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는 사람은 왜 도시를 떠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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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사람은 왜 도시를 떠나는가
  • 최종규
  • 승인 2011.03.10 15: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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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에리카 레너드, 《작가의 집》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책을 쓴 스무 사람이 어떠한 집에서 살면서 글을 썼는가를 돌아본다는 책 《작가의 집》을 읽습니다. 저로서는 이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이 ‘20세기를 대표하는 글쓰는 사람’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노벨문학상을 탄 사람이 있고, 아주 널리 이름난 사람이 있으나, 이들을 놓고 20세기를 대표한다고 섣불리 말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어느 한 세기를 대표한다는 사람을 ‘인기투표’ 하듯이 뽑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온누리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책을 내놓아 다 다른 즐거움과 기쁨을 나누어 준 일을 돌아본다면, 이런 말은 참으로 부질없으며 덧없습니다. 헤르만 헤세나 어니스트 헤밍웨이나 버지니아 울프나 장 지오노 같은 사람들을 20세기를 대표하는 스무 사람에 넣을 수 있겠으나, 저로서는 어니스트 톰슨 시튼이라든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라든지 중 자오정 같은 사람을 넣고 싶습니다. 어쩌면, 《침묵의 숲》을 쓴 레이첼 카슨을 넣을 수도 있겠지요.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나 피에르 로티 같은 사람을 넣을 수도 있으나, 하이타니 겐지로나 미우라 아야코를 넣을 수도 있을 테며, 저는 한국사람이니까 리영희나 이오덕이나 이원수나 박경리나 권정생을 넣을 수 있을 테고요.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이란, 20세기를 대표한다기보다, 이 책을 쓴 프랑스사람이 좋아하는 글쟁이라고 여겨야 옳겠다고 봅니다. 더구나, 20세기를 대표한다는 사람은 온통 서양사람이며, 거의 다 서유럽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책을 쓴 사람 스스로 좋아하는 스무 사람인데다가 서유럽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일컬어야 올바른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만히 보면, 세계문학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문학을 살필 때에도 언제나 유럽문학이 한복판에 섭니다. 베트남문학이나 중국문학이나 필리핀문학이나 멕시코문학이나 칠레문학을 살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우리도 어느새 이런 틀에 젖어듭니다. 세계문학이라 하면, 말 그대로 세계를 아우를 뿐 아니라 세계를 돌아보는 문학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순원이나 조정래를 나라밖으로도 읽혀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수많은 나라와 겨레마다 아름다운 말꽃을 피우거나 일군 손길과 삶을 껴안을 때라야 비로소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다고 느낍니다.

.. 스웨덴의 모르바카 저택은 그녀(셀마 라게를뢰프)의 일가가 몇 대에 걸쳐 살면서 정을 붙인 곳이다. 그 땅에는 전통, 흥미로운 모험담, 겨우내 난롯가에서 도란도란 나누는 신기한 옛이야기가 풍부했다 … 장 지오노는 이 프로방스의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을에서 1895년에 똑똑한 무정부주의자이지만 고독했던 이탈리아계 구두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  (134, 170쪽)

 다시금 생각하면, 《작가의 집》은 그저 “글을 쓰던 사람들이 살던 집”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살핀 다음 적바림한 책이라고만 말해야 옳습니다. 어느 한 세기를 대표한다든지 세계문학을 대표한다는 말은 알맞지 않아요. 글을 쓰고 책을 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작가의 집》을 쓰고자 하는 사람이 ‘어떠한 마음과 뜻에 따라’ 더 좋아하는 사람들인가를 밝혀, 이러한 사람들을 좋아하는 까닭을 찬찬히 들려주면서, 이들 글쟁이 삶과 발자취를 톺아볼 때에 한결 알차며 훌륭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작가의 집》에 실린 스무 사람 삶을 돌아보면, 딱 한 사람을 빼놓고는 가난에 허덕이거나 배를 곯은 일이 없습니다. 딱 한 사람조차 술과 바람피우기에 빠져 돈을 흥청망청 써댔기 때문에 남의집살이를 하듯 떠돌며 살았지, 한 사람 한 사람 돌아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 살림이거나 꽤 넉넉한 살림을 누리면서 글을 쓴 사람들입니다.

 부자가 글을 쓰면 안 된다거나 밥 굶는 걱정 없이 글을 쓴다 해서 글이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다만, 글로만이 아니라 사진으로도 “작가들이 살던 집”을 보여주는 책인 만큼, “작가라 하는 사람들이 살던 집이 너무 으리으리하거나 크”니까, 어쩐지 높직한 울타리가 서는 듯합니다. 글 좀 쓰고 살려면 이만 한 부잣집에서는 살아야 한다는 듯한 느낌이 짙습니다. 더욱이, 《작가의 집》에 나오는 사람들은 저마다 ‘널리 사랑받으며 많이 팔리는 책’이 생기면서 이렇게 많이 팔아 돈을 버는 책이 있을 때마다 집을 넓히거나 키웠다는 이야기가 자꾸 나옵니다.

.. 1980년대 말부터 유럽의 정세는 전반적으로 어두웠다.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지척에서 폭격을 당했다. 울프 부부는 수시로 폭격이 일어나고 공습경보가 빈번한 혼란스러운 도시 런던을 점점 더 멀리하게 되었다 … 1930년에 딸 알린을 데리고 정착한 부부에게 “서쪽으로 200미터 남짓 거리에 도시가 있는 언덕 비탈. 종려나무, 월계수, 살구나무, 포도나무가 어쩌면 오십 그루쯤. 모자만 한 크기의 연못과 샘”이 있는 그곳은 천국과 같았다 … 그는 파리를 싫어했고 문학계 암투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언제나 마노스크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161∼163, 174, 183쪽)

 저 또한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들 깃든 시골집이 겨울에 덜 춥고 여름에 덜 더울 수 있도록 손질하자면 천만 원쯤 있어야 합니다. 저한테는 천만 원이란 꿈 같은 돈이며, 이만 한 목돈을 손에 쥐기란 몹시 어려우리라 느낍니다. 지난해부터 얻어 지내는 시골집도 집삯을 안 내고 거저로 고맙게 얻어 지내는 판에, 집 고칠 돈을 어디에서 얻겠습니까. 그런데, 저 또한 제가 쓴 책 가운데 어느 한 가지가 제법 팔려 한 해 사이에 다섯 쇄쯤 신나게 찍는다면 글삯으로 천만 원이 모일 수 있어요. 이렇게 글삯이 들어온다면 이 돈으로 우리 시골집을 요모조모 고치고 손질할 수 있을 테지요. 이런 꿈을 꿀 수밖에 없습니다. 나 혼자 지내는 집이 아니라, 아이와 옆지기가 함께 살아가는 집이니, 또 ‘글쓰는 사람 집’에 쌓인 숱한 책들이 비바람이나 햇볕이나 멧쥐한테 다치지 않도록 건사하자면, 아주 빼어난 집은 아니더라도(바랄 수도 없으나) 기름값이나 땔감 걱정을 덜 하면서 조용히 잘 지낼 집을 바랄밖에 없습니다.

 참말 작은 집 한 채라면, 스무 평 서른 평도 아닌 열 평 남짓 되는 멧골자락 작은 집에서 어른 둘이랑 아이 둘이랑 복닥이면서 지낼 수 있는 작은 집 한 채라면, 네 식구 먹을 푸성귀를 일굴 텃밭을 옆에 끼면서 그야말로 호젓하게 흙에 뿌리를 내리는 삶을 사랑하면서 글과 책을 함께 사랑할 만하리라 봅니다. 한 사람 몫으로 두 평씩, 마루 몫으로 네 평, 부엌 몫으로 두 평, 씻거나 빨래하는 몫으로 한 평이면 한솥밥 먹는 식구들 살림집으로 좋습니다. 뒷간은 집 바깥에 내어 똥오줌 거름을 모아 텃밭에 뿌릴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 그(로렌스 더럴)는 이집트의 습한 무더위, 도시가 뿜어내는 심한 먼지를 싫어했다 … 두 사람(크누트 함순과 아내)은 북부의 스토게임에서 ‘노르웨이 흙을 일구며’ 살았다 ..  (266, 319쪽)

 19세기를 살던 톨스토이 님은 한 사람한테 땅이 얼마나 있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네, 한 사람 앞에 땅이 백 평만 되더라도 이 넓은 땅을 돌보자면 등허리가 휩니다. 천 평 이천 평이 된다면 뼈가 빠집니다. 오천 평 만 평이 된다면 일하는 식구가 커야 합니다. 재 너머 사래 긴 밭 언제 갈려 하느냐는 옛사람 말도 있습니다만, 넓은 땅을 한 사람이 어떻게 건사하겠습니까.

 넓은 땅도 한 사람이 건사하기 벅차지만, 많은 돈이나 높은 이름도 한 사람이 건사하기 힘듭니다. 은행계좌에 1억이나 10억이 쌓였다면, 아이고, 이 돈 무서워서 어찌 사는가요. 집이란 한솥밥 먹는 살붙이가 오순도순 복닥이며 살을 부빌 만한 넓이면 넉넉하고, 돈이란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쓰거나 나눌 만큼이면 즐겁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면 되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근심덩어리인 돈이라고 느낍니다.

 《작가의 집》에 나온 스무 사람이 “글을 쓰고 지내던 살림집”을 다시금 돌아봅니다. 스무 사람이 글을 쓰며 지내던 살림집은 하나같이 도시하고 멀리 떨어집니다. 도심지 한복판에서 지내며 글을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양은 한국처럼 아파트가 널리 퍼지지 않기도 했지만, 수풀이 우거지고 멧짐승이나 들짐승이 마당을 오가는 시골자락 살림집에서 지내며 글을 썼다고 합니다. 자연을 노래하는 글을 썼든 안 썼든, 글을 쓰는 사람들 살림집은 한결같이 도시를 등집니다.

 문득 우리 나라를 떠올립니다. 우리 나라에서 글을 쓴다는 사람들은 으레 도시로 몰립니다. 더 큰 도시인 서울로 몰립니다. 작은 도시에 머물거나 시골자락에 뿌리내리며 글을 쓰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만, 훨씬 많은 글쟁이는 도시에 몰렸고, 이 가운데 서울 안쪽에 가장 많이 우글거립니다.

 신문기자이든 잡지기자이든 방송기자이든, 기자라는 이름을 내거는 이들 또한 으레 서울에 몰립니다. 책을 만드는 일꾼이라면 아주 마땅히 서울에만 있어야 하는 줄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니까 서울 이야기를 쓰고 서울 이야기를 듣거나 읽으며 서울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서울 바깥 이야기는 잘 모르며 잘 모르니까 나누지 않는데다가, 나누지 않다 보니 살갗으로 못 느낄 뿐 아니라,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 소식보다 멀디먼 소식처럼 여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뿌리내린 곳에서 살아가면서 생각합니다. 살아가는 보금자리 언저리에서 생각하며 말합니다. 살아가는 보금자리를 사랑하거나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4대강사업을 가로막자고 외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외침말은 그저 외침말이지, 내 몸부림이거나 내 움직임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서울에서는 환경운동이나 환경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4대강사업 막는 일을 비롯해 참다운 진보나 올바른 개혁을 이루지 못합니다. 서울 같은 도시는, 스스로 흙을 일구어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평화로운 일거리와 삶자락이 아니라, 무기공장이나 자동차공장 같은 데에서라도 일해서 어찌 되든 돈을 얻어 돈으로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돈으로 살림집을 얻어 돈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삶이 아닌 돈이 한복판에 또아리를 트는 도시입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나, 20세기에 손꼽히는 글쟁이 스무 사람이 하나같이 도시하고는 멀찍이 떨어진 시골자락 살림집에 뿌리를 내리면서 글을 쓴 까닭을 알 만합니다. 돈이나 이름값이나 힘(권력)이 아니라,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아끼는 넋을 글로 담고자 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 작가의 집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글,에리카 레너드 사진,이세진 옮김,윌북 펴냄,2009.11.10./1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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