공한다. 우리 젊은이들에게 쥐어줄 아리아드네의 실타래가 있나? 무엇을 이정표 삼아 이 미로를 빠져나올 것인가.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서글픈 현실 앞에서 도대체 누구에게 이런 물음을 던져야 이 상황이 나아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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