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사진책으로 읽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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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사진책으로 읽는 삶
  • 최종규
  • 승인 2011.02.1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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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 마실 3] 부산 보수동 〈고서점〉

 ― 부산 보수동 〈고서점〉 / 051) 253-7220

 (1) 헌책방에서 만나는 졸업사진책

 인천 답동성당 안쪽에는 박문국민학교가 박문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꿀 때까지 있었습니다. 이곳 박문초등학교 옆은 답동성당이었고, 답동성당 앞은 흙으로 된 마당이자 운동장이었습니다. 또한, 답동성당 옆쪽은 차를 대는 자리가 아닌 박문유치원 놀이터와 모래밭이 있었어요.

 오늘날 인천 답동성당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답동성당 앞에 줄줄이 늘어선 자동차만 볼 뿐, 이 자리가 지난날에 무엇이었는지, 또 이곳이 언제부터 차 대는 곳이었는지 알지 못할 뿐더러,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답동성당을 오랫동안 드나들던 분조차 이 터전 지난 모습을 헤아릴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눈앞에 늘 바라보는 모습은 자동차뿐이니, 이곳에서 그리 오래지 않은 지난날 초등학교 어린이와 유치원 어린이가 마음껏 뛰놀며 어울린 줄을 떠올리기란 너무 힘든 노릇인지 모릅니다.

 헌책방에는 졸업사진책이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를 마치는 사람은 으레 졸업사진책을 받는데, 이 졸업사진책을 알뜰히 여기는 사람이 있는 한편, 졸업사진책을 달가이 여기지 않으며 아무렇게나 굴리다가 버리는 종이뭉치와 함께 내놓는 사람이 있습니다. 집을 옮기거나 이 나라를 떠날 때에 졸업사진책 또한 아쉬움 없이 털어내곤 합니다. 이리하여 졸업사진책은 헌책방에 들어옵니다.

 1970년대 졸업사진책이라면 헌책방에서 제법 사랑받습니다. 1960년대나 1950년대 졸업사진책이라면 역사 값어치가 있다 하여 꽤 비싼값에 사고팔립니다. 1940년대나 일제강점기 졸업사진책은 부르는 값이 책값이라 할 수 있어요. 1980년대 졸업사진책은 아직 ‘오래된 책’이 아니라서 이냥저냥 구릅니다. 1990년대 졸업사진책은 흔해서 내다 버릴 만하다 여기고, 2000년대 졸업사진책은 짐짝처럼 다루어지고 맙니다.

 그런데 고작 1980∼90년대 졸업사진책이라 하더라도, 인천 박문국민학교 졸업사진책을 들추어 보면, 인천 답동성당 앞마당과 옆마당 예전 모습을 살필 수 있어요. 아득하지만 아득하기만 하지 않고, 어렴풋하지만 어렴풋하기만 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몇 해 앞서 강원도 춘천에 자리한 헌책방 〈경춘서점〉에서, 1960년대 인천 남인천여중 졸업사진책을 하나 만난 적 있습니다. ‘인천 여자중학교 졸업사진책이 왜 춘천에?’ 하고 생각했지만, 인천에서 여중을 나온 어느 분이 춘천으로 시집을 갔을 수 있고, 시집을 가며 가져갔던 졸업사진책이 ‘이분이 돌아가셨거나 나라를 떠나셨거나 어찌저찌한 일 때문’에 조용히 나와서 헌책방으로 흘러들 수 있어요. 춘천에서 만난 남인천여중 졸업사진책에 깃든 1960년대 학교 건물과 학교 둘레 사진을 보면서 ‘그때 그무렵에는 이러했구나’ 하고 헤아립니다.

 우리 나라 초·중·고등학교에다가 대학교 숫자를 더하면, 해마다 쏟아지는 졸업사진책 가짓수는 어마어마하고, 졸업사진책을 만드는 숫자를 살피면 아주 엄청납니다. 그렇지만, 이 졸업사진책을 한 권씩 그러모은다든지 갈무리한다든지 하면서 ‘학교 역사’나 ‘교육 역사’나 ‘지역 역사’를 살피는 기관이나 모임은 없어요. 우리 스스로 잊기도 하지만, 사회와 학교와 나라 또한 잊는 우리들 수수한 삶결이 졸업사진책에 다소곳하게 담긴 채 고요히 숨죽입니다.

남인천여중 1960년대 졸업사진책에 담긴 '인천 시내 뒷모습' 하나.

 (2) 부산 헌책방에서 만난 부산 졸업사진책들

 어느 헌책방으로 마실을 하든, 이 헌책방이 깃든 지역(시나 군, 구나 읍이나 동이나 면)하고 가까운 학교에서 만든 졸업사진책이 한 권쯤 있나 기웃기웃합니다. 퍽 묵은 졸업사진책을 모으는 분은 꽤 있어, 퍽 묵은 졸업사진책이 한두 권 나오기는 하지만 금세 팔리기 일쑤요, 얼마 안 된 졸업사진책은 또 헌책방마다 잘 안 다루니까 이래저래 마주하기 힘듭니다. 그래도 어느 한 날 수십 권에 이르는 졸업사진책을 만나기도 합니다. 기다리던 헌책이 한꺼번에 쏟아지면 무척 기쁘지만, 한꺼번에 치러야 할 책값이 꽤 크니까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한 번 스치고 지나가면 두 번 다시 보기 어려운 이 졸업사진책들을 못 본 지나갈 수 없습니다. 눈물을 머금으며 주머니를 뒤적이고, 아픔을 달래며 한 달치 살림돈을 또 거덜내야 한다고 되새깁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마실을 하다가 〈고서점〉에서 부산 학교 졸업사진책을 잔뜩 만납니다. 하나하나 넘깁니다. 내가 부산하고 그리 끈이 이어질 일이 없을 뿐더러, 부산 졸업사진책을 잔뜩 장만할 까닭이 있겠느냐고 곱씹지만, 부산이든 서울이든 인천이든 사람 사는 마을입니다. 같은 때 다른 곳에서 한동아리로 살아가던 사람들 매무새를 들여다보면서 우리 삶과 삶결과 이야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내 고향인 인천 졸업사진책이 한 권쯤 섞였다면 참 좋겠다고 꿈을 꾸지만, 인천 졸업사진책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어디나 똑같이 소담스러운 사람들 삶이야기입니다.

 먼저 《부산여자고등학교 14회》(1962) 졸업사진책을 봅니다. 4295년 날짜를 씁니다. 1961년 군사쿠테타 뒤부터 단기로 쓰던 년도가 사라집니다. 1962년 졸업사진책이면서 4295년이라 적은 대목이 남다릅니다.

 사진을 죽 살피니, 일제강점기에 지었구나 싶은 건물에 교실 바닥은 나무입니다. 말 그대로 골마루입니다. ‘교내생활 이모저모’라는 자리에 1961년 5월 군사쿠테타 자국이 엿보이는 푯말들 “사치는 재건의 적이다”라 적고 “정다운 말에 간첩은 노린다”라 적은 포스터가 보이는군요. 학교 문에는 “합심하여 이룬 혁명 단합하여 완수하자.”라 내겁니다. 그래요, 이때에는 다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겠지요.

 《경남여자고등학교》(1960) 졸업사진책을 넘깁니다. ‘조회’라는 말을 안 쓰고 ‘아침모임’이라는 말을 쓰는군요. 마땅한 노릇이지만 건물 안쪽 모습을 담은 사진에 ‘골마루’라는 낱말을 씁니다. 혼자서 반가와 싱긋 웃습니다. 1962년 졸업사진책하고는 사뭇 다른 펼침막이 보입니다. “용공정책을 분쇄하자”라느니, 한국전쟁과 광복절을 기리는 관제데모 행렬이라든지 쓸쓸합니다. 학교 안팎 사진을 퍽 살가이 잘 담았다고 느끼는데, 끝자락에 붙은 ‘특활부’ 사진을 보니 사진부 모습이 나옵니다. 아하, 경남여자고등학교는 1960년 졸업사진책을 엮을 때에 학교 사진부에서 사진을 꽤 넣었군요. 1960년대 여자고등학교 사진부라, 이때에 사진을 찍던 분들은 그 뒤로 어떤 사진을 찍었을까요. 이분들 가운데 사진가로 삶을 이은 분이 누구라도 있으려나요.

 《부산 개성중학교 16회》(1967) 졸업사진책은, 안쪽에 부산 시내 사진을 넓게 담고 동그라미를 그려 학교가 어디인가를 알도록 합니다. 이런 짜임새는 처음 봅니다. 퍽 재미납니다.

 오늘날에도 학교 안팎에 온갖 푯말을 붙이는데, 이때에 개성중학교에서 붙인 푯말은, 교문에는 “반공계몽 및 간첩신고 여행기간”, 교문 안쪽 건물에는 “일하는 해, 3대 목표 : 증산 수출 건출, 행동 강령 : 근면 검소 저축”이군요.

 《부산 남일국민학교 22회》(1967) 졸업사진책을 들춥니다. 이 학교는 한 학년이 모두 열두 반인데 앞 여섯 반은 남학생 반, 뒤 여섯 반은 여학생 반입니다. 아이들 숫자가 많기는 하지만, 반마다 반 아이들을 함께 담은 모둠사진을 모두 넉 장씩 넣은 모습이 새삼스럽습니다. 1967년이면 졸업사진책을 이렇게 엮을 때에 돈이 더 들었을 텐데,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이렇게 사진 한 장 더 넣는 품새가 반갑습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 섬돌에 앉아서 모둠사진을 학년이 다 함께 찍는데, 남학생은 앞쪽에 여학생은 뒤쪽에 앉히는군요.

 《부산여자중학교 3회》(1954) 졸업사진책을 보니, 전쟁 뒤끝이기 때문인지 학교 건물에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전망대이자 감시초소 같은 나무탑이 하나 섭니다. 운동회 사진을 보니, 이 잔치에 나온 어머님들은 하나같이 한복을 차려입습니다. 학교 건물은 모두 나무 널판을 붙여 지었습니다. 졸업사진첩 뒤쪽에 ‘경상남도청 재건 모습’ 사진을 비롯해 부산 시내 재건 모습 사진이 여러 장 깃들고, ‘개교기념 축하운동회’를 퍽 아기자기하게 짜 놓습니다. 맨 뒤에는 ‘港都寫場’ 앞모습 담긴 광고 사진에다가, 사진관 일꾼 두 사람 얼굴사진까지 싣는군요. 사진관 광고까지 싣는 졸업사진책이 있다니, 게다가 사진관 일꿀 얼굴사진까지 싣다니, 이런 모습도 있었네요. 졸업사진책 끝자락에 ‘잊지 못할 동무’라고 적은 글월이 애틋합니다. 참말 그렇지요. 서로서로 잊지 못할 동무로 사귀며 살아가자는 뜻에서 이렇게 졸업사진책을 엮어 간직합니다.

 《부산 남성여자중학교 15회》(1963) 졸업사진책을 살핍니다. 1963년 11회 전국주산 능력자격 시험에 4급에 붙고, 1964년 12회 전국주산 능력자격 시험에 5급에 붙은 합격증하고, 여러 가지 상장이 끼었습니다. 뜻밖에 얻는 선물이군요.

 남성여중은 ‘교내 피구대회’를 열고, 배구 대회 사진이 꽤 많이 실립니다. 1962년에 ‘(부산)시내국민학교여학생배구대회 제1회 대회’를 열었다고 하네요. 학교 안팎 사진 가운데 토끼 기르기를 하는 모습이 새삼스럽습니다. 생각해 보니,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2∼87년에도 학교에서 ‘토끼 기르기’를 해서 저잣거리에 내다 팔아 학교돈에 보태었습니다. 어린 날 동무네 집에 놀러가며 저잣거리를 지나갈 때면 ‘토끼 고기 파는 집’을 흔히 보았습니다. 토끼털로 옷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부산 남성여자중학교 31회》(1979) 졸업사진책을 봅니다. 같은 학교 1963년치 졸업사진책하고 견주면 너무 재미없고 밋밋하게 엮었을 뿐더러 사진 또한 뒤떨어진 모습입니다. 책끝에 고작 몇몇 특활 부서 사진을 담는데, ‘종교부·애국소녀회·실장단·학습부·반공부·배구부·새마을부·걸스카웃부·선도부·미술부’ 이렇게만 나옵니다. ‘반공부’라, 참 무시무시하지만, 1979년 우리 모습입니다.

 《부산 서중학교 21회》(1971) 졸업사진책을 보니, 사이에 졸업장과 개근상장 하나씩 끼었군요. 졸업사진책을 볼 때면 으레 느끼는데, 남학교 졸업사진책은 지나치게 투박하다 싶을 뿐 아니라, 거의 마음을 안 쏟아 엮는다고 느낍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왜 여학교 졸업사진책처럼 예쁘장하게 꾸미지 않을까요. 나중에 살가이 돌아볼 수 있게끔 더 마음을 기울이고 땀을 들여 엮을 수 없을까요.

 《부산 아미국민학교 15회》(1976) 졸업사진책을 봅니다. 여기에도 졸업장 하나 끼었는데, 다른 상장 없이 졸업장만 달랑 끼었구나 싶어요. 이 조그마한 졸업장에는 “국민학교의 전 과정을 졸업하였음을 증함.”이라고 아주 짤막한 글이 적힙니다. 사진을 죽 살피니, ‘통일동산 가꾸기’하고 ‘송충잡이’이 이끌린 아이들 모습이 눈에 뜨입니다. 저도 솔벌레 잡기를 학교에서 꽤 했다고 떠오릅니다. 다른 곳 다른 학교 졸업사진책을 보면서, 제가 다녔던 학교에서 겪은 일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사진 질이 너무 나쁘다고 느끼면서 맨 끝을 펼치는데, “피와 땀의 결정, 우리의 손으로 아름다운 학교 꾸미기”라는 이름이 붙은 사진이 있습니다. 이 사진을 보면 국민학교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을 일구고 나무를 심으며 돌을 날라 축대를 쌓는 모습이 남김없이 드러납니다. 졸업사진책 느낌으로도 이 아이들은 참 재미없었겠구나 싶었는데, 맨 끝자락 사진을 보며 더더욱 끔찍했겠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아이들한테 억지로 일을 시키며 부려먹은 셈이잖아요.

 그러고 보니, 저도 국민학교와 중학교 때에 이런 부역(사역·노역)을 흔히 해야 했습니다. 고사리손이 어쩌고 하는 어른들이지만, 이 여리다는 고사리손에 자갈짐 모래짐 물짐을 짊어지도록 하면서 갖은 일을 많이 시켰어요.

 《부산 덕원중학교 28회》(1983) 졸업사진책을 살피니, 이 학교는 나즈막한 언덕받이 꼭대기에 새로 지은 건물인데, 이 학교 아이들은 목까지 차오르는 까만 학교옷에 하얀 이름표를 단 모습이, 꼭 죄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느낌입니다. 새로 지은 건물이 산꼭대기에 있다 보니, 산밑에 자리한 골목집들은 더없이 조그마하면서 초라해 보입니다.

 《부산 기독사회관 유치반 21회》(1974) 졸업사진책을 봅니다. 유치원 졸업사진책이군요. 꽃반·나비반·별반, 이렇게 세 학급으로 이루어진 유치원입니다. 기독사회관이라 한다면 종교 시설에서 꾸리는 유치원이겠지요. 1974년에 21회 졸업반이라면 1953년에 첫 졸업반을 냈을 테고, 한국전쟁 끝무렵부터 부산에서 아이들을 맡아 왔구나 싶습니다. 1970년대 유치원이라 한다면 얼핏 돈있는 사람만 다니는 곳이라 여길 수 있고, 어쩌면 틀린 말은 아니라 할 텐데, 수수하고 몇 장 안 되는 졸업사진책 꾸밈새를 보자면, 가난하면서 퍽 알차게 꾸린 어린이집이 아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부산 부민국민학교 57회》(1981) 졸업사진책을 들여다봅니다. 모두 여덟 반인 작은 국민학교 졸업사진책에 나오는 교사나 아이나 한 자리에 앉히고 사진 한 장 박습니다. 적은 돈으로 마련하는 졸업사진책이 으레 이와 같이 엮습니다. 반이 많든 적든 이렇게 하면 몇 장 안 되는 부피로 졸업사진책이 나오거든요. 어떻게 보면 어설프거나 아쉽다 여길 만하지만, 달리 보면 이러한 모둠사진을 보여주기 때문에 ‘한 반 아이들 모습과 차림새’를 통째로 들여다볼 수 있어요.

 이 학교에서는 졸업사진을 찍는다며 아이들한테 웃도리만 따로 입힙니다. ‘사진 찍을 때만 똑같이 맞춰 입히는 웃옷’을 입혀요. 그냥 여느 옷 차림 그대로 사진을 찍으면 한결 나을 텐데, 굳이 이렇게 거짓 옷을 입혀야 했을까요.

 《부산 동광국민학교 26회》(1971) 졸업사진책을 보니 부민국민학교하고 사뭇 다릅니다. 이 학교는 따로 학교옷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부민국민학교보다는 돈이 더 많은 곳이었을까요. 아이들 사진은 얼굴사진으로 따로따로 싣는데, 모둠사진은 수학여행 사진만 몇 장 싣고 그칩니다. 학교옷은 따로 있으나, 졸업사진책은 따분하군요. 학교옷으로 아이들을 틀에 박아 놓은 국민학교였으니, 졸업사진책은 따분할밖에 없으려나요.

 《경남여자중학교 28회》(1957) 졸업사진책을 넘기다가 깜짝 놀랍니다. 이곳은 종이를 여느 종이가 아닌 사진 인화지를 씁니다. 사진 인화지로 졸업사진책을 만들었기에 사진 느낌이 오래도록 한결 잘 살아남습니다. 아이들 이름은 사진에 손글씨로 팝니다. 사진 인화지에다 만든 졸업사진책이기 때문일까요. 반 아이들을 작게 모둠으로 묶어 사진을 담을 때에는 학교 안팎 다 다른 자리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찍어, 이무렵 학교 안팎 모습을 새삼스레 돌아보도록 돕습니다. 졸업사진책 겉에는 따로 학교 이름을 적바림하지 않고 ‘追憶’이라고만 적바림하는데, 이 이름 그대로 지난날 삶자락을 돌아보도록 하는 졸업사진책이구나 싶습니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25회》(1956) 졸업사진책을 살펴봅니다. 거의 모두 사내들만 보이는가 싶더니, 알고 보니 모조리 사내들뿐입니다. ‘졸업식 광경’ 사진에 함께 나오는 어머님들 차림새를 보면, 다들 시골에서 농사짓는 분들이 아닌가 싶고, 또는 도회지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분들이지 싶기도 합니다. 남다르다면, 이 졸업사진책은 졸업생 자리는 고작 1/20밖에 안 되고, 나머지 19/20은 일찌감치 학교를 마치고 ‘병원을 차린 선배’들 병원 모습과 식구들 모습을 담은 대목입니다. 더욱이 맨 끝에는 ‘20주년 기념 Party’라고 해서 술판을 벌여 시끌벅적 노는 사진을 제법 많이 담습니다.

 그나저나 졸업사진책 끄트머리에 보니 1978년에 누군가 적은 편지가 담기고, 앞쪽에서 1978년 10월에 쓴 인사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하고 다시금 돌아보니, ‘1956년 지난날에는 졸업사진책을 따로 엮을 겨를’이 없다가, 스물두 해가 지난 1978년에 지난날을 기리면서 이렇게 새삼스레 졸업사진책을 뒤늦게 엮었다고 밝힙니다. 아하, 그렇구나. 이렇게 보면 졸업사진책 끄트머리에 술판 놀음놀이 사진을 잔뜩 실은 모습을 헤아릴 만합니다. 왜냐하면 당신들 지난 스물두 해 ‘발자취와 이야기’를 곱게 갈무리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3) 헌책방골목과 책삶

 졸업사진책을 잔뜩 고르는 바람에 다른 책을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졸업사진책만 살 수 있느냐 싶어, 〈학생중앙〉 1980년 4월호 별책부록 《world big star album》하고 《季刊 靑丘》 2호(1989.겨울), 4호(1990.여름), 10호(1991.겨울)를 집어듭니다.

 〈학생중앙〉 별책부록은, 책 짜임새로 보아 하니, 일본에서 낸 책을 몰래 훔쳐서 냈구나 싶습니다. 《계간 청구》는 재일조선인 사회를 알뜰히 일구려 힘쓴 분들이 땀과 슬기를 모아서 내놓은 잡지입니다.

 지난 2003년에 나온 《이진희-해협》(삼인)이라는 책을 읽으며 《계간 청구》라는 잡지가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일본에서 일본말로 나오는 잡지이니 한국글만 아는 제가 읽을 수 없는 책이지만, 《계간 청구》가 어떤 모습이요 어떤 이야기를 담은 잡지인지 꼭 한 번 구경해 보고 싶었습니다. 일본 헌책방마실을 해야 겨우 만날 수 있을까 싶더니, 이렇게 부산 헌책방골목 마실을 하며 고맙게 만납니다.

 비행기삯 안 들이고도 만나니 참으로 고맙습니다. 나라 건너, 넓은 바닷물 건너, 긴 세월과 숱한 사람들 손길 건너, 책 하나 흐르고 흘러 이렇게 새로운 자리에서 읽힐 수 있군요.

 책이란, 돌고 돌아서 책인지 모릅니다. 책이란, 읽히고 거듭 읽혀 책인지 모릅니다. 책이란, 숱한 나날을 건너뛰거나 고이 흐르면서 사랑받을 수 있기에 책이랄는지 모릅니다. 책이란, 겉읽는 삶이 아닌 속읽는 삶으로 부둥켜안으면서 내 삶을 일구는 밑거름이라 할는지 모릅니다.

 아빠가 이런 졸업사진책 저런 묵은 책을 뒤적이는 동안, 아이는 헌책방골목을 이리 뛰고 저리 쏘다니면서 놀아 줍니다.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은 오늘날 여느 골목과 달리 자동차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사람과 자전거만 오갈 수 있는 호젓한 골목입니다. 이런 골목에서는 아이와 함께 책방마실을 하는 어버이들은 마음을 놓으며 책을 살필 수 있어요. 아이가 골목에서 뛰어놀 때에는 이웃 헌책방 아저씨나 할머니가 아이를 지켜보아 줍니다. 아이가 멀리 달음박질할라치면 아이를 불러 줍니다. 책손을 기다리며 해바라기를 하던 이웃 헌책방 아저씨나 할머니가 아이하고 손 맞잡고 노래를 부르며 논다든지, 그림책을 쥐어 읽어 준다든지 합니다.

 부산사람은 헌책방골목을 이렇게 누리거나 즐길 수 있어 참 좋겠습니다. 헌책방이 수십 수백 군데가 모여야 헌책방골목이 되지 않습니다. 다문 두어 곳이 모여도 헌책방골목이 됩니다. 부산을 비롯해 우리 나라 곳곳에 조촐하며 사랑스러운 헌책방골목이 하나둘 자리를 잡으면서, 작은 마을 작은 책삶을 나누거나 꽃피울 나날을 꿈꾸며 비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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