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삶이 아니면 재미없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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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삶이 아니면 재미없는 책
  • 최종규
  • 승인 2011.02.27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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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박연,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책이란 하늘에서 똑 떨어진 이야기를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하고 동떨어진 이야기를 담는 책이 아닙니다.

 만화책이든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떠한 책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책이 재미없을 수 없습니다. 나하고 안 맞는 책을 만났을 뿐입니다. 책을 재미없게 여길 수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 재미없다면 책 또한 재미없고, 내가 살아가는 나날이 재미있을 때에 내가 읽을 책도 재미있습니다.

 책은 학습지나 교재나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닙니다. 책은 그예 책이며, 이야기를 종이에 글로 적바림한 묶음입니다. 책은 ‘학습지-교재-교과서-참고서’처럼 지식을 가르치거나 지식을 외우도록 이끌거나 지식을 풀어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땅 수많은 책은, 책이라는 이름이나 허울을 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작 책이 아니기 일쑤입니다. 학습지이면서 책이라는 이름을 붙인다든지, 교재나 참고서일 뿐이면서 책이라고 껍데기를 씌우기 일쑤입니다.

 책이 재미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교재나 학습지가 책인 줄 잘못 알기 때문입니다. 책을 재미없어 하는 사람은, 참다운 책, 곧 참책이라 할 만한 책을 만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책다운 책이 무엇인가를 살피거나 생각하거나 헤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하고 함께 노는 동무를 재미없다고 여긴다면, 나하고 함께 노는 동무도 나한테 재미있다고 느낄 수 없습니다. 왜 재미없다고 여기거나 느낄까요? 재미없다고 느끼면 재미없다고 느끼는 까닭을 생각하거나 찾거나 알아보면서, 이 재미없는 밑뿌리를 고치거나 가다듬거나 추슬러야 합니다.

 참말로 내 삶부터 재미없고, 내가 읽어야 한다는 책이 재미없으며, 내 둘레에서 흔히 보는 책이 재미없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내 삶이 재미없는 사람은 어떠한 책을 갖다 주어도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을 살뜰히 이어가겠다는 생각을 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떠한 책을 마주하더라도 가슴이 뭉클하거나 움직이기 어렵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내 동무를 아끼며 좋아합니다. 내 동무를 아끼며 좋아하는 사람이 날마다 받아드는 밥 한 그릇을 고마이 여깁니다. 밥 한 그릇 날마다 고마이 여기는 사람이 내가 뛰어놀거나 살아가는 이 땅 들판과 멧자락과 냇물을 즐거이 맞아들입니다. 내 보금자리를 즐거이 맞아들이는 사람이 될 때에 비로소 책 하나 좋아하는 마음을 북돋웁니다.

- 생명의 신비를 가득 안고 있는 이 알갱이들이, 자라서 수많은 새 생명들을 잉태하고 키워낼 이 작은 알갱이들이, 지금 여기, 너를 위해 죽어 있는 거란다. 네 목숨을 이어 주기 위해 … 지금 여기, 너를 위해 기꺼이 죽어 있는 거란다. 네 한 목숨이 살아갈 수 있도록 자기 목숨들을 버렸단다, 얘야. (13∼17쪽)

 만화책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를 읽습니다. 어렵게 나왔으나 쉽게 판이 끊어진 만화책을 헌책방에서 찾아내어 읽습니다. 어렵게 나왔으나 쉽게 판이 끊어진 만큼, 이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기도 몹시 힘듭니다. 갓 새책으로 나왔을 때부터 알아본 사람이 적었고, 나중에 버려지거나 잊혀지며 헌책방으로 한두 권 흘러들었어도 사랑하거나 아끼는 사람이 적으니까, 이 만화책 하나를 알뜰히 즐기기란 참으로 만만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고 살아가면서 만화를 그리는 박연 님이 내놓았던 만화책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입니다. 이 만화책에 담긴 이야기는 만화쟁이 박연 님이 머리로 꾸민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둘레에서 듣거나 몸소 겪은 삶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듯 그려낸 만화입니다. 가만히 보면, 동무나 다른 사람한테서 들은 이야기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어린 날 겪었음직한 이야기요, 보았음직한 이야기입니다. 또는 오늘날에도 이 나라 곳곳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어요.

 만화책이든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생각하고 부대끼거나 복닥이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더 잘난 이야기가 없고 더 못난 이야기가 없어요. 모조리 우리 이야기요, 온통 우리 삶입니다.

- “저도 처음엔 네 식구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를 보세요, 선생님. 그림에 직접 보이지는 않지만, 신발이 여기 있으니까 방에 한 사람 더 있는 거 아녜요? 그러니까 다섯 식구죠. 우리 아빠가 회사에 나가셔서 안 계시다고 우리 집 식구가 아닐 수 없는 것처럼, 지금 우리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한 식가가 아니라고 할 수 없잖아요.” (79∼80쪽)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받아들일 때에 내 가슴속에서 아름다운 꽃송이가 피어납니다. 가만히 헤아리면서 마주할 때에 내 마음속에서 어여쁜 꽃씨가 싹을 틉니다.

 작은 밭뙈기에 고구마나 감자를 심어 풀을 매고 거두어들이는 흔하거나 수수한 이야기라 하더라도, 씨를 묻고 북을 돋우며 풀을 매고 거두기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모습과 날마다 하던 일을 적바림해 놓고 보면, 알뜰살뜰 즐길 이야기로 거듭납니다.

 날마다 받는 밥상에 놓은 밥과 반찬을 누가 어떻게 마련해서 이렇게 내가 받아먹을 수 있는지를 곰곰이 살피면서 하나하나 적바림하다 보면, 날마다 밥먹는 이야기로도 날마다 재미나게 이야기꽃 피울 만합니다.

 똑같은 날은 없고 똑같은 말은 없으며 똑같은 일은 없습니다. 늘 다르고 언제나 바뀌며 노상 움직입니다. 늘 다른 줄을 느껴야 재미난 삶입니다. 언제나 바뀌는 줄 알아야 내 동무를 사랑하거나 좋아합니다. 노상 움직이는 줄 깨달아야 내가 이렇게 목숨을 선물받아 살아가는 고마움을 알아챕니다.

- “흥! 지 히이 맞는데 가만 있을 놈 뉘 있노! 보이소, 선상님요. 지 히이 맞는데 가만 있을 놈 뉘 있습니껴?” (152∼153쪽)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를 꾸며서 글로 적어야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책이 되지 않습니다. 놀랍다 싶은 이야기를 눈부시게 그려서 엮어야 놀라운 만화책이 되지 않습니다. 어마어마하다 싶은 이야기를 온갖 빛깔로 담아서 보여주어야 어마어마한 그림책이 되지 않습니다.

 손재주를 부린다고 해서 칼질을 더 잘하거나 자전거를 더 잘 타지 않습니다. 함께 밥을 먹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칼질을 하고 밥을 차립니다. 한손으로 자전거를 타든 두 손 모두 놓고 자전거를 타든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야 하는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즐겁게 오갈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물려입거나 얻어서 입거나 1천 원 주고 사 입거나 10만 원이나 100만 원 주고 사 입든 똑같은 옷입니다. 때가 묻거나 더러워졌으면 똑같이 빨래를 해서 똑같이 말린 다음 다시 입는 옷입니다. 내가 입은 옷이 더 좋다거나 네가 입은 옷이 더 꾀죄죄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제 몸에 알맞춤한 옷을 입을 뿐입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든 내 하루입니다. 어떤 놀이를 즐기거나 어떤 일을 하면서 돈을 벌든 내 삶입니다. 내 하루는 내가 알차게 보내야 합니다. 내 놀이와 내 일은 나 스스로 사랑하면서 붙잡아야 합니다. 칭찬을 받는다고 더 좋은 내가 아니고, 꾸지람을 듣는다고 더 못난 내가 아닙니다. 칭찬을 받으며 더 사랑스레 살아가면 되고, 꾸지람을 들으며 더 씩씩하게 지내면 됩니다.

- ‘으응? 쟤들이 또 득이에게 무슨 짓을.’ “너희들, 무슨 일이니?” “이 녀석, 뭐 먹었는 줄 알아? 바보 녀석! 그걸 먹으라고 먹어.” “나 이만 한 바퀴벌레 먹었다. 창수가 잡아 줬어.” “이 바보야! 누가 바퀴벌레 따위 먹으랬어? 그런 거 먹으라고 먹니, 이 바보야! 왜 먹었어, 왜 먹었어? 왜?” “배가 고파서. 왜?” (212∼216쪽)

 만화책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를 다시 읽습니다. 만화를 그린 박연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당신이 사랑하는 그림결에 담습니다. 박연 님 만화를 쥐어들어 펼칠 때에 박연 님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랑스레 복닥복닥 보내던 지난날을 예쁘며 곱게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랑스레 바라본 동무들 삶을 만화로 담았으니, 이 만화에 담긴 사람들과 삶이란 한결같이 사랑스럽습니다. 착한 일을 하든 미운 짓을 하든 한결같이 사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처음부터 착한 사람은 없고 처음부터 나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모두 사랑받아 예쁜 목숨을 선물받은 사람들이요, 누구나 사랑스런 손길을 둘레에 나누어 주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만화에는 교훈이 따로 없습니다. 만화에는 주제도 따로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동화이든 소설이든, 문학이든 예술이든, 교육이든 정치이든, 우리 삶터 어디에도 교훈이나 주제는 따로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느낄 수 있으면 되고,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보여주면 됩니다. 서로서로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더욱 알차며 한껏 즐거이 어울릴 터전을 돌볼 수 있으면 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기》 책날개 앞쪽에 “너…, 손바닥으로 하늘 가려 봤니?” 하는 말마디가 실립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란 참 바보스러운 짓이라고들 한다는데, 사람들은 참 바보스레 살아갑니다. 바보짓을 하고 바보일을 하며 바보놀이를 합니다. 그래도 또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립니다. 가리려 한다고 가려지겠습니까만,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밭에서 김매기를 하다가 한 번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 봅니다. 아주 살짝이지만 꽤 시원합니다. 풀밭에 드러누워 손바닥을 쫙 펼쳐서 하늘을 가리며 놀기도 합니다. 손바닥으로 해를 가리니 파란하늘과 흰구름이 꽤 잘 보입니다. 드러누워 팔을 뻗으니 이내 팔이 저리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면서 노는 몇 분이나 몇 초는 꽤 재미납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며 놀던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이렇게 만화책 한 권 빚어냈습니다.

― 손바닥으로 하늘가리기 (박연 글·그림,대교출판 펴냄,1995.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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