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하고 나눌 가장 대수로운 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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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하고 나눌 가장 대수로운 한 가지
  • 최종규
  • 승인 2011.02.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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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마거릿 파크 브릿지·케이디 맥도널드 덴튼, 《내가 만일 엄마라면》

 그림책 《내가 만일 엄마라면》을 읽습니다. 딸아이와 어머니가 마주앉아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우는 줄거리를 다룹니다. 딸아이는 제 어머니가 저를 얼마나 알뜰히 사랑하는가를 느끼지만, 이렇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저 하고픈 대로 다 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아이로서 무엇을 하고픈지를 하나하나 이야기합니다. “내가 만일 엄마라면 나는 내 딸아이한테 이렇게 해 주겠다”는 꼬리말을 달아 조곤조곤 말을 겁니다.

- “엄마, 엄마도 다시 어린애가 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그럼, 얘야. 엄마도 그럴 때가 있지.”

 어머니는 아이가 하는 말에 토를 달지 않습니다. 아이가 마음껏 이야기를 하도록 지켜보고 귀담아들으며 맞장구를 칩니다. 아이는 어머니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홀로 마음껏 꿈나래를 펴고 즐거운 놀이나라를 오갑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하는 말에 터무니없다느니 벌써 다 하는 일이잖니 하고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 스스로 말문이 터지도록 바라보고 새겨들으며 북돋웁니다. 아이는 제 어머니랑 둘이서 이야기꽃 피우는 한때를 기쁘게 누립니다.

 딸아이한테 아버지로 살아가는 제 나날을 돌이킵니다. 내가 아버지 아닌 아이라 한다면, 아이 눈높이로 마주할 때에 내가 어떤 아버지인가를 곱씹습니다. 나는 내 아이하고 즐거이 놀아 주는 아버지일까요. 나는 내 아이가 먹고프다는 먹을거리를 제때 알뜰히 마련해 주는 아버지일까요. 나는 내 아이가 노래를 부르고 싶다 할 때에 노래를 불러 주며, 아이가 멧길을 걷고프다 할 때에 손잡고 멧길을 나란히 오르내리는 아버지일까요.

 할아버지가 설빔으로 사 준 색동저고리와 빨간치마를 입은 채 잠자리에 들고파 하는 아이를 보드라이 타이르면서 이듬날 증조외할머니 뵈러 가는 길에 입자면 예쁘게 벗어 놓고 이듬날 예쁘게 입어야 한다고 이야기해 주는 아버지인가 돌아봅니다. 아이로서는 더 입고플 뿐 아니라, 잠자리에서도 입고플는지 모릅니다. 구겨지건 말건 밤새 아이가 오줌을 누어 오줌에 젖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막상 오줌을 많이 누어 치마나 저고리까지 젖고 만 다음에 아쉽게 여기겠으나, 이렇게 닥칠 때까지는 저 하고픈 대로 하려는지 모릅니다. 많이 구겨지거나 더러워지거나 말아 못 입는 아쉬움을 아이가 스스로 느끼도록 놓아 두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곰곰이 되새기면, 이제껏 더럽히거나 오줌으로 적셔서 못 입고 빨아야 하는 옷이 꽤 많았습니다. 정작 입고 나가야 할 때에 변기에 아무렇게나 앉았다든지 쉬를 다 안 누었는데 벌떡 일어났다든지 하면서 꼬까옷을 벗어야 한 적이 퍽 있습니다. 이럴 때마다 빨래감이 늘어나니까 애 아빠는 주름살이 더 패는데, 주름살보다 아이 스스로 무척 좋아하는 옷을 살짝 잘못해서 못 입는 일이 훨씬 슬픕니다. 그래도 아이는 대문을 나서며 엄마 아빠 손을 나란히 잡고 마실을 가면 금세 잊고 노래를 부릅니다. 어쩌면 아이한테는 옷은 옷대로 치마 입기를 즐기고 싶으면서, 엄마 아빠 손을 나란히 잡으며 시골길을 달리고 싶은 한편, 버스도 타고 얼음과자도 얻어 먹고 사람 구경도 하고 외할머니 뵈러도 가는 나날이 즐거울는지 모릅니다. 아빠가 아빠 일에만 바쁘거나 엄마가 엄마 일에만 빠져 지내는 나날은 달갑지 않을 테지요.

 자주는 아니고 많이도 아니나, 서른두 달을 넘긴 자그마한 딸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아이한테 시키는 심부름 가운데 아이가 잘 해내는 심부름은 몇 가지 안 됩니다. 그렇지만 하루하루 아이가 해내며 뿌듯해 하는 심부름은 조금씩 늡니다. 아버지가 “잘했어. 고마워요.” 하고 머리를 쓰다듬을 때 아이가 좋아하는 낯빛이란 아주 어여쁩니다. 심부름을 하거나 집일을 거드는 차분한 얼굴빛이란 매우 예쁩니다. 아마 일하는 사람 누구나 이렇게 일하는 매무새가 아름답겠지요. 근심걱정 내려놓고 새근새근 잠든 아이 얼굴도 가없이 예쁘장하고, 일하며 애쓰는 아이 얼굴도 티없이 아리땁습니다.

- “내가 엄마라면, 내 딸이 무슨 말을 하든 언제나 잘 들어 줄 테니까요.” “소곤소곤 속삭여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아도, 나는 언제나 내 딸의 말을 다 듣고 있을 거예요.”

 그림책 《내가 만일 엄마라면》을 읽습니다. 아이가 엄마가 되어 하고프다는 일이나 놀이란 애 아버지로서 그닥 당기지 않습니다. 내킨다거나 달갑지 않습니다. 아니, 내가 아이일 때를 떠올린다든지 내가 내 아이만 한 자리로 돌아간다든지 하면서 헤아려 보아도 썩 즐거울 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내 딸한테 멋진 침대 덮개를 사 주고 은쟁반에 아침을 차려다’ 주겠다는 이야기가 썩 가슴으로 와닿지 않습니다. ‘딸이 밥 먹는 동안 옆에 앉아 지켜본다’든지 ‘딸이 학교에 갈 때 빨간 실크 드레스를 입게 해’ 준다는 일도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습니다. 으레 하는 일이기도 하거니와, 여느 때에 굳이 안 할 까닭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삼스레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아이는 학교에 가야 하나? 아이는 학교에 보내야 하나? 오늘 이 나라에서 학교는 어떠한 곳인가? 아이는 학교에서 얌전빼기처럼 굴도록 해야 하나? 아주 살짝 얌전히 있기는커녕 조금이라도 틈이 있으면 뛰고 구르며 노래하거나 춤추며 노는 아이가 펑퍼짐하니 끌리는 치마를 입고 놀 수 있을까?

 ‘내 딸을 회사로 데려가서 내 책상 위에서 춤추게 해’ 준다는 이야기 또한 그리 재미나지 않습니다. 눈 덮인 텃밭이나 얼음 꽝꽝 언 논자락에서 같이 손을 잡고 춤을 춘다든지, 멧꼭대기까지 올라서서 온 마을을 휘 둘러보며 춤을 추는 일이 훨씬 재미나니까요.

 그래도 ‘내 딸이 친구들이랑 놀 수 있게 커다란 나무 위에다 집을 지어’ 주겠다는 꿈은 신날 만합니다. 그렇지만, 더 생각한다면 굳이 커다란 나무 위에 집을 짓지 않아도 됩니다. 아이들이 커다란 나무를 마음껏 타고 오르면서 놀면 되니까요. 아버지로서 집을 지어 줄 수 있으나, 아이들이 저희끼리 힘을 내고 슬기를 모두어 집을 짓도록 옆에서 말없이 도와주는 일이 훨씬 즐거우리라 느낍니다.

 그림책 《내가 만일 엄마라면》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숱한 사람들이 복닥이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 나머지, 이 커다란 도시에서는 아이나 어른이나 느긋하게 꿈을 꾼다든지 이야기꽃을 피운다든지 꿈나라를 떠돈다든지 하기란 몹시 힘듭니다. 너무 바쁘며 너무 고단합니다. 매인 일이 지나치게 많고, 돈은 돈대로 많이 벌어야 먹고살 만합니다.

 아이하고 나눌 한 가지라면 사랑입니다. 아이한테 물려줄 한 가지라면 사랑입니다. 아이가 가슴으로 꼬옥 받아안으면서 키울 만한 한 가지라면 사랑입니다.

 이 나라 어른들은 한결같이 아이한테 사랑 아닌 돈과 시험성적과 가방끈과 아파트 따위를 물려주려 합니다. 아니,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이 이 어린 나이부터 고작 돈과 시험성적과 가방끈과 아파트 따위만 생각하도록 꽁꽁 옭아맵니다. 너른 꿈, 고운 사랑, 빛나는 믿음, 예쁜 손길, 구리빛 얼굴, 튼튼한 몸, 따스한 마음, 착한 몸짓, 싱그러운 매무새를 건사하도록 이끌지 못하는 오늘날 도시 어른들이에요. 아니, 어른들부터 스스로 재미없게 살아갑니다. 어른들부터 참말 따분하게 살아갑니다.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란 무엇인가요. 어른들은 무슨 이야기를 서로서로 주고받나요. 어른들은 무슨 책을 읽나요. 어른들은 무슨 일을 하느라 그토록 오랜 말미와 많은 품과 깊은 마음을 바치는가요.

 꿈은 없이 돈만 있기 때문에 《내가 만일 엄마라면》 같은 이야기조차 꺼내기 어려운 우리 삶이라고 느낍니다. 사랑은 없이 아파트와 자가용에 얽매인 나날이기 때문에 《내가 만일 엄마라면》 같은 이야기조차 책으로 사서 읽히거나 읽어야 하는 우리 삶이로구나 싶습니다.

 아이는 아이답게 살고, 어른은 어른다이 살아야 합니다. 아이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사람다움을 예쁘게 보듬어야 합니다.

 ‘나는 몇 살 어린이예요. 나는 몇 살 어린이로서 오늘 하루 이렇게 즐기거나 누리며 살아요.’ 하는 이야기를 수수하게 들려주면서, ‘나는 몇 살 어른이에요. 나는 몇 살 어른으로서 오늘 하루 이처럼 즐기거나 누리며 살아요.’ 하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내가 만일 엄마라면 (케이디 맥도널드 덴튼 그림,마거릿 파크 브릿지 글,베틀북 펴냄,이경혜 옮김,2000.4.2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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