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권과 인권을 여는 작은 문
상태바
청소년권과 인권을 여는 작은 문
  • 최종규
  • 승인 2011.01.31 1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책읽기 삶읽기]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청소년 인권 수첩》

― 청소년 인권 수첩 (크리스티네 슐츠-라이스·공현 글,안미라 옮김,양철북 펴냄,2010.12.21./1만 원)

 청소년한테는 사람으로서 권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담은 《청소년 인권 수첩》을 읽다.

 더없이 마땅한 소리이기 때문에 굳이 ‘청소년 인권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지없이 마땅한 인권을 인권다이 다루지 않으며 섬기지 않는 우리 나라이기 때문에, 이 같은 책이 나올밖에 없고 읽힐밖에 없으며 읽을밖에 없다.

 《청소년 인권 수첩》이라는 책이 우리한테 들려줄 이야기는 오로지 하나이다. 책 첫 대목에 나온 “이것은 모순이 아니다.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할 자유와 권리는 은수, 현수, 정아, 윤기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자유이자 권리이다(12쪽).” 두 줄이야말로 이 책이 다루는 고갱이이다. 누구나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꾸려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스스로 좋아하는 삶을 펼치면서, 저마다 좋아하는 사람을 사귀어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 스스로 그리 옳거나 바르게 살아가는 매무새를 익히지 못한 만큼, 이런 말을 하면서 꼬리말을 달아야 한다. 내 권리를 아주 마땅히 누리는 만큼, 내 이웃은 내 이웃으로서 권리를 아주 마땅히 누려야 한다. 나 혼자만 누린다는 권리가 아니라, 누구나 저마다 다 다른 권리를 마음껏 누려야 한다.

 그러니까, 남을 해코지하는 일은 권리가 아니다. 남을 따돌리는 짓 또한 권리가 아니다. 남을 해코지하거나 따돌리거나 괴롭히거나 등치거나 속이는 짓은 모두 ‘폭력’이다.

.. 우리가 어떤 물건이든 최대한 싼 가격에 사려고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말도 안 되게 적은 임금을 받으며 인권이 짓밟히는 환경에서 일을 한다 …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은 쉽사리 폭력의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그 책임은 여성들에게 돌려지곤 한다 … 사람들의 생각이 다른 누군가에게 감시당하고 그 생각 대문에 때때로 처벌을 받기도 한다면 그 사회는 참 ‘무서운’ 사회일 것이다. 하지만 국가는 국민들을 좀더 쉽게 다루기 위해 우리가 자유롭게 생각하는 것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  (72, 177, 153쪽)

 ‘권리’와 맞선 낱말은 ‘폭력’이다. 권리와 폭력이란 종이 앞뒤와 같달 수 있다. 권리라 여기지만 막상 폭력이 될 수 있고, 폭력에 기울던 슬픈 사람이라지만 언제라도 권리로 돌아올 수 있다.

 물건 하나를 더 값싸게 사들이고자 하는 마음이 폭력이 될 수 있는 줄 잊는 사람들이다. 더 값싼 물건을 찾는 일이란 권리이다. 그러나, 내가 더 값싸게 사들이고 싶어서 ‘권리 아닌 폭력을 휘두르며 값싸게 파는 장사꾼’한테 홀리거나 이끌린다면 나 또한 폭력을 저지르는 셈이다.

 쌀 한 말을 사다 먹을 때에도 ‘더 값싼 쌀’을 바라는 나머지, 농사짓는 이들 스스로 화학농을 짓고야 만다. 땅을 더럽히지 않으면서 곡식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찌우는 거름을 내는 유기농을 하도록 이끌자면 ‘더 값싼 쌀’이 아니라 ‘제값 치르는 쌀’을 사서 먹어야 한다.

 책 한 권을 산다 할 때에는, 출판사부터 ‘인터넷책방에서 깎아서 팔고 적립금 쌓을 돈까지 헤아리는 책값 부풀리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책을 사 읽는 사람은, 출판사가 책값 부풀리기를 안 하리라 믿으면서 제값을 치르며 사도록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출판사-책방-독자, 여기에 출판사와 책방을 잇거나 책방과 독자를 잇는 배달 일꾼과 창고 일꾼들이 저마다 제몫을 찾을 수 있도록 생각을 해야 한다.

 이런 데에 마음을 쓰지 못한다면, 다른 데에도 마음을 쏟지 못한다. 날마다 밥을 받아먹으면서, 날마다 먹는 내 밥을 누가 어떻게 차리는지 생각이나 하는가. 여남평등이니 남녀평등이니 떠들어도, 오늘날에도 집에서 밥 차리는 몫은 ‘어머니’나 ‘밥어미’와 같은 여자들한테 주어진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나 아들내미 스스로 밥을 차리는 일이란 아주 드물다. 서로 함께 차리는 일은 더욱 드물다. 알고 보면, 내 살림집부터 ‘내 권리’뿐 아니라 ‘어머니 권리’와 ‘할머니 권리’가 서로 고른 자리에서 넉넉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니, 다른 데에서도 참다운 권리란 무엇인지를 못 보거나 모른달 수 있다.

.. 학생회가 아무런 힘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는 거의 없다. 학생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일 년마다 학생회장과 반장을 뽑는 일뿐이다 … 성적으로 서열화하는 교육은 평등과 인격에 대한 존중을 가르치기보다는 차별과 배제를 가르친다. 학교에서 인권과 평화, 민주주의, 자연에 대한 사랑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 ..  (195∼196, 206쪽)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청소년 인권 수첩》을 읽지 않아도, 청소년이면 누구나 청소년이 얼마나 권리를 못 누리는지를 살갗으로 받아들인다. 학교라는 곳에서 청소년이 누리는 권리란 없다. 청소년은 학교에서고 집에서고 의무만 있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기’라는 의무만 짊어지는 청소년이다.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지 못하겠다면, 직업훈련원이나 상고나 공고 나와서 하루빨리 회사원이나 노동자가 되어 돈벌이를 해야 하’는 의무를 짊어질 청소년이다.

 《청소년 인권 수첩》은 매우 마땅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리하여, 자칫 따분하다든지 알맞지 않다든지 하는 샛길로 흐를 수 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하는 것들이다(25쪽).” 같은 대목이나, “지식은 힘이고 인간은 누구나 지식을 습득해 ‘힘을 축적’할 권리가 있다(61쪽).” 같은 대목은 옳지 않다. 이 책을 쓴 사람은 한국사람이 아니라 독일사람이다. 독일이라면 학교라는 곳이 한국처럼 ‘입시지옥제조기’는 아닐 테니까,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지식은 우리가 꼭 배워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은 다르다. 한국땅에서 학교는 대학입시에 쓸모있는 시험문제만 골라서 가르치고야 만다. 사람이 사람다이 아름답게 살도록 돕는 슬기를 일깨우거나 나누지 않는다. 교사들 스스로 교과서나 문제집을 내던지면서 ‘푸름이 삶과 넋을 푸르고 또 푸르게 보살피도록 온힘을 쏟는 일’이란 몹시 드문 일이 되고 말았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더 아름다운 삶을 더 너른 지구별에서 누리거나 마주하도록’ 돕고자 가르치는 학과목이 아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란 ‘세계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세일즈맨이 되어야 하니까’ 가르친다. 영어를 가르치면서 ‘영어로 된 좋은 영화나 문학이나 연극이나 노래’를 알뜰히 즐기거나 누리도록 이끌지 못한다. 더구나 한글로 된 영어사전은 영어사전답게 나온 적이 없다. 영어사전 말풀이는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엉터리로 쓰도록 내몬다. ‘my = 내’가 아니라 ‘my = 나의’로 풀이할 뿐 아니라, 바르면서 알맞고 고운 우리 말을 살피지 못하는 영어사전이다. 이런 영어를 배우는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얼마나 제대로 즐길 수 있을까. 한국땅 한국 학교는 한국 아이들한테 한국말부터 옳게 가르치지 않는다. 한국말부터 옳게 가르치지 못하는데, 한국 아이들은 무슨 지식을 배우고 무슨 삶을 읽을 수 있는가.

.. 우리가 부모님 차를 타고 다니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면 기름을 엄청나게 절약할 수 있어서 집안 살림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전거를 이용하면 날마다 공기 중으로 배출하는 유해 물질의 양과 석유 사용량이 엄청 줄어든다는 것이다 ..  (240쪽)

 독일책만 고스란히 옮겼다면 《청소년 인권 수첩》은 퍽 부질없는 뜬구름 이야기로 흘렀으리라 생각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랑 훌륭한 가르침을 담았을지라도, 우리 터전을 살뜰히 굽어살피지 못한다면 안타깝다. 《청소년 인권 수첩》은 청소년 인권운동을 하는 분이 한국땅 푸름이들 삶을 돌아보는 글을 곳곳에 많이 넣었고, 푸름이 스스로 풀고 맺을 즐거운 삶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즐거운 삶’이 참말로 즐거운 삶이 되도록 조금 더 마음을 쏟아 이야기 한 자락 들려주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부모님 자동차를 안 타고 내 자전거를 탈 때에는 공기를 더 깨끗하게 하도록 돕기도 하겠지만,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기쁨과 보람과 아름다움이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동안에는, 자동차를 탈 때에는 ‘그저 지나치던’ 마을과 골목과 터전을 더 느리게 바라볼 수 있고, 자전거조차 타지 않으면서 두 다리로 걷는다면 더 천천히 내 삶터를 껴안을 수 있다.

 다만, 자전거도 싱싱 달린다든지 걷기를 하면서도 잰걸음만 걷는다든지 하면 자동차 탈 때랑 똑같다. 곧, 두 다리로 걷든 자전거를 타든 자동차를 타든, 내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가다듬을 수 있느냐이다. 푸름이뿐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인데, 내 삶을 나 스스로 얼마나 사랑하거나 아낄 수 있느냐에 따라 우리네 인권은 오늘부터 새삼스럽게 다시 태어난다. 내 삶을 나 스스로 사랑하지 못할 때에는 내 이웃이나 동무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좋은 삶을 꾸려야 한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삶이 아니라, 내가 참으로 좋아하는 길을 찾으며 내가 아주 즐거울 길을 여는 삶이어야 한다.

 삶 없이 지식만 있으면 무엇 하겠는가. 삶은 없이 ‘인권 지식’만 차곡차곡 쟁여 놓는들 우리 터전이 얼마나 나아지겠는가. 내가 디딘 삶터를 제대로 깨우쳐 내가 꾸리는 오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청소년 인권’과 ‘사람 인권’을 바로보는 문을 열 수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시민과 함께하는 인터넷 뉴스 월 5,000원으로 소통하는 자발적 후원독자 모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