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배와 같다고 느끼는 사진을 찍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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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와 같다고 느끼는 사진을 찍으려면
  • 최종규
  • 승인 2011.02.15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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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이광호, 《쿠바를 찍다》

 서울예대 사진과를 나오고, 《노블레스》라는 잡지 사진기자로 일하고, 이탈리아 사진대학을 다녀오고, 서울 청담동에서 개인 스튜디오를 열었고, 계원조형예술대학교·청강문화산업대학교·서일대학교·송담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친다고 하는 이광호 님이 내놓은 사진책 《쿠바를 찍다》를 읽습니다. 사진학과를 다녀 사진기자가 된 다음, 사진 찍는 일터를 마련한 한편, 사진학과 강사(또는 교수)가 되어 사진을 가르치는 분이 내놓은 사진책입니다.

 책날개에 적힌 사진쟁이 해적이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광호 님으로서는 어떤 사진을 왜 어떻게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한 줄로도 읽지 못합니다. 다만, 이광호 님으로서는 무언가 끌리는 사진을 좋아하면서, 이렇게 끌리는 모습을 당신도 사진으로 담아서 나누고 싶어 한다고는 느낍니다.

- 아바나를 떠나기 하루 전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한 컷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저 우연이었다. 햇빛이 역광으로 들어오는 아바나의 골목 풍경을 잡아낸 컷이었다. 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134쪽)

 이광호 님은 “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 느낍니다. 이렇게 느끼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사진과를 나오거나 사진과를 다니거나 사진과에서 가르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으레 이렇게 느끼거나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내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자면 “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 느낄 일이란 없습니다. “어, 이렇게 찍은 사진이 참 좋네.” 하고 느낄 뿐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가 아니라, 이야 이렇게 찍으니 참 좋구나 하고 느끼면 넉넉합니다.

 사진찍기란 사진읽기입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나부터 잘 읽어야 나 스스로 새롭게 사진을 찍지, 내가 애써 찍은 사진이 어떠한 사진인가를 옳게 읽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수십만 수백만 장에 이르는 새 사진을 찍는달지라도, 이 가운데 무엇이 알짜요 무엇이 빛이요 무엇이 껍데기요 무엇이 그늘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 다녀온 후 환상이 깨어진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뜨거운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훈훈한 입김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내 시간을 풍요하게 만들어 준다. (10쪽)

 ‘환상’이란 다녀오기 앞서도 품고 다녀온 다음에도 품습니다. ‘깨진 환상’은 다녀오기 앞서도 깨지고 다녀온 다음에도 깨집니다.

 삶은 환상이 아닙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삶 = 현실’입니다. 나로서는 그곳에서 살아가지 않으면서 그곳 사람들이 ‘내 꿈에 나오는 모습’처럼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바랄 수 없다가 아니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내가 꿈으로 그리는 어떤 모습이 있으면, 내가 이러한 꿈처럼 내 터전에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남들보고 내 꿈으로 그리는 모습대로 살아가라고 바랄 수 없을 뿐더러 바라서는 안 됩니다.

 사진이란 삶찍기입니다. 내 둘레 사람들이건 내 모습이건 삶을 찍는 사진찍기라서, ‘사진찍기 = 삶찍기’입니다.

 앞서,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를 옳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찍기 = 삶찍기 = 삶읽기’입니다. 삶읽기를 할 수 있으면 사진찍기를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삶읽기 = 삶찍기 = 사진찍기’가 됩니다.

 내 삶을 읽고 내 둘레 사람들 삶을 읽어야, 비로소 내가 사진으로 무엇을 왜 어떻게 얼마나 찍고 싶어 하는가를 알아챕니다. 알아챈 다음에야 사진기를 쥐어들 수 있고, 알아채고서 사진기를 쥐어들면 내 앞에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빙긋 웃는다든지 스스럼없이 마주한다든지 거리끼지 않으며 얼싸안습니다. 사랑스러운 낯빛 몸짓이 사라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광호 님은 《쿠바를 찍다》에서 골목맥주 파는 사람들 앞에 놓인 자전거를 안 치우고 사진을 찍었다 하는데, 이광호 님이 스스로 자주 밝히는 대로 ‘말을 걸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면, “이봐, 사진 좀 멋나게 찍게 자전거 좀 살짝 옆으로 밀어 놓고 또 한 번 찍을래?” 하고 말을 걸면 됩니다. “사진기 앞이라고 그렇게 얼굴 굳히거나 딱딱하게 있지 말라구?” 하며 다시금 말을 걸면 돼요. 말걸기란, 인사말이나 허드렛말을 아무렇게나 읊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사진으로 담고픈 사람들하고 이곳 이때에 차분히 마주하면서 살가이 ‘이야기꽃’ 피우는 일입니다. ‘치즈!’나 ‘김치!’ 하고 외는 말조차 말걸기입니다.

- 내게 베네치아는 충격이었고 보는 것마다 취재거리였다. (28쪽)

 스스로 충격을 바라는 사람은 베네치아에서도 충격이요 보는 모습마다 취재거리이면서, 서울 사직동에서도 충격이며 보는 모습마다 취재거리입니다. 스스로 충격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강원도 양구 멧골짜기에서도 충격이고 보는 모습마다 취재거리입니다. 꼭 베네치아로 나아가야 충격이 되지 않아요. 내 가슴이 얼마나 ‘충격을 가슴에 안고파 하느냐’입니다. 내 눈길과 마음길이 얼마나 ‘취재거리를 알아채며 느끼려 하느냐’예요.

 이름난 배우만 사진 모델이 되란 법 없습니다. 새내기 배우 또한 사진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쁘장한 여배우만 사진잡지 겉장을 채워야 하지 않습니다. 못생기면 어떻게 안 생기면 어떤가요.

 그러나 어떠한 사람을 놓고 잘생기니 못생기니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제 삶과 제 낯과 제 꿈을 간직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낯과 삶과 꿈을 읽을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사귑니다. 지난날 《샘이 깊은 물》이라는 잡지에서 ‘이름 널리 판 모델 아닌 여느 살림꾼 아줌마’를 겉장으로 채운 넋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을 읽으며 사람을 사귀어야 바야흐로 ‘여행을 하면서 여행하며 만난 사람 모습 사진’을 찍습니다.

- 수선공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고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웃으며 한 컷 찍으려고 하니 얼굴을 굳히며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은 당황스러웠지만 … 더 놀란 건 간단한 수선이니 신발 고치는 값을 받지 않겠다며 그냥 가라고 할 때였다. 그들의 자존심인 것인지, 사진을 찍을 때엔 돈을 내라더니 정작 신발은 그냥 고쳐 주다니. 재미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억지로 1불을 내미니 그는 사진 포즈를 취해 주었다. (82쪽)

 쿠바에 한 달이나 머물렀으면서 《쿠바를 찍다》처럼 홀쭉한 사진책을 내놓는 일은 부끄럽습니다. 고작 한 달인가 하고 여길 수 있으나, 한 달이란 대단히 긴 나날입니다. 그렇다고 한 해나 두 해 머문다 해서 더 멋지거나 놀랍거나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찍지는 않아요. 하루나 이틀을 머문다 해서 더 모자라거나 어리숙하거나 못난 사진을 얻지는 않아요. 살짝 스쳐 지나간달지라도, 내가 내 가슴으로 무슨 사랑을 피워 올리는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딱 1초 겨를이 나서 1/30초로 사진 한 장 찰칵 찍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한 달이면 한 달이라는 나날을 놓고 하루에 사진책 한 권을 엮는 매무새로 서른 날치 사진 가운데 몇 장씩 뽑아 사진책 하나를 새삼스레 또 하나 일굴 만합니다. 그러면, 《쿠바를 찍다》는 쿠바에서 무엇을 찍었는지요. 쿠바 골목을 찍었는지요. 쿠바 사람들을 찍었는지요. 쿠바 바다를 찍었는지요. 쿠바 살림집을 찍었는지요.

 쿠바를 찍든 한국을 찍든 서울을 찍든 흐리멍덩하게 찍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그냥 ‘찍기놀이’입니다. 찍기놀이를 했는데 ‘사진을 찍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찍기놀이가 나쁜 일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찍기놀이는 찍기놀이대로 즐겁습니다. 찍기놀이는 찍기놀이요, 사진찍기는 사진찍기인 줄을 옳게 가누어야 합니다.

 사진찍기는 사진읽기요, 삶읽기요 삶찍기라고 했습니다.

 찍기놀이는 찍기놀이입니다. 찍으며 노는 일입니다. 찍으며 노는 사람은 사진기를 쥔 나 혼자입니다. 나 혼자 여기도 다니고 저기도 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찍기놀이입니다.

 찍기놀이로도 얼마든지 사진책을 낼 수 있습니다. 찍기놀이로 사진책을 내놓는 《두나's 도쿄놀이》나 《두나's 런던놀이》가 있습니다. 배두나 님 사진책은 처음부터 사진책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내놓은 사진책이고, 스스로 사진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즐긴 찍기놀이입니다.

 가볍다 해서 나쁠 까닭이 없고, 가볍기 때문에 더 좋을 까닭이 없습니다. 가벼운 찍기놀이는 말 그대로 가벼운 찍기놀이입니다.

 우리 집 서른두 달짜리 어린 딸아이도 날마다 찍기놀이를 합니다. 찍기놀이를 하다가는 아빠 사진기를 빼앗아서 제가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눈썰미에 따라 제 아버지랑 어머니를 마주하면서 부대끼는 ‘삶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삶결 그대로 삶읽기를 합니다. 삶읽기가 그예 삶찍기인 사진찍기로 이어갑니다.

-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순간 그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238쪽)

 사진쟁이 이광호 님은 보배와 같다고 느낄 사진을 찍으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좋습니다. 누구는 찍기놀이를 하고, 누구는 보배사진을 얻으려 합니다. 누구는 살아가며 사진을 즐기고, 누구는 강단에서 사진 이론을 들려줍니다. 이렇게 해도 사진이고 저렇게 해도 사진인 한편, 이렇게 하니 그저 삶이고 저렇게 하니 그저 놀이입니다. 구태여 ‘사진 울타리’에 집어넣으려 할 까닭이 없습니다.

 《강운구 사진론》이라는 책에서 강운구 님이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예술을 하는 사람이 예술을 하면서 사진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진이 아닌 예술을 하면서 예술을 굳이 사진이라고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찍기놀이를 하면 그냥 찍기놀이를 즐기면 될 뿐, 찍기놀이도 사진이라고 우길 까닭이 없습니다. 쿠바를 여행하면서 찍기놀이를 즐겼으면 찍기놀이를 즐겼을 뿐입니다. 그때그때 숱한 사람과 부대끼며 ‘이광호 님이 받은 느낌’을 사진으로 담고팠다면, ‘사진이라는 매체’를 쓰며 찍기놀이를 했을 뿐이지 ‘사진을 한’ 셈은 아닙니다. 쿠바를 여행한 나날을 글로 적거나 그림으로 그렸을 때에도 ‘쓰기놀이나 그리기놀이를 했다고 해야, 글쓰기를 했다거나 그림그리기를 했다고 할 수 없’어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좀 지나치다고 느낄 분이 있을까 궁금한데요, 하나도 지나친 이야기가 아닙니다. 쿠바사람은 쿠바라는 나라에서 ‘억지로 예술스러운 노래를 부르’거나 ‘일부러 예술스러운 집을 꾸미며 살지’ 않습니다. 그저 쿠바사람은 쿠바사람 삶을 즐깁니다. 쿠바사람이 쿠바사람대로 즐기는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 이것 참 예술이로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부에노 비스타 소셜 클럽이든 무엇이든, 이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를 부르지, 예술이 되거나 작품이 되라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좋아서 부르는 노래를 듣는 우리들이 ‘이 노래야말로 예술이라고!’ 하고 외친들 얼마나 부질없습니다. 정작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즐거이 춤추고 마시며 흐드러지는데.

 쿠바를 찍는 사진들은 어설피 “쿠바를 찍다”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쿠바에서 함께 놀았다”고 말해야지요. 아니, “쿠바에서 찍기놀이를 조금 맛보았다”고 말해야지요.

 삶을 읽지 않았으니 삶을 찍지 못하고, 삶을 찍지 못했으니 사진찍기라 할 수 없으며, 사진찍기를 할 수 없었으니 사진을 한 셈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진을 하고 싶어 이모저모 애쓰거나 땀을 흘린 삶입니다. 사진으로 걸어가고자 힘을 쏟고 마음을 바친 나날입니다. 부디, 이 땀과 발걸음을 예쁘게 돌아보면서 착하게 보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럴 때에 비로소 내 나름대로 내가 보배와 같다고 느끼는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말해 줄 사진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며 좋아할 사진 한 장을 얻어야 할 사진삶입니다.

- 쿠바를 찍다 (이광호 사진·글,북하우스 펴냄,2006.7.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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