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쓰는 글, 사랑으로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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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쓰는 글, 사랑으로 읽는 책
  • 최종규
  • 승인 2011.03.0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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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좋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마리트 턴크비스, 《남쪽의 초원 순난앵》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도시로 마실 나갈 일이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도시에서 태어나 살았기 때문에 도시에서 보아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자랐다면 사뭇 달랐을 테지 하고 떠올려 봅니다. 흙을 사랑하면서 쓰다듬는 삶이 곧바로 책이니까, 애써 온갖 책이 넘실넘실대는 큰도시로 책을 사겠다며 마실을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는 달빛에 드리우는 그림자를 살몃살몃 밟을 수 있는 하루하루가 책입니다. 밖에 내놓은 손이 금세 얼어붙도록 불어대는 겨울바람이라든지 흙 묻은 손으로 밥을 먹어도 하나도 지저분하다고 느끼지 않는 여름날이 책입니다.

 사람들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예쁘장하게 꾸몄다는 여자 모델 옷을 벗기거나 입히거나 하면서 꽁꽁 틀어막힌 깜깜한 시멘트 방에서 번쩍번쩍 불을 켜 놓고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사진을 사랑하기에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프로사진가이든 전문사진가이든 내로라하는 사진가이든 이름을 드날리는 사진가이든, 온통 돈을 벌려고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지만 돈을 벌거나 이름을 얻을 생각이 아니라 한다면, 시골집 작은 텃밭에서 어린 딸아이가 호미를 쥐고 고랑을 톡톡 두들기며 김을 매는 모습을 아낌없이 사진으로 담을 수 있습니다. 똑딱이 디지털사진기이든 값싼 전자동 필름사진기이든 다 좋습니다. 어느 사진기로든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아름다운 모습을 날마다 숱하게 선물처럼 얻는 사진찍기를 즐깁니다.

 겨우내 물이 어는 바람에 옴쭉달싹 못하기도 했지만 물이 얼지 않았더라도 물이 얼까 걱정스러워 바깥마실을 다니지 못합니다. 설을 맞이해서 모처럼 바깥마실을 다니며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을 거쳐 일산에 있는 옆지기네 어버이를 찾아 뵈었습니다. 서울에 들렀다기보다 서울을 거쳐 갑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디를 가도 서울을 안 거치고는 가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길은 서울로 이어지고, 모든 버스는 서울로 뻔질나게 오가며, 모든 회사와 직장인과 문화시설은 서울에 몰립니다.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서울 전철역 사이사이 지나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부대낍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말 그대로 수많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아끼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아낄 수 없습니다.

 시골이라면 어르신이 옆에 지나가는데 인사를 안 할 수 없습니다만, 도시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늙은이들인 터라, 인사는커녕 자리 하나 내주지 않습니다. 시골이라면 어르신뿐 아니라 아이들이 다리가 아플까 걱정하면서 앉으라고 할 테지만, 도시에서는 어르신이고 아이이고 아랑곳할 수 없습니다. 젊은이라 할지라도 도시에서는 돈벌이 싸움터에서 피튀기도록 뛰느라 지치거나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아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입니다. 남보다 먼저 지식을 쌓거나 남보다 많이 지식을 거머쥐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답기보다 이웃 아이보다 일찍 영어를 깨치고 한자를 외워야 합니다. 아이들은 제 마음밭을 따뜻하게 돌보는 책을 읽지 않고, 독후감을 더 많이 써대도록 더 많은 명작과 걸작을 주워섬깁니다.

.. “문이 왜 닫혀 있지 않을까?” 안나가 물었어요. “이 문은 한 번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고 했잖아.” 마티아스가 대답했어요. “나도 알아. 영원히 열리지 않는다는걸…….” 안나가 고개를 끄떡였어요. 마티아스와 안나는 오랫동안 서로 바라보다 빙긋 웃었어요. 그리고 살그머니 문을 닫았습니다 ..  (38∼39쪽)

 스웨덴 동화할머니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은 ‘순난앵’ 이야기를 벌써 옛날에 글로 썼습니다. 1950년대 일입니다. 이 낡고 닳은 옛이야기를 다른 나라 어느 사람이 그림으로 옮겨 그림책 하나 새롭게 빚습니다. 우리 말로는 《남쪽의 초원 순난앵》이라는 이름이 붙는 책입니다.

 글도 그림도 살가운 그림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는 1950년대에 쓴 동화는 구닥다리로 여길 뿐 아니라 읽지도 읽히지도 않는데, 스웨덴 문학이니까 1950년대 글이라도 이렇게 훌륭하다 여기면서 섬기는가 보지?

 삶을 안 읽고 사랑을 못 읽으며 사람을 잘못 읽으니까, 우리들은 우리들 앞사람이 일군 아름다운 이야기를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인지 알아채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도, 나라밖 작품이나마 알뜰히 여겨 1950년대 글이라 하더라도 애써 옮겨내 주니 고맙습니다.

 다만, 이 그림책 《남쪽의 초원 순난앵》에 새옷을 입힌 그림쟁이는 2000년대 사람임을 깨닫는 한국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국사람 누구나 이 ‘순난앵’ 이야기에 새옷을 입힐 수 있으나, 새옷을 입혀야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 마티아스와 안나는 물레방아도 만들었어요. 물레방아는 햇빛을 받으며 잘 돌아갔어요. 마티아스와 안나는 맨발로 시냇물에 들어갔어요. 발바닥에 닿는 모래가 보드라웠습니다. “작은 내 발이 보드라운 모래하고 풀이 좋대.” 안나가 말했어요 … “얘들아, 어서 오너라!” 마티아스와 안나는 물레방아 옆에서 발걸음을 멈추었어요. “누가 부르는 거야?” 안나가 물었어요. “누구기는, 어머니가 빨리 오라고 하시잖아.” 아이들이 대답했어요. “나와 안나가 가면 싫어하실걸.” 마티아스가 망설였어요. “아니야, 어머니는 우리가 다 같이 오길 바라셔.” 아이들이 말했어요. “하지만 우리 어머니는 아니잖아.” 안나가 망설였어요. “그렇지 않아. 어머니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지.” 아이들이 말했어요 ..  (25∼27족)

 꽤 예전에 이응노 님이 하느님 이야기를 ‘한국 민화’로 새롭게 그린 적이 있습니다. 흰옷을 입고 풀집에 살며 소를 먹이는 ‘흙 일구는 여느 한겨레붙이 삶자락’에 걸맞게 하느님 이야기를 그린 적 있습니다. 요즈음에도 하느님 이야기를 ‘구멍난 바지저고리를 꿰매어 덧단 옷을 입은 가난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 모양새를 보여주는 그림으로 담는 분이 몇몇 있습니다. 살결 까만 예수님도 있다고 하는데, 아직 이 나라 한국에서만큼은 ‘흙빛 예수님’이나 ‘흙빛 하느님’ 이야기를 길어올리지 못합니다.

 아니, 순난앵 마을 이야기를 물돌이 마을 이야기나 무너미 마을 이야기나 두물머리 마을 이야기로 길어올릴 줄 아는 그림쟁이나 글쟁이나 사진쟁이는 아직 없습니다.

 어디 멀디먼 뚱딴지 같은 나라에만 있는 순난앵이 아닙니다. 나라밖 저 멀디먼 나라에만 굶주리거나 가난하거나 외롭거나 고달픈 아이들이 있지 않습니다. 순난앵은 스웨덴에도 미국에도 독일에도 한국에도 있습니다. 가난하며 슬픈 아이들은 스웨덴에도 미국에도 독일에도 한국에도 있습니다. 괴롭고 배고프며 아프지만, 고운 꿈 한자락을 예쁘게 붙잡으면서 힘껏 살아가는 아이들은 스웨덴에도 미국에도 독일에도 한국에도 있습니다.

..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어렵게 살던 시절, 농가에는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않았어요. 농부는 마티아스와 안나가 청어를 절인 소금물에 감자를 찍어 먹는 것 외에 다른 음식도 먹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 하지만 불행하게도 학교 생활은 마티아스와 안나가 생각했던 것처럼 즐겁지만은 않았어요. 마을 아이들과 함께 벽난로 주위에 둘러앉아 글자를 배우는 것은 재미있었지만 학교에 간 지 이틀째 되는 날, 마티아스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있지 않았다고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습니다. 점심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가지고 온 도시락을 열었어요. 마티아스와 안나는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마티아스와 안나의 도시락에는 차가운 감자 몇 알이 들어 있었어요. 다른 아이들 도시락에는 햄과 치즈를 곁들인 샌드위치가 들어 있었어요. 상점 주인의 아들, 요엘은 팬케이크를 가져왔고요. 그것도 도시락에 가득 싸 왔어요. 요엘이 가져온 팬케이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마티아스와 안나의 눈망울에 이슬이 맺혔습니다. “가난뱅이 녀석들, 뭘 보냐? 음식 구경 처음 하냐?” 요엘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어요 ..  (6, 14쪽)

 시골에서 지내다가 서울로 볼일을 보러 나가면, 도시하고 가까워질수록 숨이 막힙니다. 자동차 배기가스에 찌든 바람이 시외버스 안쪽으로도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서울에서 버스를 내려 볼일 보러 전철이나 시내버스 타고 움직일 때에는, 서로를 아끼지 않으면서 돈벌이에 바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진땀을 빼야 합니다.

 흙을 일구는 손길을 사랑할 때에는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도 마음밭이 넉넉하며 너그럽습니다. 흙을 일구는 손길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책 만 권 넘게 읽었을지라도 마음밭이 좁거나 아예 없습니다.

 린드그렌 할머님은 당신 온삶을 바친 사랑으로 글을 한 줄 두 줄 적바림했습니다. 온삶 바친 사랑이 깃든 글을 읽은 어느 그림쟁이는 당신 온사랑을 다시금 쏟아부어 그림책 하나를 길어올립니다.

 손재주로는 쓸 수 없는 글입니다. 붓솜씨로는 그릴 수 없는 그림입니다. 오로지 사랑으로만 쓰는 글이요, 사랑으로만 그리는 그림입니다. 또한, 지식으로는 읽을 수 없는 글이고 볼 수 없는 그림이에요. 오직 사랑으로만 읽으며 맞아들이는 그림책입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히려 하거나 어버이가 먼저 그림책을 사서 읽으려 할 때에는, ‘글쓴이와 그림쟁이 이름값’이 아니라, ‘어떠한 사랑과 눈물과 웃음을 담은 이야기’인가를 알아채거나 느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어버이들은 사랑과 눈물과 웃음으로 이야기를 엮으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모두들 너무 바쁩니다. 돈을 버는 일에 바쁘고 자동차를 몰며 여기저기 쏘다니느라 바쁩니다. 조그마한 텃밭 한 뙈기 일구지 못할 만큼 바쁩니다. 내 아이뿐 아니라 내 어버이나 내 동무하고 도란도란 사랑 어린 삶을 이야기 나누지 못할 만큼 바쁩니다.

― 남쪽의 초원 순난앵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글,마리트 턴크비스 그림,김상열 옮김,마루벌 펴냄,2006.3.25./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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