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길이란 예쁘며 착하고 기쁜 삶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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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길이란 예쁘며 착하고 기쁜 삶길
  • 최종규
  • 승인 2011.03.22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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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스즈키 노리히사,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우치무라 간조라는 일본사람을 이야기할 때에 으레 ‘무교회주의자’라는 이름을 앞에 붙입니다. 이 이름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치무라 간조 님은 ‘교회 없어도 되는 믿음’을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치무라 간조 님이 말한 ‘교회 없어도 되는 믿음’이란, ‘교회에 얽매이는 넋’이 아니라 ‘하느님을 참답게 믿으면서 내 삶을 아름다이 일구자는 넋’입니다.

.. 우치무라 간조 하면 어딘지 모르게 근접하기 어렵고, 근엄한 인물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실은 들이나 산에 피는 한 송이 꽃에도 눈길을 돌리고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  (7쪽)

 하느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어야지, 예배당이나 절간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어야지, 하느님 얼굴을 새긴 동상이나 그림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는 사람이어야지, 부처님 모습을 새긴 동상이나 그림을 믿는 사람이 될 수 없어요.

 조각상이나 그림은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늘 떠올리려고 마련합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 있으면서 우리를 보살필 뿐 아니라 우리가 엇나가지 않도록 알뜰히 이끈다고 생각하려고 마련합니다.

 거짓스러운 껍데기라는 ‘우상’을 섬기지 않을 노릇이면서,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우상으로 받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믿음으로 사랑할 넋입니다.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내 삶으로 녹일 얼입니다. 나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나부터 부처님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모든 말이 하느님이 들려주는 말과 같아야 합니다. 내 모든 낯빛과 매무새가 부처님이 살아움직이는 흐름과 같아야 합니다.

.. 간조가 그리는 천국에는 거기에 상응하는 노동이 있고, 이 노동의 하나로 교육이 있다. 천국의 교육이 현세의 교육과 다른 것은 거기에는 “정부에 아부하고 국민에게 아양을 떠는” 학자는 없고, “무학이라고 해서 남 앞에 수치를 느낄 필요”가 없으며, 국회의원(간조는 현재의 국회의원으로 천국에 들어갈 자는 거의 없다는 것을 부언한다)과 어린이가 함께 공부한다. 천국에서의 미술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상의 발표”이며,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미켈란젤로나 베토벤이다 … 간조가 부정하려 한 것은 서양에서 전해진 기독교에 집착한 서양적인 제도나 의례이다. 그와 동시에 서양의 교파와 선교단체의 지배하에 굴복하고 있는 일본 교회의 체질이다 ..  (82, 99쪽)

 일본사람 우치무라 간조 님은 적잖은 한국사람한테 믿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한테는 ‘무교회주의’라는 주의주장을 나누어 주었을 테지만, 어떤 사람한테는 ‘옳고 바르며 착한 삶’이나 ‘예쁘며 참답고 기쁜 삶’을 나누어 주었겠지요.

 ‘교회 없어도 되는 믿음’이라 해서 ‘교회는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주의주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교회가 없어도 되는 믿음이란 교회가 있어도 되는 믿음이기도 합니다. 교회가 있고 없고를 떠나, 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착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없으면 없는 대로 믿고, 교회가 있으면 있는 대로 믿습니다.

 아이한테 젖을 물리면서도 비손을 드립니다. 아이를 토닥토닥 재우면서도 비손을 합니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면서도 비손을 합니다. 조그마한 아이 손에 숟가락을 쥐어 스스로 밥을 떠먹도록 오랜 나날 가르치거나 이끌면서 비손을 품습니다.

 삶이 온통 비손입니다. 삶이 온통 사랑입니다. 삶이 온통 믿음입니다.

 믿음은 교회 안팎 어디에나 있지, 교회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성경책에도 적히지만 성경책에만 붙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이나 목사님만 읊을 수 있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랑을 나누는 모든 사람들 착한 가슴속에서 샘솟습니다.

.. 전쟁이라면 모조리 절대적으로 부정하는 사상에 도달하는 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간조가 오직 성서에 깊숙이 빠져든 결과였다 ..  (110쪽)

 믿음을 고이 건사하기에 아름답습니다. 믿음길을 걸으며 빙그레 웃기에 아리땁습니다. 믿음씨앗을 솔솔 뿌려 다 함께 하느님나라로 가자고 손을 잡아 이끌기에 어여쁩니다.

 하느님나라란 하늘나라일 수 있고 흙나라일 수 있습니다. 두 눈을 감고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되어도 하느님나라일 수 있습니다. 나무로 짠 마지막 쉼터에 깃들어 땅속에 깊이 묻혀도 하느님나라일 수 있습니다.

 작고 좁다는 가난한 사람 살림집이 하느님나라일 수 있습니다. 시골자락 흙집이 하느님나라일 수 있습니다. 어디나 하느님나라요, 어디나 하느님나라가 아닙니다.

.. 어떤 인간의 전기를 읽거나 쓰는 일은 한동안 그 사람과 마음의 여행을 함께하는 것이다. 더욱 때만 달랐지 그 인물과 몸도 함께 여행하는 것이다 ..  (164쪽)

 우치무라 간조 님 이야기를 읽는 까닭은 우치무라 간조라 하는 대단하거나 훌륭하다는 사람을 떠받들 생각 때문이 아닙니다. 우치무라 간조라 하는 한 사람이 사랑하려고 한 ‘아름다움’이 무엇일까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내 삶을 한껏 ‘아름다이’ 북돋울 길을 내 손으로 씩씩하게 일구고픈 기운을 보듬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읽기란 아름다운 삶을 읽는 즐거운 웃음꽃입니다. 책읽기란 예쁜 꽃송이를 품에 살포시 안으며 활짝 웃다가는 너를 꺾어 품에 안으니 미안하구나 하고 울 줄 아는 눈물바람입니다.

―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스즈키 노리히사 글,김진만 옮김,소화 펴냄,1995.11.30./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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