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말하는 사람, 강운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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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말하는 사람, 강운구
  • 최종규
  • 승인 2011.02.22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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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강운구, 《강운구 사진론》

- 책이름 : 강운구 사진론
- 글 : 강운구
- 펴낸곳 : 열화당 (2010.10.7.)
- 책값 : 2만 원

 (1) 사진말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습니다. 아주 많습니다. 사진을 찍는 수많은 사람이 모두 사진쟁이라 할 만한가 하고 헤아린다면, 누구나 사진쟁이라 할 만하지만, 모조리 사진쟁이라 해도 좋으려나 알쏭달쏭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많습니다. 매우 많습니다. 글을 쓰는 숱한 사람이 몽땅 글쟁이라 할 만할까 하고 곱씹는다면, 누구든 글쟁이라 할 만하지만, 죄다 글쟁이라 해도 좋을는지 아리송합니다.

 혼인을 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면 어찌 되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며 어버이가 됩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아 키우기는 하지만 아버지답지 않거나 어머니답자 않아 도무지 어버이라 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름은 틀림없이 어버이이면서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일 테지요. 아버지 노릇을 못한달지라도 어찌 되든 아버지입니다. 그러니까,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는다면 누구나 사진쟁이입니다만, 사진다운 사진을 살피지 못하면서 사진찍기다운 사진찍기를 하지 않을 때에는 사진쟁이라 할 만하기 어렵습니다. 연필이나 볼펜을 쥐어 글을 쓴다면 누구나 글을 쓰는 셈이지만, 이 글이 참말 글다운가 아닌가를 돌아보았을 때에, 하나도 글답지 않을 뿐더러, 이러한 글로 독재부역이라든지 식민지부역이라든지 돈바라기로만 흐른다든지 한다면, 이 또한 글을 썼다고 하기 참 힘듭니다.

 예나 이제나 사진쟁이는 많고 그림쟁이도 많으며 글쟁이도 많습니다. 춤쟁이나 노래쟁이도 많습니다. 먼 옛날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백 해쯤 앞서 이 나라에 막 사진기가 들어왔을 무렵, 사진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몹시 드물었습니다. 사진이 이럭저럭 퍼졌을 때에도 사진기를 쥘 수 있는 사람은 퍽 드물었습니다. 사진기 한 대 장만하려면 돈을 많이 들여야 했고, 사진을 찍어서 종이로 뽑자면 또 돈을 많이 들여야 했습니다.

 오늘날은 값싼 사진기 많고 한 번 쓰고 버리는 사진기까지 있습니다. 굳이 필름이 아니어도 디지털로 찍을 수 있는 사진이요, 집에 셈틀 한 대 있으면 돈 걱정 않고 사진을 찍을 만하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돈 걱정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지는 않습니다. 첫째, 어찌 되든, 그러니까 값이 싸든 비싸든 사진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장만한 사진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합니다. 셈틀이 있어야 합니다. 셈틀을 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디지털사진이 필름사진보다 돈이 덜 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신나게 찍어 디지털파일이 늘면 셈틀 저장장치를 차지하는 부피가 자꾸자꾸 늘어납니다. 자꾸자꾸 늘어나는 부피를 넓히려면 저장장치를 새로 장만해야 합니다. 필름은 한 번 만들어 놓으면 이대로 건사하면 그만이지만, 디지털파일은 꾸준히 새로 갈무리해야 합니다. 저장장치는 백 해 이백 해를 가지 않습니다. 아니, 쉰 해를 갈 수 있으려나요? 스무 해나 갈 만할는지요? 메모리카드는 이 하나를 죽을 때까지 쓰지 못합니다. 메모리카드도 소모품이요, 디지털사진기 건전지도 소모품이며, 건전지에 전기를 먹여야 하는데, 건전지 전기값은 누가 거저로 대지 않습니다. 디지털사진기는 열 해 스무 해 안 망가질까요? 디지털사진기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면 고치는 데 드는 값보다 새로 사는 값이 훨씬 싸다 싶기까지 합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진쟁이 길을 걷자면, 어쨌든 돈이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어 사진을 팔아 돈을 벌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든, 사진찍는 사진쟁이 길을 걷는 사람은 무엇을 해서든 돈을 마련해야 합니다. 나 먹고살거나 식구들 먹여살리는 돈을 벌면서, 사진을 찍는 데에 들 돈을 벌어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연필과 종이만 있으면 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붓과 물감과 종이만 있으면 된다지요. 아니, 그림을 그릴 때에 물감 장만할 돈이 없으면 연필 하나로 그리면 된다지요. 노래를 하는 사람은 목소리만 있으면 되고, 춤을 추는 사람은 몸뚱이만 있으면 돼요. 내 삶을 드러내거나 내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이웃 삶을 담아내거나 이웃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는 온갖 문화나 예술 갈래 가운데 사진처럼 돈 많이 들고 돈 꾸준히 들며 돈 걱정을 해야 하는 일도 없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으나 누구나 하기 힘들며, 어디에서나 즐길 수 있으나 어디에서나 즐기기 어려운 사진 같은 일거리도 없어요.

 장비를 마련하고 사진을 이루며 사진이야기를 일구는 흐름을 돌아볼 때에,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삶은 사진에 찍히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라보기에 ‘참 한갓지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꽤 먹고살 만하니까 사진을 찍는군.’ 하고 여길 수 있으며, 이러한 생각은 틀리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느긋하게 먹고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하지만, 또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찢어지게 가난해서 그예 아끼던 사진장비를 팔아 끼니를 때우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사진길을 걷는 사람은 사진을 한 장 두 장 찍을 때마다 ‘들어오는 돈은 없어도 나가는 돈은 있는 삶’을 꾸리니까, 사진을 잘 모른다는 사람들이 바라보기에 ‘퍽이나 한갓지거나 재주 좋은 사람이군.’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나라 이 땅 사진밭을 돌아본다면, 사진길 걷는 삶부터 제법 만만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어 돈을 벌 구멍이란 그리 안 넓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면서 돈벌이 걱정을 줄이기란 참으로 버겁습니다. 다큐사진이니 상업사진이니를 떠나, 사진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돈되는 사진’으로 갈밖에 없습니다. 가장 돈이 잘 된다 싶은 패션사진을 찍거나 광고사진을 찍거나 상업사진을 할밖에 없습니다.

 사진길 갈래는 숱하게 많지만, 숱하게 많은 사진길을 다 다른 삶과 넋으로 꿋꿋하고 씩씩하게 걸어가며 사진을 하기 힘든 이 나라입니다. 온갖 갈래 사진이 아름다이 춤추거나 노래하면서 재잘재잘 이야기꽃을 피우기 어려운 이 땅입니다. 더욱이, 다큐사진 한 가지만 보아도 다큐사진은 ‘다큐사진 하나’라 말하지 못합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갈래부터 수없이 자잘히 갈립니다. 아프거나 가난하다는 사람들을 좇아 찍는 사진이 있겠고, 환경 문제를 좇는 사진이 있을 테며, 사회운동과 노동운동 발자취를 따르는 사진이 있겠지요. 골목동네 삶자락을 담는 사진이라든지, 수수한 여느 살림꾼(어머니나 할머니)하고 함께 살아가며 담는 사진이나, 내 아이 삶을 갓난쟁이 때부터 훌쩍 클 때까지 고이 살아내며 담는 사진이 있습니다. 시골 농사꾼하고 함께 보내는 나날을 담는 사진이라든지, 여느 회사원이나 공무원하고 함께 어울리는 나날을 담는 사진이라든지, 철도·지하철·택시·버스 일꾼이나 연예인·정치꾼·운동선수 뒤꽁무니를 졸졸 따르는 사진이 있습니다. 나라밖 아프리카나 인도나 티벳을 밟는다든지 남아메리카나 미국이나 일본을 쏘다니는 다큐사진도 있어요. 한국땅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이들 가운데 수많은 다큐사진 길을 옳게 살피며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걸어가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왜냐하면 다큐사진 길이 얼마나 넓으며 깊은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는 상업사진에서도 엇비슷하다고 느낍니다. 패션사진이든 광고사진이든 다르지 않다고 느낍니다. 《강운구 사진론》에서 강운구 님도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히 되풀이하면서 다루기도 하는 ‘만듦사진’도 매한가지입니다. 만듦사진은 사진이라 할 수 없는 ‘종합예술’이라 해야 옳겠으나, 만듦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이러한 사진으로 걸어가는 길이란 대단히 넓습니다. 좁을 수 없을 뿐더러 좁지 않아요. 패션사진이라 해서 한 갈래일 수 없습니다. 광고사진 길이 한 가지일 턱이 없습니다.

 아리따운 몸매를 뽐내는 여자 모델이 입는 이름값 있는 회사 옷만 패션사진이 되겠습니까. 어린이옷도 옷이며 생활한복도 옷입니다. ‘모던 패션’만 패션사진이겠습니까. 이름부터 영어로 써서 ‘패션’이지만,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입는 옷·차리는 입성·꾸미는 매무새를 두루 돌아본다면, 오늘날 한국땅처럼 이렇게 사진이 옹송그려서는 안 될 노릇입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지만 돈으로만 나아가서는 사진이 될 수 없고, 돈도 벌어야 하지만 돈만 벌어서는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주문하는 사람 입맛에 맞출 때에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때에는 물건입니다. 오늘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상업사진은 사진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사고파는 물건인 상품일 뿐인 상업사진이라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사진관 영업사진을 놓고 사진이 아니라고 오래도록 말해 왔는데, 사진관 영업사진이 사진이 아닐 까닭이 없으나, 사진관 영업사진이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주문받아 찍는 상업사진’ 가운데 사진이 될 사진이란 한 장조차 없습니다. 패션잡지이든 요리잡지이든 연예인을 담는 사진이든, 이런 사진들은 하나같이 주문을 받아 찍는 사진입니다. 신문사와 잡지사가 찍는다는 보도사진 또한 편집국 주문에 따라서 찍기만 한다면 사진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우리 나라 보도사진이 나날이 눈높이가 낮아지거나 떨어지는 까닭은 ‘편집국 주문 받아쓰기’ 틀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편집국 주문은 주문대로 받아들이면서 ‘사진다운 사진’으로 찍어야 사진입니다.

 편집국에서 바라는 대로 쓴다고 해서 모두 글이 되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쓰는 글을 놓고 ‘이 글은 글입니다.’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돈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편파 왜곡 보도’라고 하지요. 사진이라 해서 다르지 않고, 그림이라 해서 다를 수 없어요.

 사진이 사진이 되자면, 말 그대로 사진답게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패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생활사진이든, 프로사진이든 아마사진이든, 그저 사진은 사진대로 나아가면 됩니다. 돈을 벌어야 한다면 돈을 벌되 사진다움을 잘 추슬러야 합니다. 돈구멍을 찾든 말든 사진길은 사진길대로 아끼며 보듬어야 합니다.

 사진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사진이며, 사진길을 걷는 참사진이라면, 이때에 시나브로 사진을 말하는 사진말이 태어납니다.

 사진다운 사진인 참사진이 없는 나라에서는 말다운 말인 참말이 없습니다. 곧, 사진을 말하는 사진말이 있자면 참사진과 참말이 있어야 하며, 이 나라는 참나라여야 합니다.

 사진이 옳게 사진길을 걷지 않으니, 사진을 옳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힘듭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사진찍기를 참다이 하지 않기에, 사진쟁이 스스로 사진을 말하지 못할 뿐더러 ‘사진을 안 찍으면서 사진비평만 하는 사람’들이 슬기롭거나 아름답게 ‘사진 말하기’를 할 수 없습니다.

.. 할 말을 한다고, 옳은 말을 한다고(설사 옳은 말이 아닐 수가 있다 하더라도 한 작가로서의 생각을 말한다고) 괴팍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선 괴팍하지 않은 사람들이 수상쩍은 사람들일 것이다 ..  (160쪽)

 사진을 사진 그대로 말하는 사람이 드물고, 사진을 사진다이 읽는 말이 드문 까닭은 오로지 하나입니다. 한국사진 발자취가 어느덧 백 해를 아우른다 하지만, 정작 백 해를 아우르는 기나긴 나날을 통틀어 사진다운 사진길, 참사진을 걷는 길이 너무 흐리멍덩하기 때문입니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사진찍기를 사진찍기 그대로 맞아들이지 않으니까, 사진을 말할 사람이 없고, 사진을 말하더라도 엉뚱한 지식읊기로 그치거나 주례사비평에 머뭅니다.

 (2) 강운구 사진말

 한국사진 백 해를 거슬러오르면서 사진책을 톺아볼 때에, ‘사진비평’을 다루었다는 책은 얼마나 되랴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사진을 말하든 한국사람 눈높이로 세계사진을 말하든, 사진비평으로 이루어진 사진책이 몇 권쯤 될까 궁금합니다.

 이제 한국땅에도 대학교 사진학과가 제법 많은데, 사진학과 교수나 강사 가운데 당신 나름대로 당신 넋과 삶과 꿈을 고이 담은 사진비평이 몇 권쯤 새롭게 태어나서 읽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학과에서 가르치는 책으로든, 사진학과를 넘나들며 배우는 책으로든, 한국뿐 아니라 세계 어디에서도 나눌 만한 책으로든, ‘한국 사진비평책’은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 그이들은 다만 사진이라는 새로운 표현 도구를 그이들의 미술에 이용했을 뿐이지, 사진을 한 것은 아니다 … 렌즈는 어둡고 필름의 감도는 느렸던 거의 칠십 년 전쯤엔 부단한 노력과 열망으로 ‘결정적인 순간’을 포착했었으나, 이 테크놀로지 시대의 청개구리들은 그 뛰어난 전자동 카메라를 가지고 고작 차려 자세로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주로 찍는다 … 그런데 그런 사진가들은 ‘장르의 벽이 해체된 시대’라고 하면서도 결코 사진가란 딱지를 떼고 ‘아티스트’란 카테고리로 들어갈 마음도 용기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 그리하여 사진이 범미술로서 확산되는 점이야 좋지만, 진정한 사진은 거의 실종될 지경에 이르렀다 … 그리하여 어떤 사진을 보고 “그림 같군요.” 하는 게 최상의 칭찬이다. 그런데 사실 그것은, 제대로 된 사진을 두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건 모욕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사진은 사진다워야 하는 것이다 … 내용 없는 화면에서 기술만이 빛나는 사진을 볼 때 나는 허탈감을 느낀다. 표현 기술은 결국 한 작가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화면에 나타나게 하는 데 소용되는 것일 뿐이다 ..  (18∼21, 186쪽)

 글을 말하는 책은 대단히 많습니다. 글쟁이 어느 한 사람을 놓고 말하는 책이 꽤나 많습니다. 숱한 사람이 숱한 눈길과 목소리로 글쟁이 한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누군가는 글쟁이 한 사람을 속속들이 꿰뚫으면서 제대로 말할 테며, 누군가는 어설피 건드리며 어수룩하거나 엉뚱하게 말할 테고, 누군가는 그럭저럭 아주 틀리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아주 알맞지도 않게 말할 테지요.

 그러나, 사진밭에서 사진을 말하는 사람은 눈에 뜨이도록 적거나 없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을 놓고 수많은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과 결과 무늬에 따라 다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지 못합니다. 으레 한목소리입니다. 거의 한통속입니다. 그냥 한 가지입니다. 그나마, 웬만한 사진쟁이들은 한목소리 한통속 한 가지인 이야기조차 못 듣기 일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라 해서 이웃 글쟁이를 애써 말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글을 쓰는 사람들은 서로서로 이웃 글쟁이 글을 읽습니다. 이웃 글쟁이 글을 읽고 난 다음에는 으레 이웃 글쟁이 글이 어떻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퍽 많이 나돌며, 신문이든 잡지이든 으레 몇 꼭지 차지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이웃 사진쟁이를 얼마나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진쟁이치고 이웃 사진쟁이 사진을 제대로 들여다보거나 살피거나 마주하면서 말을 해 주는 사진쟁이는 얼마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이웃 사진쟁이가 사진책을 내놓았으면 이 사진책을 기꺼이 장만해 주는가요. 내가 내놓은 사진책을 이웃 사진쟁이는 스스럼없이 장만해 주는가요. 내 이웃 사진쟁이 사진책을 읽은 다음 사진이야기를 즐거이 펼치거나 나누는가요.

.. ‘미술사진’은 주로 화가들이 다만 사진술을 그이들의 새로운 표현수단으로 차용해다가 쓸 뿐이므로 사진의 본질이나 문법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런 이들의 작품은 그런 점 때문에 더 예술적으로 보인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그런 사진을 사진가들이 새로운 사진의 경향으로 알고 받아들인 수가 많다. 그런 난해한(그러나 사실은 애매한) 것들이 ‘예술’의 이름으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수가 많다 … 나는 그림이나 사진 같은 이미지를 감상할 때, 이 작가는 어떤 나라 말을 쓰는지를 식별해 본다. 그래야 이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 세계화에 편승할 것도 있고, 오롯이 남아 있어야 할 것도 있다. 다른 언어로는 해 보기 어려운, 한국어로 말하는 한국사진은 우리가 아니면 아무도 고민하지 않는다 … 자연과 어울리는 곡선과 빛깔에서 붉고 푸른 빛깔의 얄팍한 직선으로 온 나라의 집과 마을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그리고 느닷없이 전통과 익숙한 풍경으로부터 단절되었을 때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아무렇지도 않았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 떼로 몰려다니길 좋아하며, 증명서를 내세우는 작가가 있다면 틀림없이 가짜일 것이다 … 요즈음의 전시회 카탈로그들 중에는 작가 이름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영어로만 되어 있는 것들도 있다. 세계화를 노린 전략일 터이다. 그러나 대다수인 자국 사람은 어쩌고, 어쩌다 오는 외국인을 겨냥하는 그런 전략을 세우는 것일까 ..  (28, 30, 31, 90∼91, 226, 228쪽)

 한국땅 글밭이 그리 아름답다 하기는 뭣하지만, 한국땅 사진밭은 한국땅 글밭을 둘러보았을 때 그지없이 메마르거나 딱딱하거나 슬픕니다. 비평이든 비판이든, 악평이든 촌평이든, 손가락질이든 뚱딴지이든, 갖가지 목소리가 잘 안 들립니다. 너무 딱딱해서 여느 사람은 좀처럼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애써 읽어도 알아듣지 못할 논문 아니면 주례사비평만 넘치는 한국땅 사진밭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을 읽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읽거나 사진을 말하는 사람들 말은 한국에서만큼은 ‘너무 어렵’거나 ‘그예 추켜세우’기만 합니다.

 이런 한국땅 사진밭에서 《강운구 사진론》 하나 제법 두툼하게 태어납니다. 여느 사람들이, 곧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진을 찍거나 사진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조곤조곤 읽으며 도란도란 사진이야기를 나눌 만한 책으로 《강운구 사진론》이 하나 태어납니다.

.. 예술가적인 기질만 가진 사진가보다는 건전한 시민정신과 자기가 사는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역사의식을 가진 사진가가 우리에게는 더욱 필요하다. 인간의 문제와 정면대결을 기피한 것은 역사의식의 결여를 반증한다 … 작가의 관점이 나타나 보이지 않는, 여러 장으로 구성된 단순한 기록을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까 … 주관이 전혀 배제된다면 이 넓디넓은 세상의 많고많은 것에서 무엇을 왜 찍어야 된다는 말일까 … ‘원로’ 대접을 받으며 작가 노릇하는 것도, 또는 칩거하는 것도 사는 것이다. 그보다 더 잘 사는 것은 현장에 적극적으로 나타나서 개입하는 것이다. 그 경험, 지식, 성찰들 다 나눠 주는 게 잘 사는 것이 아닐까 ..  (70, 112, 130쪽)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내놓은 《강운구 사진론》에는 새로 쓴 글은 몇 가지 안 됩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 길고 짧게 내놓았던 글을 그러모읍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이든 지난날이든 한국땅에서 사진이야기를 담을 만한 신문 자리나 잡지 자리는 꽤 드뭅니다. 기껏 사진 한 장 담아 주는 자리는 있을는지 모르나, 사진이란 무엇이며 사진찍기란 어떠하고 사진읽기를 하는 매무새를 밝힐 만한 자리를 신문이건 잡지이건 웬만해서는 마련해 주지 않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사람이 드물기도 하지만, 사진을 말할 만한 자리부터 마련되지 않습니다. 강운구 님으로서도 사진을 말하는 글을 바지런히 쓰셨달지라도 애써 쓴 글을 내놓을 만한 자리는 거의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 아닌 강운구 님쯤 된다면 스스로 ‘사진말 실을 자리’를 마련하도록 힘쓸 수 있습니다. 먼저 당신 스스로 사진말을 싣는 자리를 신문이든 잡지이든 마련하도록 힘써서 한두 해쯤 신나게 사진말을 털어낸 다음, 당신 사진벗이나 사진동생한테 물려주면 됩니다. 이렇게 하고 다른 신문이나 잡지에서 또 새롭게 사진말을 싣는 자리를 마련해서 한두 해 바지런히 사진말을 쏟아낸 다음, 또 당신 사진벗이나 사진동생한테 이어주면 돼요.

 없다 해서 끌끌 혀를 찰 노릇이 아니라, 없으니 만들어야 합니다. 없으니까 사진잡지도 새로 만들어야 하고, 없기에 ‘있는 사진잡지’에 좋은 자리를 만들도록 힘과 땀과 품을 바쳐야 합니다.

 《강운구 사진론》을 읽으면서, 무엇보다 강운구 님 스스로 당신 사진삶과 사진말을 어느 한 자리에서 꾸준하게 적바림하면서 나누어 왔다면, 이 책 짜임새는 사뭇 달라졌거나 훨씬 새로웠으리라 느낍니다. 워낙 한국땅 사진밭에 사진말이 드물기도 했으니, 《강운구 사진론》 하나로도 반가우면서 고맙지만, 웃사람이 아랫사람한테 나무라듯 내려보내는 말마디보다는 사진길 걷는 옆지기이자 길동무로서 살가이 손길을 내미는 사진말로 알뜰살뜰 꾸밀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강운구 님 사진찍기란 ‘웃어른이 선보이는 작품’이 아니라 ‘사진길 걷는 여느 사진쟁이로서 사진쟁이와 이웃한 사람들 삶을 어깨동무하는 눈썰미로 살가이 마주하며 다가서는 사진’ 이루기일 테니까요.

..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땐 찍으면 다 ‘사진’이었을 터인데, 아무리 재 보아도 ‘사진’이 될 것 같지가 않아서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겨우 한두 번만 누른 적이 많았다. 마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 (내 사진은) 나의 친구들과 이웃과,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 외국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 내 딴에는 그늘진 구석이나 그런 곳에서 힘들어 하거나 외로워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두고 돌아다녔는데, 마땅히 그런 이들은 사진 찍히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  (82, 93, 262쪽)

 《강운구 사진론》을 읽다 보면 “그러나 프로페셔널 사진가의 가장 이상적힌 형태인 프리랜서 사진가는 아직까지 한 사람도 없다(61쪽).” 같은 대목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은 옳을 수 있으나, 꼭 옳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프로페셔널 사진가’는 반드시 ‘프리랜서 사진가’일 때에 가장 아름다울 수 있지 않을 뿐더러, ‘프리랜서 사진가가 한 사람도 없을’ 수 없으니까요.

 프로페셔널이란 무엇이고 프리랜서란 무엇인가요. 사진을 찍는 사람들한테 이러한 이름은 무슨 보람이나 뜻이나 값이 있으려나요. 오늘 이 나라에는 어떤 사진쟁이가 있어야 하나요. 세계사진역사에 주름잡거나 한두 줄 적힐 만한 사진쟁이가 있어야 할까요. 현대세계사진을 이끄는 사진쟁이라든지 온누리에 빛날 사진쟁이가 있어야 하는가요.

 강운구 님은 “내 딴에는 그늘진 구석이나 그런 곳에서 힘들어 하거나 외로워 하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다고 이야기합니다만, 이 땅에는 “그늘진 구석” 사람이란 없습니다. 아니, 그늘진 구석 사람이란 서울 강아랫마을 비싸디비싸다는 아파트에서 살아가며 아이들을 대학입시에 목매달도록 하는 사람들일는지 모릅니다.

 다시금 왜냐하면이라고 말할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강운구 님 스스로도 느끼실 테지만, 강운구 님이 찍었다는 “그늘진 구석” 사람들 모습이 담긴 사진을 들여다볼 때에, 이들 삶이 그늘진 구석이라고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내 딴에는 그늘진 구석”으로 볼는지 모르나,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요, 가난하면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인 까닭에, 이들을 사진으로 담은 작품을 들여다보면 더없이 따스하면서 넉넉합니다. 포근하면서 보드랍습니다. 강운구 님이 여태것 찾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은 “그늘진 사람”이 아니라 “볕좋은 사람”이요 “따스한 사람”이며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마땅한 노릇일 텐데, 참말 한국땅에서 그늘진 구석이라 할 만한 서울 강아랫마을 아파트사람을 찾아가서 사진기를 들이대어 보셔요. 얼마나 짜증스럽게 여기거나 싫어하거나 못마땅하다며 바라볼까요. 서울 강아랫마을뿐 아니라, 이 나라 어느 골골샅샅 누비더라도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당신은 그늘진 구석 사람이요’ 하고 바라본다면 반가이 마주하거나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따스한 볕자리 사람이에요’ 하면서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사진은 사진빛을 내면서 사진힘을 나누어 줍니다.

.. 외국의 최신 작품들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여기가 후진국이라는 거죠 … 기본적으로는 내 언어권, 문화권 사람들에게 보이면서 생각과 느낌을 나누어야겠지요. 그래서 이 땅의 풍토에서 생기는 일, 현실과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되는 거지요 … 제가 작품집이나 전시회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보편성입니다 … 사진가가 넥타이 매고 다니거나 잠바를 입고 다니거나 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진가의 위상이란 뭔지 이해할 수가 없고, 결국 사진가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좀 전에 얘기했던 내용(사진가는 사진 해서 잘 먹고 잘 살길 바랄 뿐입니다)과 아마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됩니다 … 그런데 여러분(사진학과 교수)들이 사진 학교에 계시면서 ‘그건 사진이 아니야’라는 소리를 왜 아무도 못 하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술을 하려면 예술이라고 분명히 밝히면서 가야지, 사진을 한다고 그러면서,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나는 사진작가야 하면서 사진 아닌 걸 하지는 말라는 얘깁니다 ..  (314, 315, 340, 351, 352쪽)

 《강운구 사진론》은 이제까지 숱한 한국 사진쟁이하고 한국 사진평론가가 말하려 하지 않은 대목 하나를 퍽 속시원하다 할 만큼 이야기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 하나는 속시원히 풀어내지만 다른 자리는 풀어내지 못해서 아쉬운데, 강운구 님 한 사람이 모든 이야기를 다 풀어낼 수 없으며, 다른 자리는 우리들이 차근차근 풀어내면 됩니다. 곰곰이 되씹으면, 강운구 님으로서는 다른 자리는 우리들보고 풀어내라는 뜻으로 당신이 풀어낼 꼭 한 가지를 다부지고 당차게 풀어내려고 하셨다 할 수 있어요.

 바로 ‘그건 사진이 아니야’ 하고 외치는 한 마디입니다. ‘사진 학교에서 교수나 강사로 있는’ 사람들이 사진 아닌 사진을 자꾸 사진이라는 옷을 입히며 비평과 평론을 해대는 모습을 나무랍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예술쟁이일 뿐 사진쟁이가 아니요’ 하고 외칩니다. 예술쟁이가 볼펜을 든다 해서 글쟁이일 수 없고, 예술쟁이가 붓을 든다 해서 그림쟁이일 수 없으니, 예술쟁이가 사진을 들었대서 사진쟁이일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예술쟁이가 노래를 부르거나 춤을 춘대서 예술쟁이를 가리켜 노래쟁이라 하거나 춤쟁이라 하지 않습니다. 백남준 님이 텔레비전 화면서 당신 넋을 글로 죽 보여준다 할지라도 백남준 님은 글쟁이로서 쓰는 글이 아니라 예술쟁이로서 쓰는 글이면서, 글이 아닌 예술입니다. 예술쟁이가 사진기를 손에 쥐어 예술을 한다면, 이는 ‘사진기라는 물건’을 빌어서 선보이는 예술입니다. 이른바 거의 모든 만듦사진은 사진이라기보다 예술이고, 사진 테두리 아닌 예술 테두리에서 다루어야 올바릅니다.

 “그 뛰어난 전자동 카메라를 가지고 고작 차려 자세로 정지되어 있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그 비슷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을 주로 찍는다”는 말씀은 아주 옳습니다. 그 뛰어난 전자동 사진기는 멈춘 모습을 찍으라는 사진기가 아닙니다. 아주 어둡거나 아주 재게 움직이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목숨을 찍으라고 나온 사진기입니다. 똑딱이 디지털사진기로 찍어도 될 만한 예술품을 굳이 값나가는 비싼 사진기로 만들(‘찍을’이 아닌)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른 한편으로는 안 옳기도 합니다. 오늘날 만듦사진을 하는 젊은이들은 ‘그 뛰어난 전자동 사진기’를 어릴 때부터 곁에서 흔히 보면서 다루었으니까요. 수동사진기만 있던 때라든지 대형사진기만 있던 때에 태어난 젊은이라면 수동사진기나 대형사진기로 만듦사진, 곧 예술을 했겠지요. 나라밖에서 빼어난 솜씨를 선보이는 만듦사진쟁이(또는 예술쟁이)들치고 그 뛰어난 전자동 사진기를 쓰는 사람은 그리 안 많다고 합니다. 값싼 사진기나 똑딱이를 쓰는 사람이 제법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사진찍기’가 아닌 ‘예술하기’를 하기 때문에, ‘내 예술을 하기에 가장 알맞춤하다 싶은 장비’를 찾을 뿐이니까요. 아직 우리 나라에서 예술쟁이로 일하는 사람들은 ‘내 예술에 걸맞을 장비’를 잘 모르거나 못 찾았다 할 만하니까요. 가르치는 사람부터 틀에 박혔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도 틀에 박힙니다. 한국에서는 대학교뿐 아니라 초·중·고등학교 교육이 온통 틀에 박혔습니다. 이리하여, 대학교 사진학과 사람들만 나무랄 수 없어요. 나무라려 한다면 대학교에 앞서, 대학교에 들어온 아이들이 지난 열두 해에 걸쳐 얼마나 틀에 박히게 살며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했는가를 나무라야 합니다. 이 슬픈 아이들이 저마다 스스로 틀에 박힌 줄조차 모르면서 틀에 박힌 사진을 하는 안타까운 모습을 따스히 어루만질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강운구 님은 한국땅 사진밭 어르신이기 때문입니다. 따끔한 말도 좋고 매서운 말도 좋으나, 밑바탕을 더 깊이 훑으면서 한결 넉넉히 감싸 주는 살가우며 구성진 말이 참으로 좋습니다.

 《강운구 사진론》은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그동안 쓴 온갖 글을 그러모은 책으로는 훌륭합니다. 그렇지만, 사진찍는 강운구 님이 밝힐 사진이야기로는 첫걸음입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한 해 두 해 찬찬히 사진말을 여러 신문과 잡지에서 두루 이어실어 주시면서 새로운 “강운구 사진말”과 “강운구 사진이야기”를 베풀어 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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