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서 만난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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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지에서 만난 사내
  • 양진채
  • 승인 2011.02.08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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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칼럼] 양진채 / 소설가

공동묘지는 고요했다. 얼었던 대지가 녹으면서 안개가 묘지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늦은 성묘였다. 설 아침 차례를 지내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아버님 묘가 있는 검단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오가는 성묘객으로 북적거렸을 테지만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묘 주변이 한산했다.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묘지 사이를 지나 아버님 묘를 찾았다. 그때 안개 사이로 한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비어 보이는 배낭을 한쪽 어깨에 걸친 사내는 묘 중간쯤에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식구들이 성묘를 하는 동안도 나는 그 사내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성묘객이 남기고 간 음식을 저 빈 가방에 담으려고 온 노숙자일까? 가슴이 먹먹해졌다. 몇 달째 연락이 안 되는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는 아이들에게 아빠와 연락이 되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찾지 말라는 문자를 남기고 종적을 감췄다. IMF 때부터 진 빚이 이자에 이자를 물고 늘어났고, 빚을 갚기 위해 형제와 친구, 친척에게 돈을 빌렸고, 노모의 통장까지 털었다. 조그만 가게에서 버는 돈으로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밤에는 대리운전을 뛰기도 했다. 빚은 줄지 않았다. 그는 무능한 가장이 되어 있었고 가정은 파탄났다. 그는 결국 빚과 가족과 모든 인연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휴대전화는 오래도록 꺼져 있었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냉방에서 쪽잠을 자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뉴스가 나올 때, 수도 계량기가 동파될 때, 매운바람이 얼굴을 할퀼 때, 역사에 박스를 깔고 잠든 이를 스칠 때, 누군가의 지친 어깨를 볼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살아 있겠지. 어디 막노동판을 전전하고 있는 것인지,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지 노모의 가뭇한 눈은 마를 새가 없었다.

빈부 격차는 커지고 사회적 약자는 점점 더 변두리로 밀려난다. 사람을 평가하는 우선순위가 돈이 되었다.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와 언제 그 자리에서 쫓겨날지 모르는 비정규직은 나날이 늘고 있다. 돈은 돈을 불러오고, 땅은 땅을 늘리는 자본주의 괴물 앞에서 서민들은 발버둥을 쳐봤자 제자리 뛰기도 안 된다고 한다.

돈이 좋다. 나도 돈이 좀 넉넉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넉넉한 기준은, 그저 친구들 만났을 때 밥이나 술을 사고 싶은 기분이 들면, 지갑에 든 돈과 이번 달 들어올 돈과 나갈 돈을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정도. 친정엄마를 만나러 갔을 때 얼마간의 용돈을 챙겨주어도 그 달 살림에 크게 지장을 받지 않는 정도. 우울한 생일에 지하상가를 지나다 마음에 드는 원피스를 보았을 때 주춤거리지 않는 정도. 어려운 누군가에게 받을 생각하지 않고 얼마간 돈을 빌려줄 수 있을 정도. 그도 그 정도의 삶을 원했을 뿐이다. 

성묘를 마치고 길가로 내려올 때까지, 그 사내가 묘 상석에 있는 음식에 손대는 것을 보지 못 했다. 다행이었다. 어쩌면 사내는 느지막이 혼자 공동묘지에 왔다가 찾고자 하는 묘를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제발 그렇기를 바라는 심정이다.

풀릴 것 같지 않던 추위가 누그러졌다. 며칠 내로 언 땅을 뚫고 눈밭에서 복수초가 피어날 것이다. 봄이 오고 멀미가 일 정도로 순식간에 꽃들이 다투어 필 것이다.

어느 해인가 하롱하롱 지는 벚꽃 길을 지나던 환한 날을, 그는 기억할까. 바닥에 떨어진 꽃을 모아 뿌려대던 그때 우린 참 많이 웃었다. 그때 나는 그가 내 오빠인 게 든든하고 자랑스러워 몇 번이고 그의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언제 다시 연락이 닿을지, 영영 닿지 못할지, 모른다. 나는 다만 그가 꽃에게도 눈길을 줄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그의 시원한 웃음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양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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