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지 않으면 못난 채로 살아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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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하지 않으면 못난 채로 살아야 하나요
  • 최종규
  • 승인 2011.03.20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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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책 즐겨읽기] 히가시무라 아키코, 《해파리 공주 (1∼2)》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하고 견줄 수 없이 일에 파묻힙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글 한 꼭지에 온삶을 바치고,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 한 장에 온마음을 쏟지만,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만화 하나에 들이는 땀과 품과 겨를을 헤아리면 아무것 아닐 수 있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짧은만화를 그리면 짧은만화대로 잘 짜인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긴만화를 그리면 긴만화대로 꾸준히 이어가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만화는 그림을 바탕으로 글을 넣어 이야기를 이룹니다. 그러니까, 그림그리기와 글쓰기를 함께하는 만화인 셈입니다. 그런데, 그려야 하는 그림이란 아무리 적어도 주마다 스물∼서른 장이요, 스물∼서른 장에 이르는 그림을 다 다르게 다 다른 줄거리와 이야기 옷을 입힐 뿐 아니라,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과 움직임 또한 다 다르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똑같은 그림은 없습니다. 모두 새로 그리는 그림입니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펜으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먹으로 채우거나 톤을 붙여야 하고, 지우개로 연필 자국을 지웁니다. 이야기를 짜자면 소설쓰기와 같은 마음이어야 하고, 그림을 그릴 때에는 ‘사람 그리기(인체 데생)’와 ‘자연 그리기(풍경 데생)’가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림과 함께 넣는 글을 생각해 봅니다.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대사)이 따분하거나 앞뒤가 어긋나면 만화를 읽는 재미가 없습니다. 아니, 이야기가 이루어지지 않겠지요. 그림은 그림대로 ‘밑그림(기본 데생) 훈련’이 잘 되어야 하고, 글은 글대로 ‘글쓰기 훈련’이 훌륭히 닦여야 합니다. 그림쟁이 넋과 글쟁이 얼이 만나야 만화쟁이가 됩니다. 그림을 조금 깨작거릴 줄 알거나 글을 얼추 건드릴 줄 안대서 만화를 그리지 못합니다. 만화에 담는 이야기가 ‘거짓 아닌 참’이 되도록 바지런히 취재를 다니거나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어야 합니다. 이러하다 보니,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밤샘을 밥먹듯이 합니다. 주마다 이어그리는 만화를 그리는 이들은 한 주 내내 쉴 겨를이 없이 몰아친 다음 마감으로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달게 잠을 잤다가 다시금 새 마감에 쫓기며 일해요.

- ‘엄마. 엄마 말이 옳았어요. 일러스트레이터를 꿈꾸며 상경한 지 어연 반 년. 이곳 대도시 도쿄에는, 그야말로 공주님들이 가득해요. 하지만 죄송해요, 엄마. 이쯤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게요. 어느샌가 츠키미는, 어디서 뭐가 잘못된 건지, 공주님과는 거리가 먼 동인녀가 되고 말았어요.’ (1권 8∼10쪽)
- ‘무섭게도 도쿄에는 남자 공주님이 있어요. 그것도 강하고 아름다운 남자 공주님이.’ (1권 59쪽)
- ‘만일, 만일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인간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개나 고양이는 싫어요. 예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으니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난 그저 일렁일렁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가 되고 싶어요.’ (2권 64∼66쪽)

 요사이 일본만화를 보면 ‘동인녀(또는 오타쿠)’ 이야기가 더러 나타납니다. 동인만화를 그리는 여자라는 뜻도 될 텐데, 만화쟁이가 되기를 꿈꾸며 만화그리기에 온마음을 기울이는 여자요, 만화 아닌 다른 데에는 거의 눈길을 두지 않거나 생각하지 않는 여자라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동인녀라면 남자는 동인남이 될까요. 바삐바삐 만화를 그리자면 햇볕 쬘 틈이 없는데다가 책상맡에 붙어 밤을 지새우기 일쑤이니, 저절로 옷차림이라든지 머리모양이라든지 마음을 덜 쓰거나 안 씁니다. 다른 도시내기는 옷차림을 뽐낸다든지 얼굴이나 머리를 예쁘장하게 가꾼다든지 하겠지요. 그러나, 밤새 만화그리기에 매달릴 사람들은 얼굴에 떡을 바른다거나 예쁜 옷을 갖춰 입을 까닭이 없습니다. 뾰족구두를 신을 일도 없어요. 오래도록 한 자리에 앉아 일하기 좋은 헐렁하며 홀가분한 차림새여야 합니다. 며칠 밤샘을 한다면 언제 머리를 감거나 씻겠습니까. 아니, 머리를 감았다가 물이 덜 마르면 만화 원고에 물방울이 떨어질 테니, 원고 마감에 바쁜 이들은 물을 건드릴 수 없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제주섬에서 오름을 찍던 김영갑 님은 오름 둘레에서 살았습니다. 당신이 바라는 사진 한 장을 기다리면서 오름 둘레에서 몇 날 며칠 몇 달이고 살기를 열 해 스무 해 했습니다. 사진 한 장 찍자며 오름 둘레에서 한뎃잠을 자던 김영갑 님을 누군가 보았다면 ‘뭐 저런 거지가 다 있나?’ 싶을 만큼 덥수룩하거나 초라해 보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진 하나 제대로 얻으려고 힘쓰는 만큼 다른 데에는 눈길을 두지 못해요. 모든 기운을 쏟아 시 한 줄 소설 하나 일구는 이들이 원고지를 붙잡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박수근이나 이중섭이든, 반 고흐나 벨라스케스이든, 우리 둘레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숱한 그림쟁이이든, 그림 한 장에 당신 삶과 목숨을 바칠 때에 바야흐로 우리 가슴을 쿵쾅쿵쾅 뛰도록 하는 작품을 낳습니다. 이동안 그림쟁이 모습은 얼마나 헙수룩하거나 꼬질꼬질해 보일까요.

- “대체 여긴 왜 또 온 거예요? (해파리) 클라라라면 보다시피 건강하니!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왜냐니, 그야, 츠키미가 보고 싶어서 왔지.” (1권 76쪽)

 만화책 《해파리 공주》 1권과 2권을 읽습니다. 만화쟁이가 되고픈 꿈을 안고 작은도시에서 큰도시인 도쿄로 찾아온 열여덟 살 젊은 아가씨가 주인공입니다. 젊은 아가씨는 어린 날 어머니하고 본 해파리를 몹시 좋아합니다. 누군가 옆에서 바라본다면 ‘해파리 매니아’라 할는지 모르나, 그저 ‘해파리 즐김이’입니다. 해파리가 어떠한 목숨인지를 꾸준히 익히고, 해파리 그림을 그리며, 반짝거리는 해파리 빛깔과 모양을 담은 신부옷을 입는 꿈을 꿉니다.

 아직 스물조차 안 된 나이라면 홀로서기를 할 만한 만화쟁이까지는 멀었다 할 만합니다. 밑그림 그리기를 더 익히고, 다른 만화쟁이 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만화일을 배울 때라 할 만합니다. 만화쟁이도 몹시 바쁘지만, 만화쟁이 곁에서 심부름을 하는 사람도 참 바쁩니다.

 아무래도 만화책에서 다루는 만화쟁이 삶이다 보니 쉽게 ‘동인녀’라 이름을 붙이면서 다룬다 할 테지만, 수수하거나 꾸밈없이 살아가며 ‘내 꿈과 내 사랑’을 찾는 동인녀들이 우스꽝스럽거나 웃겨 보인다 할 수 없습니다. 번들거리는 옷을 차려입거나 겉모습을 예쁘장하게 꾸미거나 이름값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이야말로 우스꽝스럽거나 웃겨 보인다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 길을 찾아 내 삶을 차근차근 일구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웃입니다.

- ‘왜 요즘 계속 이런 차림만 하냐고? 그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정치가만은 절대 되고 싶지 않으니까! 차라리 변태 소릴 듣는 편이 두고두고 속 편하니까!’ (1권 103∼104쪽)
- ‘그래, 그런 따분한 얘기보다, 그 아이의 해파리 얘기가 100배는 더 재미있어. 아, 해파리 구름이다.’ (1권 107쪽)
- “사람은 입는 옷 하나로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고. 그렇다고 해서 당신들 옷 입는 취향을 당장 바꾸라는 건 아니야. 멋쟁이가 되라는 것도 아니야. 그저, 그런 차림으로는 적과 싸울 수 없다는 것만 알아 줘.” (2권 90쪽)

 만화책 《해파리 공주》에는 두 갈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수수하고 꾸밈없을 뿐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 그저 사회부적응자처럼 보인다는 동인녀들. 둘째는 돈과 이름과 권력을 마음껏 누리며 껍데기와 겉치레를 뽐내는 정치꾼하고 개발업자.

 《해파리 공주》 1권과 2권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만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홀로서는 만화쟁이를 꿈꾸는 동인녀’가 아닌 ‘동네 구멍가게 일꾼’이라든지 ‘공사장 일꾼’이라든지 ‘흙을 일구는 일꾼’이라면 이야기 흐름은 어떠하고, 이 만화를 마주할 사람들 생각은 어떠할까 하고.

 저마다 놓인 자리는 다르다지만, 저마다 일구는 삶은 같습니다. 저마다 하는 일은 다르다지만, 저마다 부딪치는 아픔은 같습니다.

 동네 구멍가게 일꾼도 권력자와 개발업자들 손아귀에서 허우적거리면서 괴로울 뿐 아니라 제 고향마을이나 보금자리를 빼앗깁니다. 공사장 일꾼은 하루 내내 땀을 흠뻑 흘릴 뿐 아니라 숱한 먼지를 뒤집어쓰니까 땀내가 물씬 풍겨 ‘여느 사람’이 보기에는 가까이할 만하지 않다 느끼곤 합니다. 흙을 일구는 일꾼은 예나 이제나 늘 푸대접을 받습니다. 초·중·고등학교 교사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이 맡는 아이들한테 “너는 커서 농사꾼이 되겠니?” 하고 묻지 않습니다. 아니 농사꾼이 되라며 가르치는 교사는 없습니다. 대학교에도 농사꾼이 되도록 가르치는 학과는 없습니다. 대학교를 마친 다음 농사꾼이 되었다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요.

 《해파리 공주》는 만화책이고, 만화는 만화다운 재미와 꿈과 이야기를 담기 마련입니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으로서 겪거나 느끼는 어려움과 아픔을 ‘괴로우니까 힘들고 눈물이 나요’ 하면서 그림으로 그릴 수 있지만, ‘괴롭지만 즐겁게 웃고 싶어요’ 하면서 그림으로 그릴 수 있습니다.

- ‘엄마, 여자는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고 하는데, 그럼 사랑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난 채로 있는 건가요?’ (1권 154쪽)

 만화쟁이도 사랑을 합니다. 동인녀이든 오타쿠라 하는 사람이든 똑같이 사랑을 하며,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정치꾼도 사랑을 하고 공무원도 사랑을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이든 대학교 교수이든 누구나 사랑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을 하지 않거나 사랑을 잊은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해파리 공주》에 나오는 개발업자나 큰돈만 노리는 이들이란 ‘돈바라기’일 뿐 ‘삶바라기’라거나 ‘사랑바라기’는 아닙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한국땅 공무원들이 참다이 사랑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제아무리 윗분들이 4대강을 파헤치라느니 무어라느니 하더라도 이런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참다이 내 이웃과 내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공무원이라 한다면, 내 이웃과 내 보금자리를 아낄 일을 찾으면서 씩씩하게 일하리라 생각합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들이 흙에 땀을 바치는 까닭은 돈을 벌 생각이 아니라 땀과 흙과 삶과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교사를 일컬어 참스승이라 한 까닭은 교사라는 자리는 아이들한테 지식이나 교과서를 주워섬기는 시험공부훈련기계가 아닌 따순 피가 흐르는 사랑어린 사람이 맡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아름다울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니 예뻐질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예쁠 수 없습니다. 마음속에 사랑은 없으나 옷을 예쁘장하게 보이도록 차려입는대서 예뻐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야만 뜻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가슴에 품은 사랑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꼭 열매까지 맺어야 좋은 사랑이 아닙니다. 스스로 우러나오는 사랑을 내 살가운 동무랑 이웃하고 오순도순 나눌 때에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 해파리 공주 (1∼2) (히가시무라 아키코 글·그림,최윤정 옮김,2010.12.∼2011.1.학산문화사 펴냄,42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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