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동네'는 사라지고 … "부활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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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동네'는 사라지고 … "부활을 꿈꾼다"
  • 김주희
  • 승인 2011.01.26 17: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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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동구 송현1·2동(17)

취재: 김주희 기자





동구 송현1·2동을 찾은 지난 주 화요일(1월11일) 오후. 인천에는 제법 눈이 내렸다.

지난해 11월 '화수2동'을 소개한 뒤 연평도 사태와 이어진 연말연시 취재로 밀렸던, 두 달여 만에 나선 '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취재 길을 눈과 함께 했다.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을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에는 구름이 껴 흐렸을 뿐, 눈은 내리지 않았다. 바람이 쌀쌀하게 불던 터라 잔뜩 움츠린 채 사진 몇 컷을 담았다. 송현시장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내려설 때 눈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던 눈발은 수문통을 거쳐 '양키시장'으로 이어질 때 굵어졌고, 마구 쏟아지기까지 했다. 돌아설까 말까 어찌하나 싶었다.

그래도 더 이상 미룰 수 없어 발걸음을 재촉했다. 굵어진 눈발은 동인천 북광장 조성 사업으로 폭격 맞은 듯 처참하게 잘린 건물도, 추운 날씨에 철수한 듯 천막을 덮어놓은 노점상 가판대도 모두 하얗게 물들였다.

눈이 내려 세상을 감싸 안으니 포근하게 느껴질 만도 한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을씨년스러웠고 심지어 비장하기까지 했다.

1980년대 초반 '달동네'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똑순이'란 캐릭터가 유명세를 탄, 많은 국민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였다. 당시 서민들의 애환과 그린 이 드라마의 배경으로 된 곳이 제목 그대로 달동네다.

몸을 뉘일 한 뼘 땅만 있으면 판자와 흙으로 얼기설기 지붕을 얹고 벽을 세워 살던 곳. 밀려 밀려 언덕 꼭대기기까지 구불구불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내고 다닥다닥 붙어살던 곳. 물지게로 물을 길어먹고, 퇴근길 새끼줄에 연탄 한 장 달랑 들고 언덕길을 오르던 곳.

달을 더 가까이에서 크게 볼 수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 바로 '달동네'다.

지금이야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송현1·2동은 인천의 대표적인 달동네가 있던 곳이다.

본디 달동네 박물관이 있는 수도국산은 송림산 또는 만수산이라 불렀다. 최소한 100년 전까지만 해도 해발 58m에 아트막한 산은 그렇게 불렀다.

이 산에 1908년 수돗물을 공급하려고 배수지가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수도국산'이라 했다. 100여 년간 그렇게 불렀으니, 송림산보다는 수도국산이 더 입에 붙는다.

70년대 수도국산 판잣집 모습(사진=blog.naver.com/kkkk8155)

어찌됐든 수도국산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은 배수지가 들어서기 4년 전인 갑신정변 전후란다.

일본군이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중구 전동 인근에 주둔하면서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을 내쫓았는데, 그들이 지금의 수도국산 서편, 즉 송현1·2동으로 내몰린 것이다.(고일의 인천석금)

'수문통'이라 했던, 바닷물길이 배다리까지 이어졌던 곳 주변으로 마을이 생겼다.

만수동 등 매립으로 바다가 땅으로 되기 전 수문통 인근에 조그만 항구가 있었고, 수도국산 자락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이 됐다고도 한다.

울창했던 소나무 숲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전쟁을 거치면서 피난민이 모여들었다.

산업화로 일자리를 찾아 온 이들이 합류했다. 도심에서 쫓겨난 이들도 달동네 사람으로 됐다. 그 규모가 3천 가구나 됐다.

빼곡히 산 정상까지 판잣집이 뒤덮었다.

1999년 본격화한 주거환경개선 사업으로 판잣집이 싹 헐렸다. 그 자리에 높은 아파트가 숲을 이뤘다.
 
2005년 10월 전국 최초로 어려웠던 달동네 서민들의 삶을 테마로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그것이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이다.

달동네 박물관에서 송현시장으로 옮긴 발걸음을 일단 '수문통'으로 바꿨다.


솔빛주공 2차 아파트와 동부·삼두 아파트를 사이에 둔, 6차로로 시원스럽게 뚫린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넓은 도로에 비해 오가는 차량이 적어 한적하기 그지없는 이 도로는 원래 배가 오가던 물길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수문통은 1996년 마지막으로 현 화평치안센터에서 송현치안센터까지 복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드나들던 작은 수로였고, 물길은 배다리까지 이어졌다.

본디 수문통은 갯벌과 갈대밭이 무성한 저지대였다고 한다. 바다를 메워 땅을 만들기 전까지 그랬다. 작은 항구가 있고, 바닷물이 지나는 갯골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이 살았다.

1930년까지만 해도 해산물 등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가 다녔다. 1892년 동전을 만들던 '전환국'이 서울에서 옛 인천여고 자리(현 중구 동인천동주민센터)로 옮겼는데, 동전을 만드는 주조기 등의 설비를 한강~강화도~수문통으로 날랐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배가 다닌 흔적은 1970년대까지도 있었다. 지금은 화평치안센터 인근에 덩그러니 남은 교각 2개가 이를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2010년 3월 인천시는 화평치안센터에서 송현파출소에 이르는 수문통로 672m를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동인천역 주변 재정비촉진지구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2013년까지 도로를 걷어내고 친수공간을 조성하겠다는 계획이다. 이후 감감무소식이다.

현대화 작업을 마친 송현시장 모습

 이 수문통변 개천가에 시장이 있었다.

각종 기록은 1930년대 인천상공협회 창립자인 '유창호'가 야시장을 열었다고 전한다. 이후 인천부윤이 현 송현자유시장 자리에 양철지붕으로 '인천부 일용품 공설시장'을 만들었다고 한다.

개천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와 생선 파는 가게에서 나는 비린내가 진동했다고 전해진다.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장사를 망치기도 했단다.

일제강점기 말에 이 일대가 소개(공습·화재 등의 피해를 덜기 위해 한 곳에 집중된 주민·시설 등을 분산시킴) 지역으로 설정하면서 시장 건물은 모두 철거됐다.

어찌됐든 수문통을 따라 배다리까지 난 옛 물길(수문통로에서 화도진로) 주변은 인천의 대표적인 시장 상권이다.


중앙시장에서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 철시한 노점상 가판대 위에 하얗게 눈이 쌓였다.


현 송현시장과 미제 양품을 파는 일명 양키시장(현 중앙시장), 그리고 순대시장도 형성돼 있다. 화평사거리에서 배다리삼거리까지, 도로 양편엔 그릇 도매상에서 헌옷 판매점까지 상권이 발달돼 있다. 적어도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오가는 사람이 많았던, 제법 번잡한 곳이었다.

현 송현시장은 1960년 송현동 83번지 일원에 개설됐다. 50년 전통의 송현시장은 최근 현대화 작업을 거쳐 다시 태어났다.

주변에 솔빛주공 1·2차, 삼두1차, 동부 등 아파트 단지가 형성돼 있어 잠재력은 크지만 상권은 발달돼 있지 않다.

상인들이 자체 상품을 개발하는 등 부활을 꿈꾸고 있지만 대형마트 등으로 녹록치 않은 상황이다.


속칭 양키시장 내부 모습이다. 100여개에 달하던 상점 대부분이 문을 닫아
시장 골목이 어둡고 탁한 느낌이다.

송현시장 길 건너편, 속칭 양키시장이라 하는 곳이 있다.

송현자유시장이라고도 하는 이 시장은 기록상 1965년 개설됐다. 하지만 1940년대 초반부터 사람들이 모여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과거 미군 부대에서 몰래 빼돌린 물품을 거래한데서 비롯돼 양키시장이라고 불렀다. 암달러상도 있었다 한다.





이후에는 청바지, 점퍼 등 의류를 주로 취급해 주로 청소년과 20대 젊은이들이 주 고객층이었다.

100개 정도 점포가 밝힌 백열구로 좁은 골목길이 환했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상가 대부분이 문을 닫고 일부만 영업하고 있어 어둡고 탁한 느낌이다.

과거처럼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제 군복이나 군화, 미제 물품을 하는 점포와 옷 수선 가게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양키시장 입구에 애관2관이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오성극장으로 개봉관이었던 곳이 애관극장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애관2관으로 됐다. 이마저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중앙시장 입구에 있던 미림극장도 간판만 남았을 뿐이다. 미림극장은 천막 극장에서 시작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곳이기도 하다.


개봉관이었던 미림극장. 옛 오성극장(애관2관)과 마찬가지로
오래전 문을 닫았다.

 

양키시장에서 배다리 삼거리까지 동인천역 뒤편 철길을 따라 난 시장이 중앙시장이다. 행정구역상 송현1·2동과 송림1동이 혼재돼 있는 곳이다.

현재 시장은 1972년 5월 개설됐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시장을 이뤘던 곳이다.

유창호가 개설한 야시장이 중앙시장의 출발이란 설이 지배적이다. 재정문제로 상인회가 사라지고 생성되길 반복하고, 경찰이 나서 불량배를 선도하고 무허가 건물의 난립을 막는 등 상권을 둘러싼 부침이 많았던 곳이다.

중앙시장이 주로 취급하는 물품은 한복과 교복, 침구류 등이다. 입구에서 시장 끝까지 140개에 달하는 상점이 있다. 1990년대 초반까지 명성이 유지됐으나, IMF 이후 침체된 뒤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송현동 순대골목.

 1980년대까지 수문통로를 따라 아침이면 긴 자전거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인근 동국제강과 현대제철 등 공장에서 밤 작업을 마친 노동자들의 아침 퇴근 행렬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퇴근길에 거쳤던 곳이 있는데, 송현동 순대골목이었다.

노동자들은 얼큰한 순댓국과 막걸리 한 잔으로 밤샘 작업에 지친 몸을 달랬을 터이다. 골목 안팎으로 자전거를 세워둔 모습이 장관이었다는데, 지금은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동인천 북광장 조성 사업으로 건물이 헐려 오갈데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포탄에 파괴된 연평도가 아니다. 동인천 북광장 조성사업으로 헐다가 만 건물이다.
절반이 잘린 건축물이 '개발주의'가 불러온 이 시대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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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희 2011-01-27 20:11:08
지적 감사합니다. 교각을 옮겨 제자리를 찾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송현시장 재개장 때 취재까지 해놓고 관광형리모델링을 현대화로 잘 못 적었습니다.

최종규 2011-01-21 03:54:44
지금은 화평치안센터 인근에 덩그러니 남은 교각 2개가 이를 입증하고 있을 뿐이다.


...... '교각 2개'는 서로 마주 바라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화평파출소가 들어서면서, 교각 하나를 옆으로 옮겨 놓았기 때문입니다. 옆으로 옮겨 놓았을 뿐 아니라, 구석에 처박아 둔 꼴이 되었고, 맞은편 '핸드폰 가게' 앞 교각 하나는, 핸드폰 가게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고 난 다음에 빈 그릇 올려놓는 쓰임새로 나뒹굴지요 ......

...... 송현시장은 '현대화'가 아니라 '관광시장형 리모델링'을 했습니다. 송현시장은 '관광시장형 리모델링'을 하기 앞서도 '지붕이 있었고 바닥돌도 깨끗'했으며 '가게 간판'도 깔끔했습니다. 왜냐하면, 송현시장은 지난해에 '관광시장형 리모델링'을 하기 앞서 '재래시장 현대화'에 따라 지붕이며 여러 가지 공사를 벌써 예전에 했으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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