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저 편, '꿈의 운동장'은 넓기만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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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저 편, '꿈의 운동장'은 넓기만 한데…
  • 김주희
  • 승인 2011.02.05 19: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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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발 따라 … 인천新택리지] 동구 송림1, 2동(18)

취재: 김주희 기자



수도국산 달동네 박물관에서 바라본 송림1동 전경

'길 따라 발 따라' 취재 길로 30년 만에 찾아간 모교 서흥초등학교 운동장은 작았다. 어찌 이 작은 운동장에서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이 다 모여 운동회를 할 수 있었는지, 기억이 틀린 것은 아닐까 의심까지 들 정도로 좁았다.

맞나 틀리나 되새김질을 계속했다. 그래도 분명히 가을운동회는 했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청군백군으로 나눠 편을 가르고, 빨리 달리기 경주도 하고, '오재미'(콩주머니를 뜻하는 일본말이다. 올바른 표기는 오자미다)를 던져 누가 먼저 박을 깨는지 시합도 했다. 온 가족이 출동해 볕 좋은 곳을 찾아 둘러앉거나 교실로 가 맛난 점심도 나누었다.

어찌됐든 아무리 본관 앞에 신축 건물이 들어서 운동장이 조금 좁아졌다고 해도, 야구부 때문에 높다란 철조망이 운동장을 둘러쳤다고 해도, 기억 속 운동장은 문학경기장 만큼이나 넓었다.


송림2동과 송현3동 경계선에 있는 서흥초등학교.

지난 기사에 송현1·2동을 소개하며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을 출발지로 삼았다. 달동네라 불리던 지역의 어제와 오늘을 담은 기사였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사실 달동네박물관의 행정소재지는 동구 송림 1동이다.

이 달동네박물관이 있는 수도국산을 빙 둘러 서쪽에 송현1·2동이, 남동쪽에 송림1동이, 동쪽에 송림2동이, 그리고 북쪽에 공장지대가 대부분인 송현3동이 경계를 이루고 있다.

재개발사업으로 송현1·2동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고, 그 기억을 담은 박물관이 수도국산 정상부에 송현근린공원과 함께 자리했다.

송림1동과 송림2동을 소개하는 이번 기사도 달동네박물관을 출발지로 삼았다.


수도국산에서 본 송림1동 모습. 사진 왼편이 삼익아파트고, 오른편 아래가
수도국산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공사 현장이다.

수도국산에서 바라본 송림1동. 마을을 두 동강 내고 수도국산을 관통하는 산업도로가 발아래를 유유히 흐른다.

이 산업도로는 인천항에서 현대제철 쪽으로 난 것으로, 배다리(금창동)를 또 둘로 갈라놓고 이어졌다. 금창동 지역 주민들과 시민·문화단체 노력으로 개통이 지연되고 있으나, 여전히 주민들의 지하도로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이 산업도로가 두 동강 낸 송림1동(송림초등학교 주변) 역시 오래 전부터 재개발 사업을 추진한 곳이나, 사업주체인 인천도시개발공사가 어려운 재정여건을 이유로 사업을 재검토하겠다며 미뤄놓았다. 외형만 확장하려고 일방적으로 추진한 도시개발 정책으로 애꿎은 주민들만 속앓이를 한다.

취재 길은 우선 송림1동으로 잡았다. 송현시장으로 난 내리막길을 따라 가다 송현1·2동 주민센터를 지나니 송림1동으로 들어선다.

전쟁 통에 제대로 먹을 것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에게 '꿀꿀이죽'을 끓여 나눠주었다는 송림동천주교회를 지나, 붉은 벽돌로 벽을 세워 만든 도시형 한옥 사이로 난 길을 따라 1980~90년대 농구 스타 이충희를 배출한 송림초등학교로 향했다.


송림초등학교 정문이다.
뒤편 건물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가 눈에 띈다.

한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을 운영하고 있는 김식만씨는 모교인 송림초등학교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전교생이 4천명이었다. 어렸을 때라 학생 수가 많은 것이 자랑거리였다."

그의 기억 속 송림초교는 당시 가장 좋았다던 인천중학교에 많은 학생을 보낸 곳이었다. 그의 인천중 15회 동기 중 부유층이 사는 동네 학교인 신흥초교 출신이 가장 많았고, 다음이 송림초교였단다. 앞선 1년 선배들 중에는 송림초교가 단연 으뜸인 것으로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기억도 비슷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던 동네 학교였지만, 교육열도 높았고 아이들도 똑똑해 송림초교는 공부를 잘한 학교로 이름 나 있었다.

송림초교는 1933년 개교한, 70년 역사가 깃든 곳이다. 인천상업학교(현 인천고 전신)가 이곳에서 개교했다. 독일인이 설계한 유럽풍 본관 건물은 화재로 없어져 한때 천막교실에서 아이들이 꿈을 키웠다.


1948년경으로 추정되는 배다리 사진. 사진 위쪽에 보이는 유럽식 건물이
송림초등학교로 화재로 없어졌다.
불조심 표어판 뒤쪽으로 1955년 길(송림로)이 뚫렸다. (사진=blog.naver.com/kkkk8155)

여기서 잠깐 송림동의 유래를 살피면, 송림동은 인천부 다소면 지역이다. 소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수도국산을 송림산이라 부르던 것도 같은 이유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새말과 매하지, 장승거리, 샛골, 활터고개 등을 병합해 송림리라 했다. 해방 후 '송림정'이란 왜식 이름을 버린 송림동은 분동을 거듭해 현재 6개 동으로 나뉘었다.

송림1동은 일제 강점기까지만 해도 인천의 변두리로, 간장공장(옛 동부경찰서)과 성냥공장(행정구역상 금창동, 옛 문화극장 터) 등 주변에 큰 공장이 있었다.

송림2동은 1970년 송림1동에서 분동해 나온 것으로, 동구청이 있다. 매화꽃 모양의 마을이라 해서 '매화마을'이라고도 불렀다.

 송림초에서 금창동으로 이어진 곳에 큰 장이 섰던 배다리가 있고, 여기부터 송림오거리까지 '송림로'가 이어진다.

송림로는 1955년경 뚫린 것으로 송림초등학교 동편을 절개하고, 6·25 한국전쟁 때 소실된 성장공장 터 사이로 낸 길이다. 신작로가 뚫리기 전만해도 현 동구청으로 향하는 차도는 배다리 헌책방에서 이어진 금곡로가 유일했다고 한다.


동구청사가 들어선 터는 예전 도축장이 있던 곳이다.

이 금곡로를 따라 동구청으로 내려가다 보면 왼편에 옛 동부경찰서(현 인천경찰청 제1기동대)가 나온다. 이곳에 경찰서가 들어서기 전 일제시대 '노다' 간장공장이 있었다.

경찰서 인근에 12층짜리 2개 동으로 된 삼익아파트가 나온다. 삼익건설이 1979년 중구 신흥동에 14층짜리 2개 동의 아파트를 세우며 인천에서 고층아파트 시대를 열었다. 송림동 삼익아파트는 용현동에 이어 삼익건설이 세운 인천의 세 번째 고층 아파트다.

당시만 해도 이 아파트는 송림오거리에서 배다리로 향하는 언덕배기에 가장 높이 선 유일한 건물이었지만, 최근 바로 옆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금곡로를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왼편에 동구청이 나온다. 그 터가 도축장이었고, 주변은 어울리지 않게 일본식 이층집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동구청과 송림로70번 길을 사이에 두고 동명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는데, '인천 두묘 제조소'가 있던 터다.

동양에서는 유일한 두묘 제조소였다고 한다. '두묘'란 우두약, 다시 말해 천연두의 백신을 뜻한다. 이곳에서 천연두에 걸린 한우 송아지에서 원료를 뽑아내 두묘를 만들어 일본과 중국, 미국 등지로 수출했다. 품질이 매우 좋았고 수입도 꽤 올렸는데 동명초교 터로 옮긴지 얼마 안 돼 폐지됐다.


동명초등학교. 일제시대 야학에서 출발해 갖은 탄압과 고충 속에서도
배움의 열정을 잃지 않고 이어온 인천의 명문 사학이다.

동명초등학교의 공식 개교일은 1930년 9월10일이다. 동갑내기 친구 박창례, 이옥녀 두 분이 동명학원으로 연 것이 시초다.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 세기'는 고(故) 박창례 교장이 19살 되던 해인 1929년 도원동 보각사에 방 한 칸을 얻어 '관서학원'을 열어 성냥공장에 다니는 여공 3명을 가르치며 동명초교가 첫 발을 내딛었다고 전한다.

이후 사정이 있어 이흥선정미소로 공부방을 옮겼다. 30명이던 학생 수도 '거저 가르쳐 준다'는 소문에 크게 늘었고 학교 이름을 '동명학원'이라고 했다.

1938년 일제가 '동명'이란 이름이 불손하다고 해 어쩔 수 없이 '소화학술강습회'로 했다가 해방과 함께 이름을 되찾았다.

1946년 지금 자리에 있던 일본 동경대학 전염병연구소와 두묘 제조를 위해 키우던 송아지 사육장을 얻어 터를 닦아 6년제 국민학교로 새 출발한다.

박 교장의 절친한 동무였다는 고일은 그의 책 '인천석금'에서 독립군이 학교 운영에 잠재 간섭했다는 이유로 일제가 '광명학원'(인천석금은 이렇게 적었다)을 해산시켰고, 이로 인해 박 교장이 빚을 져 고생이 컸다고 전한다.


수도국산에서 내려다본 송림2동.
아래로 이어진 길을 따르면 현대시장이 나온다.

송림로를 마주하고 송림1동과 송림2동이 있다. 옛 현대극장 뒤편 동네로, 수도국산 서편이다. 예전에는 동네가 매화꽃을 닮았다 하여 '매화마을'이라고도 했고, '안송림'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매화마을에 전주 이씨가 특히 많이 살았는데, 효자 이웅생·웅시 형제와 이웅생의 아들 승기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들은 효령대군의 둘째 서원군 이효선의 후손이다. 웅시는 벼슬도 마다하고 부모를 극진히 모시는 등 대대로 효도하는 집안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형 이웅생은 과거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지냈는데, 승정원 좌승지 정무 관계로 잘못을 저질러 책임을 통감하고 임금께 석고대죄를 했다. 그의 아들 웅생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신이었는데, 부친을 따라 석고대죄를 했다. 부자는 그 자리에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고, 나라에서는 세 사람을 충신이자 효자로 정려를 내렸다고 한다.

또 송림2동 인근에 조선조 인재를 내던 '만취당'이란 곳이 서 있었던 것으로 전해 온다. 이 만취당은 조선조 학자 이숙 선생이 '매화지'란 곳에 세운 정자이다. 이숙 선생은 청백리이자 결백한 도학자로 알려져 있고, 인천 유학계의 거물이었다.


재개발로 멀리 송림5동과 송림4동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것과 달리
송림2동 지역은 여전히 골목을 품고 있다.
이 지역도 개발 바람이 부는지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한 편에서 들린다.

송림4·6동을 예전에는 궁현동이라 했는데, 활 쏘는 터가 있어 그렇게 불렀다.

매화마을이라 했던 이 송림2동에도 역시 활터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이곳에 살던 이씨들이 현 동구청 방면으로 활을 쏘았다고 하는데, 재미 있는 것은 후에 중국인들이 땅을 일구기 힘든 활터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얘기도 있다. 송림동에는 중국인과 그들의 농사 비법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오는데, 이 또한 그 중 하나이다.

송림오거리에서 샛골로를 따라 현대제철로 가는 길. 현대시장을 마주보고 군데군데 붉은색 타일이 벗겨진 할인마트가 눈에 들어온다.

동시 상영관이라는 게 있었다. 두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었는데, 여러 영화 중 한 편을 골라보는 지금의 복합 상영관과는 확연히 다르다.

개봉관을 두세 곳 거쳐 영화 필름이 상했는지, 스크린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철지난 영화를 틀어주던 곳. 한 편을 보고 나면 10분 정도 뒤 또 다른 한 편을 틀어주는 곳이 동시상영관이었다.

입장권 한 장이면 두 편을 볼 수 있는 데다, 좌석제도 아니었고 나가라 하지도 않았으니, 시간만 허락되면 마지막 상영 때까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화관이었다. '19금' 성인영화와 청춘물을 번갈아 상영하는 일까지 있었다.

'현대극장'이 그러했는데, 언제 문을 열고 언제 문을 닫았는지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다. 다만 1990년대 중반까지였다는 기억이 아른거릴 뿐이다.


'삼류극장'이었지만 나름 낭만을 간직한 옛 현대극장.
건물에 붙은 낡은 간판이 극장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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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 2011-01-28 09:30:31
금곡동출신입니다 고향기억이 새롭고 감회에젖습니다 현대극장앞은 습지고 붕어를잡았지요 취재 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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